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52화 (52/192)

#52 봄이 오는 소리(2)

그제야 비앙카는 아차 했다. 비앙카는 지금껏 그들 부부의 관계가 욕망이나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귀족적인 정략혼이라 생각했었다. 그녀는 자카리에게 자신이 후계자를 가질 준비가 되었다는 어필만 하면, 자카리 또한 후계자의 이점을 아는 만큼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지만 바로 그것이 오산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동반자이기 이전에 남자와 여자였던 것이다. 대놓고 후계자를 거론하며 잠자리 운운한 비앙카의 행동은 한마디로 ‘자카리가 식어버릴’ 행동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무엇일까.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애태우는 여자?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눈빛을 흘리는 그런 여자?

그 모든 게 막연하기만 했던 비앙카는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자주 만나서 미운 정이나마 붙이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자카리는 바빴고, 같은 성안에 있어도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비앙카는 혼자서 머리만 싸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들판에 쌓였던 눈이 녹아내려 다갈색 흙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로 새싹이 돋아나게 된 어느 날, 갑자기 자카리가 뱅상을 시켜 비앙카를 정원으로 불러냈다.

“백작님께서 나를…? 갑자기 무슨 일이지?”

비앙카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 뱅상은 평소 같은 무뚝뚝한 낯으로 비앙카를 재촉했다.

“가 보시면 압니다.”

뱅상의 입 끝이 애써 웃지 않으려는 듯 씰룩였다. 그러나 비앙카는 자카리가 도대체 왜 절 부른 건지에 대해 골몰하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음을 굳게 먹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카리와의 대면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앙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뱅상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비앙카가 정원에 도착한 순간, 자카리가 비앙카를 향해 다가왔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있는 ‘커다란 것’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카리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약속했던 말이오.”

자카리의 곁에 있던 것은 바로 말이었다. 갈기와 꼬리는 흰색, 크림색 털을 가진 팔로미노! 이마에 흰 다이아몬드와 다리에 흰 양말이 어여뻤다. 자카리의 손이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었는데, 혹여 고삐를 잡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것처럼 순해 보였다. 말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고요히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처음 승마를 배우고 싶다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술 하나 정도 익혀두는 정도의 생각이었지만, 막상 말을 마주하고 나니 승마에 대한 열의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랬다. 비앙카는 한눈에 이 말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비앙카는 조심스레 말에게 다가와 말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의 짧은 털이 비앙카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정말 순하네요. 예쁘기도 예쁘고요….”

말이 마음에 쏙 들었던 비앙카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누그러졌다. 그런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시선도 봄 햇살을 맞은 개암나무 열매처럼 빛났다. 평소의 자카리였다면 일이 바쁜 만큼 뱅상을 시켜 선물을 건네주었을 테지만, 이 말만큼은 꼭 직접 건네주고 싶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고삐를 건네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어떠한가? 나름 신경 써서 골라보았네만….”

자카리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선물을 비앙카에게 주었지만, 이 조랑말은 그가 직접 비앙카에게 건네주는 최초의 선물이었다. 그의 선물을 받아 본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항상 상상만 해왔던 만큼, 그녀를 마주한 자카리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건네준 고삐를 받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닿은 체온의 열기가 비앙카의 손끝을 타고 피어올랐다. 마치 불길에 닿기라도 한 듯이. 비앙카는 자신이 너무 떨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있는 것을 받는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비앙카의 창백한 뺨이 막 익어가기 시작하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비앙카는 피어오르는 흰 매화처럼 말갛게 웃으며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백작님.”

드높은 자존심, 허세, 그 모든 걸 내려놓은 비앙카의 순수한 기쁨의 미소에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본느도, 가스파르도 비앙카가 내심 속정이 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미소를 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뱅상의 입이 떡 벌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카리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아무 말 없이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다물린 채 내려갔고, 검은 두 눈빛이 흔들림 없이 비앙카에게 고정되었다. 자카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자카리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착각하기 딱 좋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비앙카도 그리 착각했다.

‘맞다, 그는 내가 웃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

비앙카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잡아 내렸지만, 선물이 너무 기쁘다 보니 표정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카리의 심기가 불편하면 좀 어때, 내가 기쁜데’ 싶은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자카리의 떨떠름한 무표정을 너무 자주 보다 보니 상대적으로 내성이 길러진 모양이었다.

내성만 길러졌을 뿐이지, 그 표정 아래 도사린 본심을 깨닫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였다. 자신이 생각보다 자카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 비앙카는 흥얼거리며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나….”

”그러고 보니 요즘은 계속 그렇게만 부르는군.”

“네? 이름이요?”

뜬금없는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이며 되물었다. 비앙카가 묻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 비앙카는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앙카는 자카리와의 대화를 되짚어보았지만, 말을 받게 된 기쁨에 정신없이 말하다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작이라고.”

“……?”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백작? 백작인 그를 당연히 백작이라 부르지 뭐라 부르겠는가? 자카리가 백작 위를 받은 순간부터 비앙카는 그를 백작으로 불러왔다. 당혹스러웠던 비앙카의 속눈썹이 눈동자 위에서 너울댔고,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앙카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지 않자 자카리는 초조해졌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대놓고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차마 목 너머로 말을 삼키기엔 입안이 간질간질한 모습이었다. 무언가 강렬히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한 모습에 비앙카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자카리는 가까이 있는 비앙카에게나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 이후로 여보라 불러주지 않아서.”

“…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비앙카는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멍하니 되물었다. 자카리는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호칭을 요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듯, 무뚝뚝한 얼굴 너머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앙카는 그제야 제가 들은 것이 맞는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 내가 예전에 여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지. 맞아. 수도에 데려가 준다고 했을 때.’

하지만 자카리가 제 미소를 보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간 이후,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서 잘 웃지도 않았고, 선뜻 여보라 부르지도 못했다. 첫 시도가 무참한 결과를 불러일으켰으니, 그 뒤로 섣불리 용기를 내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때는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달아나 놓고선, 왜 이제 와서?’

일단 자카리 쪽에서 비앙카를 향해 손을 내민 것이니, 비앙카로서는 반갑게 그 손을 마주 잡는 것이 먼저였다. 여보라 불러 달라 원하는 것이라면, 그녀를 일단 그의 부인이라고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이전의 비앙카였다면 이 기회를 틈타 좀 더 적극적으로 그를 유혹했을 테지만, 며칠 전 하녀들에게 들었던 얘기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도도하게,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애태우게….’

비앙카는 곱씹으며 살짝 자카리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밀었다. 자카리의 커다랗고 무거운 자카리의 몸이 비앙카의 손끝 아래 깃털처럼 밀려났다. 아까 환하게 얼굴을 가득 메웠던 미소는 빙긋이 입꼬리와 눈가에만 매달려있었다. 비앙카는 귓속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저희는 부부지만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아직 그런 호칭을 입에 담기 이른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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