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46화 (46/192)

#46 백작 마님의 결심(8)

하여간 그렇게 자카리를 못마땅해 하는 유모가 비앙카에게 부부사이의 적극적인 관계에 대해 알려주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의 최소만 알려주었겠지.

게다가 그녀는 이 년 전에 유행병으로 죽었다. 갑자기 비앙카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과는 연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비앙카는 아르노가의 하녀들과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방금 전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그녀가 다가가기가 무섭게 하녀들이 흩어지는데, 하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배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까이 두는 하녀라면…. 그래. 이본느라 했지. 최근 시녀 하나를 곁에 두고는 있기는 했다. 그러나 비앙카가 후계자 운운한 것이 먼저였으니 연관이 없었고, 보고 받은 이본느의 성격을 보아 하건대 비앙카에게 그런 말을 속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 그녀의 행보는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갑자기 후계자를 거론하질 않나, 뱅상의 일을 맡겠다고 하지 않나. 뱅상을 대신하여 실권을 잡는 것이야 귀족 부인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인 만큼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에 그냥 넘겼지만, 자카리는 내심 노심초사했다. 연약하고 가녀린 그녀가 괜히 많은 일을 하다 건강을 해치게 될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까지 탄다고 하고. 그녀는 여전히 오만하고 까다로운 귀족 마님이었으나, 지금까지와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앙카의 태도 변화는 갑작스럽고 극단적이었으며, 인과관계가 없었다. 그러니 오죽하면 자카리가 블랑쉐포르 가에서 비앙카의 자질에 대해 닦달하는 전령이 왔나하는 의문을 품었겠는가. 비앙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비앙카의 입술은 고집스레 앙 다물려 있었고, 연녹빛 눈동자는 여름의 신록처럼 흔들림 없이 반짝였다. 후계자 문제에 관한 한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생소했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항상 비껴내듯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시선에서 도망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랬던 과거의 모습이 선명한 만큼, 최근 들어 또렷이 자신을 마주봐 오는 비앙카의 시선은 적응하기 힘들면서도 심장 한 구석을 잡아 흔들었다. 마치 앞으로의 전쟁을 기대하며 사정없이 구르는 전장의 말발굽처럼.

지금 시대에 열여섯의 나이는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열여섯에 이미 아이를 낳은 여인들도 많았으며, 실제 자카리 자신이 열여섯에는 전쟁에 나가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카리가 보기에 비앙카는 아직도 까마득히 어릴 뿐이다. 비앙카가 자신은 다 컸다며 목을 빳빳이 세우는 모습이 그의 뱃속을 간지럽혔고, 짓궂어지는 마음의 충동을 다스릴 수 없었던 자카리는 대뜸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배웠지?”

“네?”

“시녀들이 무얼 하라고 알려주었느냐고.”

“…….”

어린 아내에게 골리듯 물어보는 자카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과연 비앙카가 무슨 대답을 할까.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입가가 씰룩였다.

희미하나마 자카리의 얼굴에 긍정적인 반응이 번진 것을 처음 목격한 비앙카는 얼떨떨함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었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는 여전했다. 깊이 팬 눈매 아래 이팝나무 열매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일견 다정해 보일 정도였다. 다정함이라니! 아까는 블랑쉐포르 가와 내통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더니, 갑자기 시녀들과의 대화를 캐물으면서 지을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비앙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껏 의식하지 않았던 사향내가 유난히 코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에게서는 항상 희미한 사향내가 풍겼다. 건조하고 금욕적인 남편에게는 이질적일 것 같음에도 무섭도록 어울리는 향이었다.

그의 사향내가 평소 부각되지 않는 것은, 살과 살이 붙을 정도로 가까이 있어야지만 느낄 수 있을 만큼 엷은 향이기 때문이었다. 평소 자카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와 잠자리하는 동안은 항상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로 코를 타고 잠식해 들어와 그녀의 몸을 무력화 시켰다. 지금 그 향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정도로 비앙카와 자카리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었지만, 비앙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비앙카의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입도 바싹 말랐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해. 여기서 그가 더 의심하게 할 수는 없어. 자카리가 골리는 것도 모르고, 비앙카는 최선을 다해 그럴듯한 거짓말을 쥐어 짜냈다.

