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봄이 오는 소리(3)
“저희는 부부지만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아직 그런 호칭을 입에 담기 이른 게 아닐까요?”
자카리에게 접근했다 거듭 실패의 쓴맛을 본 비앙카의 본심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솔직히 비앙카의 자존심 얼마나 드높은데, 매번 남편에게 거절당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비앙카의 손가락이 슬쩍 그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밀쳐진 자카리는 그 위치에서 더 비앙카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자카리는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 애타는 시선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전장의 신, 무패의 기사, 철혈 백작 자카리라 할지라도 아내의 앞에서는 드높은 용기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졌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굳이 그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요.”
자카리의 옆모습은 거절당한 것이 무척 면구스러운 듯 보였다. 보는 비앙카마저 머쓱하게 할 정도로.
이런 일에 면역이 없던 비앙카는 그런 자카리의 모습에 그를 여보라 불러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가 애써서 손을 내밀었는데, 내가 너무 매몰차게 쳐낸 것은 아닐까?
하여간 자카리의 생각은 읽을 수가 없다. 여보라는 호칭을 듣고는 싶지만, 나와 후계자를 갖는 건 부득불 피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비앙카가 고민하는 사이, 자카리는 금방 안색을 가라앉히고는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자신이 때를 놓쳤다는 걸 깨달은 비앙카는 여보라 부를까 말까 고민하며 달싹이던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보다 자카리의 표정을 읽는 것이 능숙해졌다.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도 알아채고. 생각까지는 무리더라도 이 정도라면…. 그래, 진보라면 진보일지도.’
비앙카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화자찬했다. 만약 자카리나 다른 이들이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았다면 놀라서 팔짝 뛰고 답답한 속을 두드렸을 테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깊은 침묵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삼킨 자카리는 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오늘은 아직 날이 쌀쌀하니, 내일모레쯤 하여 승마를 배워 봅시다. 내가 가르쳐주겠소.”
“당신이 직접이요?”
“…싫소?”
자카리의 그윽한 시선과 마주하게 되자, 비앙카는 싫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싫다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비앙카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바쁘시잖아요. 오늘 말을 직접 건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는 걸요.”
“그래서 그렇소.”
“네?”
“내가 지금껏 많은 걸 놓치고 있던 것 같아서.”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뜬금없이 호칭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그랬다. 그의 말은 항상 불친절했다. 그 스스로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툭툭 내뱉듯 꺼내는데, 듣는 비앙카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자카리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와 자주 마주하게 되는 건 좋은 일이다. 안 그래도 비앙카 홀로 어떻게 해야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머리를 붙잡고 골몰하던 찰나였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 기회를 알차게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며, 비앙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좋아요. 기대되네요. 그때까지 말의 이름도 지어둘 거예요.”
비앙카가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카리도 비앙카에게 화답하듯 마주 보며 웃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가늘게 접혀 휘어지며, 은회색 빛 속눈썹이 까만 눈동자 위에 초승달처럼 드리웠다.
웃는다고 해봐야 언제나 입꼬리 끝만 달싹 올려 웃거나, 혹은 조소어린 비웃음만을 짓던 그답지 않은 모습에 비앙카의 가슴이 순간 덜컹였다.
왜 스스로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모른 채, 비앙카는 본 적 없는 자카리의 모습에 당황한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르노 영지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채 미동 없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싹이 피어오르고 봉우리를 틔워내는 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하지만 그 변화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보니 비앙카는 무엇이 바뀌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 * *
자카리와 비앙카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말을 주고받고 있는 동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뱅상은 제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는지 귀를 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그’ 백작 마님이 백작님께 부부 사이의 은밀한 일을 제안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던가! 게다가 여보라고 부른 적도 있어 보이니, 집사인 그가 모르는 사이에 백작 부부 사이에 많은 일이 오간 게 틀림없었다.
뱅상은 백작 마님께서 무언가 잘못 드신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일단 젖혀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뱅상은 서둘러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을 마치고 자카리를 찾아갔다.
뱅상이 자카리를 방문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회의 시간이었다. 가스파르를 제외한 로베르와 소뵈르가 자카리에게 영지의 내정에 대해 보고 하고 있었다.
뱅상은 잠시 멈칫했다. 영주의 위엄을 생각해서라도 자카리의 사적인 이야기에 관해서는 보통 다른 이들이 없을 때 운을 떼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뱅상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을 때,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온 뱅상이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작님. 언제부터 마님과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셨던 겁니까?”
자카리와 비앙카는 부부관계에 관해서 말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뱅상이 생각하는 귀족들의 관계는 전적으로 후계자에 얽혀 있을 뿐이니, 그의 의식의 흐름이 후계자로 튀는 것도 당연했다. 솔직히 자카리와 비앙카 사이에 사랑이 있었겠는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자카리는 떨떠름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굳이 그걸 말해야 하나?”
“물론이지요!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마님께….”
“좀 더 마님께?”
되묻는 자카리의 질문이 서슬 퍼랬다. 뱅상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흥분했다 보니 답지 않게 말실수를 해버렸다. 집사로서 미숙한 대처였기 때문에,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뱅상이 자책하고 있을 때, 자카리는 벼린 칼날처럼 예리한 눈길로 뱅상을 쏘아보았다.
“후계가 있든 없든 그녀는 아르노의 안주인이다. 그녀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변함없는 사실이지. 그러니 그대가 그녀를 모시는 것은 어떠하든 바뀌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언했습니다.”
자카리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흘려들을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뱅상은 정수리가 보이도록 허리를 숙여, 자신의 실수를 빌었다. 하지만 말실수로 마냥 사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만큼, 뱅상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백작님. 제가 듣기로는 마님께서 후계자를 갖기를 바라시고, 백작님께서 거부하시는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제가 섣불리 추측하는 것입니까?”
“사실이 그러하긴 하다.”
“아니, 도대체 어째서 마다하십니까?!”
자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뱅상은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답지 않게 호들갑 떠는 뱅상의 모습에 로베르와 소뵈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뱅상과 자카리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의 관심이 자카리의 입술이 뱉어낼 답에 쏠렸다. 자카리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아직 열여섯이 아닌가.”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자명한 이치라도 되는 듯한 자카리의 말에 뱅상은 입을 떡 벌렸다. 물론 비앙카가 원숙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후계를 낳기엔 부족함이 없는 나이였다. 저 옆옆 영지를 다스리는 루돌프 자작은 재취로 들인 열다섯 난 아내에게서 아이를 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리시려고.
뱅상이 자카리를 재촉했다.
“겨울이 지났습니다. 새해가 왔어요. 마님께서도 열일곱입니다. 절대 부족한 나이가 아니에요!”
“적어도 열여덟은 되어야지.”
고지식하기가 벽창호가 따로 없다. 속이 꽉 틀어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보니 뱅상은 채신머리없는 행동임에도 가슴을 쾅쾅 두드리고 싶었다. 해가 지나고 비앙카만 열일곱이 된 게 아니었다. 자카리 또한 이제 서른이었다. 솔직히 급한 건 자카리인데, 도대체 누굴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결혼한 지 딱 10년째 되는 해이니만큼, 뱅상은 올해에야말로 승부를 봐야 한다 생각했다. 비앙카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또 모를까, 마님도 아이를 갖기를 원한다 하시지 않던가!
비앙카가 직접 그러하다 뱅상에게 말한 적도 없는데, 뱅상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비앙카가 후계를 원한다 당당히 공표한 것처럼 뒤바뀌었다. 다행히도 뱅상의 착각은 사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