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50화 (50/192)

#50 자카리 드 아르노의 사정(2)

비앙카의 울음소리와 함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카리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그의 마음은 자포자기로 가벼워졌고, 간신히 결혼식을 끝낸 직후에는 모든 기대를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끔찍하고 참담한 결혼식을 끝마친 새 신부와 신랑은 함께 신랑의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옥의 서막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르노 땅은 개발되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았으며, 크게 축성할 재력도 부족하다보니 성도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자카리가 힘들게 얻어낸 영지는 비앙카가 머물던 블랑쉐포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만도 못한 곳이었다. 비앙카의 입장에서는 단숨에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리라.

낯설고 추레한 장소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녀를 따라온 유모 뿐이니 비앙카가 아르노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자카리는 노력했다. 첫 눈에 미움 받았다는 건 그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제 아내인데, 언제까지고 마주치기가 무섭게 울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찌되었든 결혼식은 치룬 뒤였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된 이상 자카리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했고, 그 맹세를 이행하려 노력했다.

자카리는 어떻게 해야 비앙카가 저에게 경계를 풀게 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아르노 성은 소박할지언정 비앙카의 방만큼은 백작가에서 머물던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도록 꾸며두었고, 비앙카를 위해 뛰어난 실력이라 소문난 요리사를 고용하기도 했으며, 그녀가 갖고 싶다 말하는 것은 사주려 노력했다. 그것이 이제 막 남작이 된 아르노 가의 제정상황에 다소 버거운 것일 지라도.

부유한 블랑쉐포르 가에서 자라온 비앙카의 기준에 맞춰주려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르노가의 예산이 부족해졌다. 한정된 영지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고, 결국 자카리는 전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용병처럼 돈을 받고 대신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전쟁터를 연연하다 보니 몸에서 피와 흙먼지 냄새가 가실 일이 없었다. 영지를 자주 비우다 보니 비앙카와 얼굴을 마주할 때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자주 봐야 정이라도 붙는데, 그것조차 안 되니 그들의 사이가 좁혀지지 않은 채 빙글빙글 도는 것도 당연했다.

열셋의 나이차.

지나치게 어린, 고귀한 신분의 신부.

그리고 항상 자리를 비우는, 여자를 대하는 법을 모르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남편.

최악은 아니지만, 그들의 결혼이 최악으로 가기 쉬운 조합임은 틀림없었다.

자카리가 조금이라도 서글서글하고 상냥했더라면 무언가가 달랐을까.

그는 자신을 꺼려하는 상대에게서 멀어지는 법은 알았지만, 되레 빙긋 웃으며 다가서는 법은 몰랐다. 아무도 자카리에게 그렇게 다가와주지 않았으니까.

자카리는 비앙카만 생각하면 결혼식 당일,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서럽게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비앙카가 자라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카리가 조금만 더 다가가면 여름날의 푸른 초목 같은 연녹빛 눈동자가 먹구름 낀 구름처럼 어두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자카리는 어린 신부의 거부에 가로 막혀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비앙카도 자연스레 남편이 자신을 싫어한다 생각하게 되었다. 옆에서 속살였던 유모 쟌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아가씨에게 아르노 남작은 어울리지 않아요. 격이 다른 걸요. 좀 더 좋은 혼처가 있었을 텐데, 백작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아가씨의 혼사를 이리 처리하실 수 있단 말이에요?’

쟌은 자카리를 폄훼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만 대접이 소홀한 걸 발견하면 크게 부풀려 호들갑을 떨었다. 그 일로 쟌과 뱅상이 여러 번 부딪혀 큰 소리가 나기도 했다.

‘우리 아가씨는 능히 후작가, 아니, 공작가에도 시집가실 수 있는 분이신데…. 어쩌다 이런 한미한 남작가에 시집오게 되어 핍박받게 되시나.’

‘핍박이라니요. 남작님께선 마님을 위해 최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무얼 합니까? 마님께선 매일 장미 향유로 몸을 씻지도 못하시고, 꿀로 얼굴을 매끄럽게 가다듬지도 못하시며, 저 먼 남쪽 나라의 과일을 드시지도 못하시는 걸요.’

‘마님도 이제 이 아르노가의 사람입니다. 아르노 가의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는 타협해주셔야 해요.’

