#56 봄이 오는 소리(6)
짐이 어느 정도 마차에 올랐고, 이제 떠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비앙카의 짐이 빠짐없이 다 수레에 오르는지 확인했던 이본느는 비앙카가 손수 마차에 들고 탈 짐과 그녀의 옷차림을 정돈하기 위해 비앙카의 방으로 향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겨울에는 찬기가 남아있다. 몸이 약한 비앙카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마차에서 덮을 담요와 등에 받칠 쿠션을 따로 챙겨야 했다.
이본느가 방에 들어서자, 비앙카가 그녀를 반겼다.
“짐은 다 챙겼니?”
“네. 하나도 빠짐없이 올라가는 걸 확인했어요. 생강이 멀미에 좋다기에 혹시 몰라 편강도 챙겨뒀어요.”
“아니, 네 짐말이야.”
타이르는 듯한 비앙카의 말에 이본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도 비앙카가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던 이본느는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가슴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곤 했다.
이본느의 짐은 다 챙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적었다. 옷가지 몇 개과 아끼던 머리끈 정도로, 보따리 하나에 다 들어가는 양이었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방구석에 미리 챙겨둔 보따리를 흘끔 보며 대답했다.
“제 짐은 별로 없어서…. 다 챙겼어요.”
“부족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거라. 내 시녀의 차림새는 내 품위와도 관련된 것이니까. 특히 수도에서는 더더욱. 무슨 뜻인지 너도 알고 있지?”
“예, 마님.”
이본느도 귀족 마나님들 사이에서 오가는 신경전은 잘 알고 있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잘생긴 미동을 고용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귀족 마나님들이 옷차림새까지 챙겨서 곁에 두는 시녀는 보통 유모의 딸로서 오래 같이 지내온, 젖동무 같은 이들이었다. 이본느는 비앙카가 옷차림에 신경 써주는 것 자체보다, 비앙카에게 있어 자신이 마치 그 정도의 위치라고 확답해 준 것 같아 기뻤다.
이본느가 아끼는 머리끈은 비앙카의 옷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다른 마님들은 하녀들과 같은 옷감을 공유하는 걸 몸서리치다 보니 천이 남아도 하녀들이 쓰지 못하게 했고, 하녀들도 남은 천에 눈독 들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흔쾌히 남은 천은 이본느가 필요한 걸 만들어 써도 되도록 허락해주었다.
이본느가 받은 자투리 천은 옷의 소매나 치맛단에 덧대어 넣을 수 있는 만큼의 양이었지만, 회색빛 수수한 옷감에 화려한 색이 선명하게 염색된 귀한 천을 덧대어 봤자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대신 이본느는 비앙카가 준 천을 가늘게 잘라 머리끈을 여럿 만들어, 같은 방 하녀들과 나누어 가졌다. 그녀에게는 이미 비앙카에게 받은 회색 다람쥐 모피가 있었고, 다른 하녀들이 비앙카를 좋게 여기는 쪽이 비앙카를 모시는 입장에서 더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이본느의 의도대로 방의 모두가 기뻐했고, 마님께서 너그러우신 분이라며 입을 모았다.
비앙카가 이렇게 그녀를 챙겨줄 때면, 그때의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이본느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손끝으로 얼른 훔치고는 냉큼 비앙카의 외투를 가져왔다.
그렇게 비앙카가 이본느의 시중을 받으며 떠나기 전 마지막 단장을 하는 사이, 하녀들 한 무리가 비앙카를 찾아왔다.
“마님, 부르셨다고요.”
“아, 그래. 이리 오거라.”
이본느가 외투의 리본을 매어주도록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비앙카는 하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은사로 자수가 놓인 하얀 외투를 걸친 비앙카의 모습은 마치 호수의 요정 같았다. 평소보다도 더 고귀해 보이는 모습에 하녀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비앙카의 앞에 섰다.
비앙카가 부른 하녀들은 바로 비앙카에게서 레이스 만드는 법을 배운 이들이었다. 비앙카가 뱅상을 시켜 불러 모은 그녀들은 지난겨울 동안 비앙카의 밑에서 레이스를 만들었다. 비앙카를 보고 달음박질쳤던 검은 머리 하녀, 미셸도 그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뱅상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였던 이들이지만, 그녀들은 비앙카가 만든 레이스를 보고 의욕을 불태웠다. 눈처럼 하얗고 꽃처럼 유려하며 장신구처럼 화려한 그것은 여자들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하녀들은 비앙카가 이렇게 대단한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에 존경심을 품었다. 그전까지는 사치스럽기만 한 마님이었다면, 이제는 취향이 고상하고 아는 것이 많은 마님이 된 것이다.
