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봄이 오는 소리(1)
봄을 앞두고 아르노 가는 한창 바빴다. 해가 길어지고, 어둠이 줄어들며 슬슬 밖에 나와서 활동하는 시기가 길어졌다.
이른 봄, 성모 정화 축일을 맞이하여 농민은 쟁기에 십자가를 달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시월에 뿌린 밀은 어느 정도 자랐다. 삼월에는 보리를 심고, 여름에 밀을 타작하며 앞으로의 일 년을 또 정신없이 보내게 되리라.
바쁜 농사일은 농노들의 행복이었다. 바쁜 만큼 낱알이 많이 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지런한 양치기는 벌써부터 양을 데리고 평야로 나섰다. 저 먼 남쪽 평야는 영지보다 따듯해서, 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양들에게 눈이 녹아든 평야에 빠끔히 솟아오른 풀을 먹여줄 수 있었다. 양치기는 흥얼흥얼 양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며 양을 몰았다.
올겨울은 그리 혹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없진 않았다. 농노가 죽게 되면 상속 상납이라 하여 농노가 소유하고 있던 가축을 영주가 가져가는 제도가 있었다.
보통 영주들은 튼튼한 암소, 제일 살을 불린 돼지 등 제일 좋은 가축을 가져가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르노의 백작 자카리는 좋은 영주였다. 그는 암소 대신 적당한 돼지, 혹은 거위나 닭, 염소 등을 가져갔다.
재작년 여름, 임신한 아내를 두고 남편이 죽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남편 몫의 상속 상납을 가져가기 위해 찾아온 자카리는 그 자리에서 검을 빼어들어 닭의 목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닭의 머리만을 가지고 돌아갔다. 남은 닭의 몸은 임산부를 위한 것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그는 그럴듯한 말로 영지민들을 다독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공적을 큰 소리로 자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런 일화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니 영지민들 모두가 자카리가 좋은 영주라고 칭송하기를 거리끼지 않았다.
봄이 찾아오며 바쁜 건 농노들뿐만이 아니었다. 성의 봄맞이 새 단장도 해야 하고, 이제 곧 영주님 내외가 수도로 떠나지 않던가. 행장을 꾸리는 일도 만만치 않은 만큼 하루하루가 바빴다.
마차를 담당하는 마부들은 바퀴와 내장, 그리고 마차의 가운데 장식된 가문의 표식까지 빠짐없이 점검했다. 특히 내장이 중요했는데, 마차에 탈 이가 그 누구도 아닌 까다로운 마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님이 한동안 영지를 순찰하며 아랫것들 있는 곳에 얼굴을 비쳤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마님이 보이지 않았다. 좌석이 푹신한지 확인하던 마부, 폴은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운을 떼었다.
“거, 요즘 마님은 안 보이시네.”
“아프시다는 데요.”
마차 바퀴 이음새가 단단히 맞물려 있는지를 확인하던 다른 젊은 마부, 테오가 심드렁히 말을 받았다.
“아프긴 뭘. 엄살 부리시는 게지.”
그리 대꾸하면서도 성을 바라보는 폴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폴도 처음에는 비앙카가 마냥 악독하고 무시무시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예쁜 하녀를 질투하고, 입만 열면 독설에, 눈에는 독기가 넘실대며, 훌륭한 영주님을 들판에 널린 잡초 취급하기가 일쑤인 못된 여자라고. 그래서 비앙카가 영지를 둘러본다는 소식에 혹여 무슨 트집이라도 잡아 패악을 부릴까 잔뜩 긴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게 된 비앙카는 하인들의 수군거림과는 완전 생판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비앙카가 어리다는 건 진즉 알고 있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알고만 있는 것과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의 격차가 엄청났다.
그렇다 해서 그녀가 상냥하거나 수줍은 소녀였다는 건 아니었다. 하인들, 아니, 어쭙잖은 귀족들과는 탯줄부터 다르게 쥐고 태어났다 외치는 듯한 분위기를 온몸에 두른 여자였으니까.
다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농노들을 못살게 괴롭혔다는 소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권태로운 듯 보이는 연녹빛 눈동자와 기품 있는 몸짓, 현실에서 유리된 듯 보이는 그녀에선 그럴 만큼의 의욕은 없어 보였다.
특히 못생긴 외모로 하녀를 질투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일반적인 미인의 기준인 금발과 육감적인 몸매, 하늘만큼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지에서 일하는 아낙네들과 비교할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녀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생각보다 고분고분히 그들의 일을 지켜보다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차라리 못된 성질이라도 드러냈더라면 지금까지처럼 속 편하게 욕하고 잊을 수 있었을 텐데.
