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55화 (55/192)

#55 봄이 오는 소리(5)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비앙카의 짐에 하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비앙카의 짐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던지라, 이본느는 눈을 크게 뜨고 하인들이 궤짝을 놓쳐 떨어트리는 일이 없도록 감시했다.

그렇게 비앙카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에 비해 정작 영지의 주인인 자카리의 짐은 고작 궤짝 다섯 개였다. 그나마도 옷가지보다 무기와 서적, 왕에게 진상할 물건 등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전쟁터를 전전해온 만큼, 자카리는 짐을 단출하게 꾸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수도에서 반년 가까이 머무는데 궤짝 다섯 개는 너무했다. 본디 뱅상이 준비한 자카리의 짐은 궤짝 여덟 개였었다. 자카리의 짐이 그렇게 줄어든 것은 전적으로 비앙카 때문이었다.

어찌하다 자카리의 짐이 줄어들게 되었나. 그것은 비앙카의 짐을 옮기기 위해 찾아온 뱅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궤짝을 보고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을 그대로 옮겨가실 생각이십니까?”

“필요한 것만 가져가는 것이다. 내가 수도에 가서 비웃음이라도 사길 바라는 게냐?”

“백작님도 궤짝 여덟 개만을 챙겨 가십니다. 마님의 짐은 너무 많습니다. 궤짝 열 개 내로 줄여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열 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백작님 짐이 여덟 개밖에 되지 않는 것이 우스울 정도구나. 도대체 뭘 챙기신 게냐?”

“필요한 것을 챙기셨을 뿐입니다.”

“내 한 번 보도록 하지.”

그리 말하고 대뜸 일어나는 비앙카의 모습에 뱅상은 내심 놀랐다. 지금까지의 비앙카였다면 자카리의 짐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짐 개수를 줄일 수 없다 주장했을 텐데, 자카리의 짐까지 신경 쓰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어서 그런가, 뱅상은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감탄하기 시작했다. 비앙카에 대한 뱅상의 기대가 애초에 그리 크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뱅상은 조용히 비앙카를 자카리의 궤짝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비앙카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자카리의 짐이 들어있는 궤짝을 내려 보았다. 그녀의 연녹빛 눈동자가 열어보라 말하고 있었다. 뱅상의 지시 하에 하인이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궤짝 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쿵, 하고 열림과 동시에 비앙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뭔가?”

“…백작님의 옷입니다만…?”

“…다음 걸 열어보게.”

비앙카는 고운 미간 사이를 잔뜩 찌푸린 채 옆에 있는 궤짝을 향해 손끝을 까닥였다. 비앙카가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한지 알 수 없었던 뱅상은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하인에게 고갯짓했다. 하인은 바로 다음 궤짝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낯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그녀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내리 젓다가, 다시 궤짝 안을 보았다가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그러던 그녀는 돌연 뱅상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집사.”

“네, 마님.”

“솔직히 말하게.”

“네, 마님.”

“영지가 가난한가?”

“네…. 네?”

솔직히 말하라 다그치는 비앙카의 매서운 추궁에 잔뜩 긴장한 뱅상은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으나, 생각지도 못한 어처구니없는 말에 그만 말을 더듬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뱅상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비앙카의 시선 아래, 그녀가 그리 말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뱅상의 말문이 막힌 사이, 비앙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를 몰아붙였다.

“지난번 나에겐 밀랍 초를 마음껏 써도 된다 하더니, 사실 부족한 살림을 쥐어짰던 겐가?”

“아,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러면 백작님의 옷이 이게 뭔가?”

비앙카의 가늘고 잘 다듬어진 손끝이 가리킨 건, 바로 궤짝 속에 잘 개켜있는 자카리의 옷이었다.

자카리의 옷을 발견한 비앙카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원체 자카리의 체격이 좋고 분위기가 위압적이다 보니 평소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따로 놓고 본 자카리의 옷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적 유행인지도 알 수 없었고, 모피는 한 단계 떨어졌으며, 자수도 단순하고 한물간 도안이었다.