비앙카가 레이스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 하자 그녀들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귀한 기술을 선뜻 알려주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돈 받고 가르쳐 준다 하여도 기꺼이 돈을 지불했을 만한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레이스’라는 것을 만드는 법만 익힌다면 평생 놀고먹을 재주가 생기니 하녀들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주저하며 모인 것과 달리 그녀들은 모두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하녀들이 호의적으로 변하니 레이스 장사의 밑거름은 수월히 쌓아 올려졌다. 그녀들은 열과 성을 다해 레이스를 만드는 법을 익혀 갔고, 그 덕에 비앙카는 레이스 손수건을 넉넉히 들고 수도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비앙카가 수도에서 판매 명단을 갖고 돌아왔을 때는 충분히 많은 물건들이 만들어져 있으리라.
비앙카는 레이스 만드는 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비앙카 혼자서 물량을 전부 소화해 낼 수는 없고, 비앙카 본인 자체가 자수나 뜨개질 같은 일에 오래 매달려 있지 못하는 편이었다.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몇 달 동안 수틀을 잡지 않았다. 그러니 유용할 수 있는 인력은 유용하게 쓰는 것이 옳았다.
하녀들이 기술을 다른 곳으로 유출할까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애초에 그녀들은 영지에 묶인 농노들이었고, 뱅상이 그에 관해서 엄격하게 관리할 테니 당분간은 괜찮았다.
어차피 근 15년 이내에 다른 곳에서 발견될 기술이기에, 비앙카는 지금 당장 레이스를 이용해 자금을 끌어모으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 여겼다.
어차피 한번 인심 쓴 것, 제대로 그녀들을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앙카는 옆에 따로 빼두었던 양피지를 하녀 중 제일 우두머리에게 건넸다.
“내가 마지막 패턴을 알려주지 못하고 왕성에 가게 되었구나. 여기 패턴이 있으니 연구해서 만들어 보아라.”
“마님 지도 없이 할 수 있을까요, 저희가…?”
하녀들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비앙카는 픽 웃었다. 그녀들이 그저 비앙카의 눈치를 봐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의 실력만큼은 내 믿는다. 나보다도 더 능숙하니, 금방 어떻게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야.”
“마님보다 더 능숙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마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저희는 레이스라는 걸 떠올릴 생각조차 못했을 거예요.”
하녀들의 존경 어린 답에 비앙카는 슬쩍 조소했다. 그녀가 대단하여 레이스를 만들어낸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밝힐 수는 없는 일. 비앙카는 목을 가다듬고 태연히 말을 이었다.
“믿는 만큼 일을 시킬 것이니 그리 겸손해할 필요가 없다. 이 마지막 패턴까지 완성하고 나면 어느 정도 다양한 패턴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 뒤로 각자 새로운 무늬를 가진 물건을 만들어보도록 하여라. 제일 아름다운 무늬와 물건을 만든 아이에게는 내 큰 포상을 내리마. 실과 천은 뱅상에게 말해 두었으니 필요한 만큼 지원받도록 하고.”
큰 포상이라는 말에 하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비앙카는 엄격하기는 하지만 베풀 때 손이 작은 주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녀, 이본느에게 별 이유 없이 회색 다람쥐 모피를 대뜸 건네준 건 하녀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그녀가 큰 포상이라고 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것임이 분명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마님. 기대에 어긋남 없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녀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비앙카에게 열심히 하겠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비앙카의 방을 나선 하녀들은 자신이 상을 탈 것이라 호언장담하며 조잘조잘 웃었다. 기술도 갈고 닦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보람도 있고, 잘하면 상도 있고. 아주 완벽했다.
하녀들이 나갔지만 비앙카는 조금도 쉬지 못했다. 곧바로 하녀들과 엇갈려 방에 들어선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를 맞이하러 온 소뵈르였다.
“마님, 이제 내려오셔야 한답니다.”
“그래.”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들에게 도안을 건넴으로써 비앙카는 성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끝마쳤으니, 이제는 정말로 떠날 차례였다. 이본느가 자신의 짐을 든 채 비앙카의 뒤를 따르고, 소뵈르는 바로 비앙카와 발걸음을 맞췄다.
소뵈르는 슬쩍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나간 하녀들이 엄청 신나하던데,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별건 아니었네. 당분간 날 보지 않으니 즐거운 모양이지.”
“…그거 농담이시죠?”
“그 정도 눈치는 있었군, 소뵈르 경.”
심드렁히 대답하는 그녀의 무덤덤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감을 잡기 힘든 비앙카의 모습에, 소뵈르는 끌어안은 양팔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재미없는 농담이었습니다. 게다가 마님이 그리 말하면 진담 같다고요.”
다른 이였다면 또 모를까, 자학적인 농담을 한 주체가 비앙카라는 점에서 더더욱 무서웠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보니 장단 맞추기가 어려웠고, 농담인 걸 알게 되더라도 어떻게 대꾸해야 옳은 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까다로운 마님이라니까. 소뵈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지간한 이었다면 바로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소뵈르는 포기하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능청스레 비앙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가스파르 경이 아니라 제가 찾아온 건지 묻진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