“…백작님도 이제 곧 서른을 코앞에 두고 계신 만큼, 빨리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고.”

비앙카를 놀리려고 한 질문에 제가 물먹게 된 자카리의 미소에 머쓱함이 겹쳐졌다. 비앙카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스물아홉. 후계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전쟁 또한 자주 출전하지 않던가. 괜히 나이 많다는 사실만 자각하게 된 자카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비앙카를 설득하듯 타일렀다.

“하지만 열여섯이 아이를 품기엔 어린 나이라는 걸 알려주진 않은 모양이로군.”

“전쟁이 잦잖아요. 영지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만큼 당신이 영지 사정에 신경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군.”

자카리는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 영지에 무관심하던 그녀가 영지에 대한 일을 거론하며 자카리의 행동을 제약하려 하는 것이 불쾌하게 들렸던 걸까? 자카리가 자신을 질책한다 생각한 비앙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얀 피부결 아래 번진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비앙카는 슬쩍 눈썹을 내리깔고는 헛기침을 했다. 자카리의 말이 사실인 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비앙카는 말을 돌렸다.

“아직도 저에게 후계자를 볼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우린 곧 수도로 가지 않소. 후계자를 갖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오.”

“후계자와 비견하면 수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가뭄이 드는 게 무서워 농사를 안 짓는 거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그거야 말로 어불성설이라고요.”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이번에 자카리의 철벽을 뚫지 못한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또 같은 대화를 반복하겠지. 그것이 지긋지긋했던 비앙카는 강수를 두었다.

“그게 아니면, 그런 핑계라도 대야할 정도로 저를 피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난 피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

비앙카의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카리의 표정 아래 감추어진 심층을 살펴보려는 듯 그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의 얼굴에 따라붙었다.

예전의 비앙카였다면 정부가 있어서 저를 피하는 거냐 비꼬듯 물었겠지만 이미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자카리가 정부에 관한 대화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카리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는 만큼 비앙카는 그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집요하게 탐색하는 것은 비앙카 뿐만이 아니었다. 자카리 또한 비앙카가 갑자기 후계자 운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야 말로, 갑자기 조급해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군. 내가 출정 나가 있는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이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하기 힘든 문제를 계속해서 캐묻는 자카리가 야속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지만 하녀 핑계를 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는 뭐라 둘러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마음을 바꾼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자신이 갑자기 개과천선하는 것이 그리도 이해가지 않는 일이란 말인가?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수도에도 데려간다 해서 날 좋게 봐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울컥 서러움이 치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걸음인 현실이 비앙카를 막막하게 했다.

저도 모르게 조금이나마 자카리에게 마음을 열었던 모양이다. 보답 받지 못할 기대를 품고, 당연히 그가 저에게서 나올 후계자를 반길 거라 생각한 결과가 이것이다. 비참하고, 초라하고.

비앙카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당신 아이를 갖는 게, 꼭 이유가 있어야지만 되는 거예요?”

말하고 나니 더 서러웠다. 나는 아르노 가의 정당한 안주인일진대, 왜 후계자를 낳아주겠다 이렇게 처절하게 빌어야 하는가? 나라고 해서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도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말만 반복해야 하는 거야?

(삽화)

참담한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나니 둑이 무너져 내리듯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눈이 먹먹하고 뒷목이 아릴 듯 당겨오더니, 이내 그녀의 연녹빛 눈동자가 아침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아롱아롱 빛났다. 자카리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비앙카는 눈에 힘을 주고 부릅떴다. 눈물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럼에도 눈물이 도움 될 때가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눈물로서 무언가가 해결된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하기 싫다며 울며불며 아버지에게 매달렸을 때도. 쟌이 병으로 죽어갔을 때도. 자신을 버리고 가는 페르낭에게 구걸하듯 눈물을 쏟아냈을 때도.

세상 사람들 중 몇몇은 눈물로서 상대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도록 선택받았지만, 비앙카 그녀는 선택받지 못한 쪽이었다. 눈물을 흘려도 자존심만 깎여나갈 뿐이다. 그것은 블랑쉐포르 가의 외동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존심을 잔뜩 두른 채 살아가는 비앙카에게 있어 끔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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