전쟁터에서야 이런 옷을 입을 수도 있다고 치지만,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수도가 아니던가? 모든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계의 장인만큼, 아무리 자카리가 전쟁 영웅이라고는 하나 이런 질 떨어지는 옷을 입고 갔다가는 비웃음을 살 뿐이리라. 더불어 비앙카도. 생각만 해도 끔찍해진 비앙카가 몸서리쳤다. 하지만 뱅상은 뭐가 문제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우뚱할 뿐이었다.

“나름 백작님께 잘 어울리시는….”

뱅상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결단을 내린 비앙카는 그대로 궤짝 안 넝마들을 손가락질했다.

“저 옷, 저 옷, 저 부츠, 저 외투, 전부 끄집어내게.”

“마, 마님.”

“저런 옷을 입은 백작님과 같이 가면, 나도 비웃음당할 게 아닌가. 그 꼴은 못 보네. 차라리 수도에 가서 맞춰 입게 하는 게 훨씬 낫지.”

사실 넝마라는 건 비앙카의 시점에서 다소 왜곡된 표현이기는 했다. 화려하지 않다 뿐이지, 멀쩡하고 단정한 옷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유하지 않은 남작과 자작들도 자카리와 비슷한 옷을 입었다. 고급 모피와 자르르 흘러내리는 실크, 금사로 놓인 섬세한 자수는 품이 많이 드는 만큼 귀했다. 변방의 가난한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매번 그런 옷을 새로 지어 입느니, 말 한 마리 더 사는데 투자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백작이었고, 떠오르는 신예 귀족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인 비앙카가 바로 명문 블랑쉐포르의 딸일지언데, 비앙카가 그를 빈곤한 귀족들과 같은 옷을 입고 수도에 가게 둘 리가 없었다. 비앙카에게선 전장에 선 기사처럼,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뱅상도 비앙카의 말이 일리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지금껏 비앙카의 사치 품목을 구해오는 것은 뱅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보는 눈이 높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비앙카에게 장단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늘어난 센스였을 뿐, 뱅상은 애초에 세련된 감각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자카리는 옷차림새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관심도 없다 보니 뱅상이 ‘적당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옷을 골라왔고, 그 때문에 남자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여전히 센스가 바닥이었다.

뱅상은 절약에 관해서는 능력 있는 수하였지만, 비앙카는 사치에 관해서 능력 있는 주인이었다. 확실히 이런 일은 비앙카가 적임이었다.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사치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이었다. 레이스 사업도 그렇고, 최근 들어 비앙카가 영지에 굉장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뱅상은 거듭 놀랐다.

뱅상은 마님이 바라는 대로 하시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수도에서 마님은 옷을 마음껏 사재끼실 텐데, 거기에 백작님의 옷이 몇 벌 얹어진다 하더라도 예산에서 크게 변동은 없을 것이다.

그 결과 궤짝은 다섯 개로 줄게 되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전부 탈탈 털어놓고 가고 싶었지만, 수도에서 옷을 맞출 때까지는 입을 옷이 있어야 하기에 그나마도 고르고 골라, 조금이나마 멀쩡한 옷들만을 남긴 결과였다. 넝마들을 싹 덜어낸 비앙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상황이 이래서야 수도에 가서도 한동안 자카리의 옷을 비앙카 자신이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영지에서야 자카리가 주인인 만큼 뭘 입고 다니던 상관없었고, 그녀의 평판이나 명예와도 관계없었다. 하지만 수도는 다르다.

왕의 영토인 수도에서는 모두가 손님이었으며, 동시에 서로의 가치를 재 보고 판단하는 사교의 장이었다. 자카리에게는 강인한 군대와 영토, 그리고 든든한 외척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객관적으로는 그를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사람은 속물적인지라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로 상대를 파악하기 마련이었다. 특히 귀족들은 권위적이고, 특권의식이 높은 이들이 아니던가. 물론 비앙카도 포함된 이야기였다.

그녀가 그러하기에, 비앙카는 수도의 귀족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손바닥 내려다보듯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자카리 혼자 수도에 갔을 때, 저런 옷차림으로 인해 뒷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가 같이 가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게 둘 수는 없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남편이 아니던가. 그래도 허우대가 멀쩡하고 생김새는 시원시원하니, 그럴듯한 옷 몇 개만 맞춰두면 한동안 괜찮을 것이다.

자카리와 옷을 따로 보지 못했더라면, 그녀로서는 한동안 자카리의 옷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비앙카는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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