‘그리고 아가씨는 블랑쉐포르 가의 사람이지요! 우리 아가씨께서 얼마나 고귀한 혈통이실 진데, 모셔왔으면 귀하게 대접하진 못할지언정 빈곤함에 적응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이게 다 아르노 남작님께서 아가씨의 남편감으로 부족하시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날이면 냉정한 뱅상도 얼굴에 드물게 노기를 띠고 파르르 떨었다. 자카리도 쟌이 비앙카에게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속살거린다는 걸 알았지만, 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쟌은 비앙카가 아르노가에서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녀를 무척 따르는 게 절실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쟌은 삼년 전에 돌림병으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비앙카는 세상이 무너진 듯 삼일 밤낮을 울었다. 내심 비앙카가 그를 의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대한 자카리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돌아온 건 차디찬 문전박대뿐이었다.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카리는 남작에서 자작이 되었고, 백작이 되었다. 자카리를 위그 가에서 내쫓았던 롤랑은 여전히 위그 자작이었다. 자카리는 출세함으로서 형에 대한 복수, 자신의 미래에 투자해준 이들에게의 보답, 그리고 아내 비앙카가 원하는 것 대부분을 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자카리라면, 블랑쉐포르 가만큼은 부족하여도 유모 쟌이 부족하다 투덜거렸던 모든 것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가 남작이었을 때와 다름없었다. 일곱 살이던 소녀는 열여섯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카리를 꺼려했고, 백작부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자카리는 그 걸로도 상관없다 여겼다. 무언가 크게 바뀔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최선을 다했다. 비앙카가 그 사실을 온전히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렴풋이나마 느껴주진 않을까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희망에서 끝나리란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자카리가 보기에 비앙카는 여전히 왕, 울음을 터트리던 일곱 살 소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있도 않는 정부 타령에 후계자 타령까지.

손바닥을 뒤집다 못해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자카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서먹하다 못해 타인보다도 낯설게 남편인 저를 대하는 비앙카의 태도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던 자카리의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블랑쉐포르 가에서 그녀를 닦달했나 싶을 정도로.

첫날밤을 거론하는 그녀가 무척 낯설었다. 그 뿐이랴. 성큼 저에게로 다가오며 좁혀지는 그녀와의 거리. 그녀의 향취. 선명히 쏘아보듯 응시하는 연녹빛 눈동자. 그저 그녀의 모든 게 당혹스러워서.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울렁임이 솟아올랐다. 입술 하나 제대로 떼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기가 어렵고. 그녀를 보면 사막에서 물 한 모금을 갈구하는 것처럼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만 갔다.

뱅상을 비롯한 이들은 그녀가 백작의 부인으로서 의무를 깨달은 게 아니냐며 반색했지만, 자카리는 그녀의 바뀐 모습을 마냥 반길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제 앞에서 눈물까지 비추지 않았던가.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려내던 안쓰러운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결혼했던 당시의 울보였던 모습이 겹쳐졌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가 언제부터 울지 않기 시작했더라. 울먹임 가득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건조하게 메마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비앙카가 울지 않는 것에 안도하였지만, 지금에서야 되짚어 보니 그것이 바로 비앙카가 마음을 닫아버리는 전조였다. 자카리는 안타까움에 침중한 신음을 흘렸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번에도 늦을 수는 없다. 비앙카가 왜 당신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거냐며 울었을 때는 너무 당황하여 횡설수설하였지만, 혼자서 생각을 정리 하니 자카리는 좀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래. 비앙카는 아직도 어렸다. 아무 것도 몰랐다.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녀 스스로도 모르리라.

그녀에게 휘둘려, 그녀가 바라는 대로 그녀를 취하고 나면 아직 어린 몸은 고통스러워 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의 결혼식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그녀는 그를 피하고, 그는 결국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그것만은 안 되었다. 십여 년 만에 간신히 그녀 쪽에서 그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가 열여덟. 그래. 열여덟은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어른인 자카리, 그가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했다. 그리고 인내심과 절제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까짓 구년간 수절하였는데, 일이년 더 늘어나도 상관없었다. 지옥 같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도 견뎌왔는데, 그게 무에 대수겠는가?

그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별 거 아니라고, 견딜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건 오만한 오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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