테오의 말대로 정말 아픈 걸지도 모른다. 창백한 피부, 식사는 하나 걱정될 정도로 가는 팔뚝. 확실히 건강해 보이는 외견은 아니었다. 괜히 속이 불편해진 폴은 쩝, 입을 다셨다.
그런 폴의 심정을 모르는 테오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비앙카에 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냈다.
“몸이 아프시니 궁에서는 안 나오시고, 대신 궁 안에서 하녀들을 모아 무언가 하신다 하더라고요.”
“마님이 길쌈도 하실 줄 알아?”
“길쌈은 아니고….”
테오는 말끝을 어물어물 흐렸다. 하녀들이 분명 뭔가 한다고는 했는데, 그런 일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듣고서도 잊어버렸다. 테오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던 찰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마부, 에버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마누라한테 들었어. 그런데 마누라도 뭘 하나 잘은 모르더라고. 몇 명만 모아서 조용히 하나 보아.”
“마님이 원체 까탈스러우니까, 그 성격 감당할만한 하녀들만 모은 모양이로군.”
“그럼 우리 마누라가 뽑혔겠지.”
“자네 마누라가 뽑히면 큰일이 나도 진작 났어!”
폴은 낄낄거리며 에버리의 부인을 떠올렸다. 에버리의 부인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괄괄한 주방의 여걸이었다. 주방을 진두지휘하는 만큼 고집스러운 그녀는 설사 영지의 마님인 비앙카가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사근사근 대하지 못하고 성격을 긁을 게 뻔했다. 에버리 부인이 비앙카의 성격을 감당해낸다 하더라도, 비앙카가 에버리 부인의 성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화를 내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래도 아픈 건 아니시다니 다행이구만. 폴은 내심 안도하며 숨을 돌렸지만, 도대체 왜 자신이 안도한 건지, 애초에 무엇을 걱정한 건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 * *
겨울이 아무리 춥다 해도 계절은 바뀌기 마련이다. 겨우내 날 선 추위로 몸서리치더라도 봄이 찾아오면 추위는 기억에서 잊혀지고, 따듯한 햇살의 노곤함만이 몸을 잠식할 뿐이다.
비앙카는 깃털로 가득 차 있는 침구와 잘 익어 과육이 탱글한 올리브의 맛에 금방 익숙해졌고, 살결에 휘감기는 부드러운 실크와 끊임없이 타오르는 모닥불의 온기를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회귀 전 수도원에서 배를 곪던 일은 그저 아득할 뿐이었다. 거칠거칠하니 가시가 삐죽 나와 있는 싸구려 옷감의 감촉도 기억나지 않았다. 돌바닥이나 다름없던 침상도, 건더기 없는 멀건 수프의 맛도 잊혀진 지 오래였다.
육체적 고통은 쉽게 잊혀지고, 몸은 평온한 현재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해졌지만, 단 하나 잊히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회귀 전의 굴욕이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굴욕과 마음의 상처는 더 깊게 상처를 새길 뿐이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함을 곱씹으며, 이번 생마저 그리 보낼 수는 없다 다짐한 비앙카는 자카리와의 후계를 가짐으로서 아르노 가에서 자신의 위치와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자카리가 그녀를 거부함으로서 난항을 겪는 듯하였고, 아직도 첫날밤은 오리무중으로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자카리를 유혹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직설적이었던 자신의 시도가 계속해서 실패해온 만큼, 다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지금껏 성급했던 면이 없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비앙카가 골머리를 앓는 동안, 해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최근 비앙카는 하녀들을 모아 레이스 짜는 법을 알려주었다. 비앙카 혼자서 짜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은 처음에 비앙카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딱 다물었지만, 단조로운 수작업이 계속되자 하나둘 한마디씩 입을 트기 시작했다. 비앙카가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이해할 만큼 아량을 베푼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들은 오래지 않아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바늘을 놀렸다.
‘사내란 참 이상해요. 말로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원한다 하면서도, 정작 노골적으로 들이대면 열정이 식어버린다니까요.’
‘그러게요. 지난번에 푸줏간의 밴이 눈길 한 번만이라도 달라 사정사정하며 들러붙기에 원하는 대로 빤히 바라봐줬더니, 자기가 아는 마리가 아니라며 뒷걸음질 치지 뭐예요?’
‘아이고, 사내가 그리도 패기가 없어서야, 원.’
‘가끔 보면 사내들은 겁이 참 많아요. 그러니 가만히 있는 여자에게 접근하기만 할 뿐, 먼저 접근하는 여자에게는 꼬리를 마는 게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