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45화 (45/192)

#45 백작 마님의 결심(7)

가신들이 멀찍이 물러서고, 비앙카와 자카리 둘만 남았다. 비앙카의 매끄러운 턱을 타고 송골, 땀이 맺혔다. 축객령을 내릴 정도로 대화가 길어진다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가시가 박힌 듯 따끔거리며 긴장감이 그녀를 찔렀다.

비앙카는 여전히 자카리가 불편했다. 그의 곧은 시선 앞에 서면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자카리가 유난히도 빤히 저를 바라보기 때문이리라. 마치 뺨이 꿰뚫릴 것처럼. 로비에 전시된 사슴의 박제와 별다를 바 없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얼굴에 드리울 기미가 보이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밝게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지금쯤 집무실에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대가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그대가 성을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뒤로, 한 번쯤은 찾아볼 생각이었네.”

이어지는 자카리의 말에 애써 웃어 보였던 비앙카의 얼굴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안 그래도 바쁜 그가 굳이 시간을 내어 비앙카를 찾아올 이유는 뻔했다. 그러면 그렇지. 비앙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대 한 점 한 적이 없음에도, 묘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비앙카를 휩쌌다. 비앙카는 시무룩하게 물었다.

“제가 일이라도 칠까 걱정 돼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아니오.”

자카리는 펄쩍 뛸 정도로 깜짝 놀라 했다. 비앙카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낯에도 드리웠다. 그는 다급히 변명하듯 덧붙였다.

“당연히 잘 해낼 거라 믿고 있소.”

생각지 못한 말에 비앙카는 눈을 깜빡이며 자카리를 보았다. 비앙카로서는 처음 듣는 긍정적 반응이었다. 항상 그녀가 무언가를 한다 말하면 주변인들은 과연 비앙카가 그것을 정말로 해낼 수 있을지,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 의심스런 표정을 짓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자카리의 얼굴이 목이 졸린 듯 시퍼렇게 죽었다. 아니다. 그건 비앙카의 착각이다. 자카리가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비앙카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되레 자카리는 원래의 무표정함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니오.”

자카리의 얼굴은 건조할 정도로 정적이었고, 그의 입안은 그의 표정만큼이나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자카리 혼자였다. 자신이 연거푸 말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자카리는,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함을 기리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그가 신중 하려 노력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더더욱 심각해졌고, 그건 썩 좋은 효과가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대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해주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아서….”

“당신을 위해서는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일 뿐이지.”

비앙카는 새초롬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그를 위해 해주는 것이 처음이라니, 마치 지금까지 방만했던 것 같잖아. 비록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자카리의 말이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던 비앙카의 말끝이 뾰족해졌다.

하지만 너무 날카로웠던 건 아닐까. 뒤늦게 아차 한 비앙카는 조심스레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심중을 가늠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자기 좋을 대로 남의 눈치 보는 일 없이 행동하는 비앙카로서는 자카리와의 대담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익숙해져만 하는 일이었다.

“저는 아르노 성의 안주인이니까요. 당신이 저에게 후계자를 볼 생각을 않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한 그는 떠보듯 넌지시 물었다.

“…블랑쉐포르 백작에게서 연락이라도 왔소?”

“…아버지에게서요? 아니요.”

갑자기 아버지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는 미간 사이를 찡그렸다.

혹시 아버지가 무언가 나에게 지시를 내린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르노 가를 집어 삼켜서 블랑쉐포르 가에 진상하기라도 하라고?

블랑쉐포르 백작은 비앙카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되는 아버지였지만, 자카리에게 있어서는 전략적 동맹을 맺은 사이일 뿐 그다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사돈은 물론이거니와 형제 사이에서도 뒤통수치는 세상이니만큼, 의뭉스러운 친정과 속을 알 수 없는 아내를 경계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딸들을 적당한 지방 영주에게 시집보낸 뒤 후계자를 낳게 하고 남편을 암살하도록 하여 영지와 가문을 먹은 왕의 사례가 있기도 했다.

그건 알지만…. 내가 그를 배신할 거라고 믿는 거라면….

순간 가슴을 옥죄는 쇠로 만든 차갑고 단단한 코르셋이 비앙카의 숨을 졸랐다. 애초에 배신감을 느낄 사이조차 아닌데, 이 답답함은 무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콧대 높은 당신이 왜 갑자기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지 영문을 인수가 없군.”

그런 비앙카의 심정을 모르는 자카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앙카가 블랑쉐포르 가와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뱅상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뱅상은 그에게 거짓말할 자가 아니니 비앙카가 블랑쉐포르 가와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뱅상조차 모르게 은밀한 접촉이 있었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자카리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비밀리에 접촉을 했더라면, 저에게 순순히 대답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헛된 질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으니 답답함에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딱히 자카리가 저를 의심해서 떠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비앙카는 오해를 풀었지만, 꽉 막힌 숨은 여전히 답답했다. 변명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답을 꺼내려던 와중, 자카리가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의 이상한 점을 깨달은 비앙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때가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잠깐, 콧대가 높다니….”

“아니라고 할 셈이요?”

자카리의 손끝이 비앙카의 코끝을 톡, 가볍게 건드렸다. 코끝을 스치고 가는 장갑의 가죽 느낌이 이질적이었다. 비앙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자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카리로서는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일 터였으나 그 파급은 컸다.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란 둘 사이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일을 저지른 자카리였다. 태연한 척 안색을 싹 바꾼 그는 당황한 적이 없는 것처럼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사소한 손짓 하나로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잠자리 운운하는 것이 우습군.”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요. 이건 그저 예상치 못했을 뿐이고…. 잠자리에 있어서는 좀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대가 무얼 안다고?”

허세스러운 비앙카의 태도에 기가 찬 자카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도 별로 없는 그가 소리 내어 웃자, 비앙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까 콧잔등을 치는 행동도 그렇고, 지금 비웃는 것도 그렇고. 완전 나를 어린애로 보고 있구나.’

오기가 치솟은 비앙카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자카리와 있었던 우연한 접촉을 그저 격의 없는 무례한 행동으로 치부해 넘긴 그녀는 자카리를 쏘아보았다. 여전히 귓가에 열기가 남아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뻣뻣하게 치켜 들린 턱 끝과 당당하고 우아하게 펴있는 어깨, 도발하는 듯 또렷한 연녹빛 눈동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비앙카는 도발하듯 입꼬리를 빙긋이 올렸다.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요. 저는 아르노 가의 안주인이고, 당연히 아르노 가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그런 일들에 대해 배웠어요.”

“그대에게 누가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녀들이요.”

비앙카의 목소리 끝이 기어들어 갈듯 희미했다. 자카리가 비앙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건, 아르노 영지의 목축지에 어지러이 흩어진 말들 중 그의 군마 노아를 찾아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무척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비앙카가 친한 하녀라고 해봐야 가문에서 데려왔던 유모 쟌 뿐이었다. 자카리도 유모 쟌을 기억했다. 흰 백발을 곱게 틀어 올린 그녀는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비앙카의 남편이 자카리임에도 항상 자카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고, 비앙카에 대해 응당 보고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누락했다. 그것이 비앙카를 위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비앙카의 남편으로서 자카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분함과 이기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유모의 기색 때문인지, 어린 비앙카는 자카리를 정말 싫어했다. 막 결혼했을 당시에는 얼굴만 보아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으니 할 말 다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