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백작 마님의 결심(6)
“잠깐-.”
“…마님?!”
“아이고,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마님. 용서해주세요.”
비앙카가 그들을 부르기가 무섭게 하녀들은 사색이 된 채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그리고는 비앙카에게 굽신굽신 허리를 숙여 사죄하더니 부리나케 달아나는 게 아닌가. 조금의 틈을 내비쳤다가는 비앙카가 그녀들을 트집 잡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들이 비앙카를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 방 먹은 비앙카는 망연한 표정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금방 당황한 마음을 추슬렀다. 그녀는 표정을 정돈하고 낮게 한숨 쉬었다. 비앙카의 옆에 있던 이본느가 전전긍긍하며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무어라 위로 드려야 할지, 위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고민하느라 선뜻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애써 웃으며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이본느에게 말을 걸었다.
“물어볼 게 있었는데, 큰일이네.”
“무, 뭔데요?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 답해드릴게요.”
이본느도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잠시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꾸며내어 높인 목소리에 가려 일순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전의 검은 머리 하녀 말인데….”
“비앙카.”
비앙카가 말을 잇기가 무섭게 뒤에서 그녀의 이름이 불렸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비앙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이 성에서 비앙카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던 비앙카의 노력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분명 봤겠지. 봤을 거야.
방금 전 하녀들이 피하는 모습을 자카리가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비앙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녀들을 통솔하지 못하는 영주 부인이라니, 부끄럽고 모자라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보여줘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들켜버렸으니, 비앙카는 참담함에 신음을 흘렸다. 오죽하면 정원에 쌓여있는 눈 더미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처박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정도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더더욱 뻣뻣이 고개를 들었다. 숨을 고르고, 태연함을 가장한 그녀는 자신이 정돈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그녀의 얼굴빛은 도자기처럼 매끈했고 냉정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수치심에 바르르 떨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앙카의 시선이 맞닿은, 회랑의 끝에서 이어지는 곳에 자카리가 우뚝 서 있었다. 지옥문의 수장처럼 그녀의 길을 가로막고 있던 그는 비앙카가 돌아보기가 무섭게 비앙카를 향해 다가왔다.
자카리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비앙카는 절로 이는 긴장감에 몸을 뻣뻣이 굳혔다. 거대한 맹수가 그녀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최근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호위 가스파르는 아르노 성에서 제일가는 덩치였다. 자카리보다도 키가 컸고, 두툼한 어깨 근육과 팔뚝은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런 가스파르를 매일 시야 한구석에 두고 끌고 다니다 보니 커다란 사내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카리를 눈앞에 두고 보니 그런 제 생각이 오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는 가스파르와의 덩치 차를 메우고 남을 만한 위압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가 남작부터 기어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선 영주로서, 백작으로서의 위엄과 품위가 흘렀다.
비앙카는 자카리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려 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차려입은 모습이 어색하고 볼품없어 보여 불만스러워 했던 감정만큼은 선명했다. 아버지가 날 가난뱅이에게 팔아먹는다며 유모였던 쟌의 품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도 남아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머리 하나 반 이상 차이가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비앙카는 목을 한계까지 치켜들어야 했다. 비앙카는 그것도 괜히 지는 것 같아 짜증 났다.
자카리는 실크 셔츠 위에 암적색 천이 덧대어진 검은 더블릿을 입었고, 그 위에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회갈색 소가죽 부츠를 신고, 흰 바지 옆에는 동물의 이를 갈아 만든 검은 단추가 촘촘히 장식되어있었다.
거친 아마셔츠와 촌스러운 갈색의 더블릿을 입던 옛날의 자카리였다면 기대할 수조차 없는 패션센스였다. 작위가 올라가며 옷 입는 센스도 성장한 듯싶었다. 그건 나름 긍정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앙카는 그의 곁에서 함께 해야 하고, 옆에 있는 남편이 밭의 촌부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건 그녀의 체면도 깎아 먹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듯 정돈된 자카리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회랑 사이로 스며든 겨울바람에 흔들렸지만, 비앙카를 응시하는 곧은 시선만큼은 한결같았다. 그래. 그는 항상 비앙카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가까이한 그의 눈동자에는 날 선 불쾌감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지만, 미묘하게 틀어진 입꼬리와 눈매가 미처 숨기지 못한 그의 속내를 표출했다.
명백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그의 낯에 비앙카의 심장이 또다시 덜컹였다. 어지간해서는 그에게 좋은 인상만 주고 싶은데, 하필 그가 기분 나쁠 때 마주친단 말인가? 게다가 하녀들에게 거부당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 완전 최악이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고, 그들은 매번 번번이 틀어지는 것 같았다. 서로 이어질 운명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비앙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앙카에게 가까이 온 자카리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소?”
“아무것도요.”
비앙카는 턱을 치켜들고 고고히 답했다. 드높은 자존심이 절로 묻어나는 태도. 약점을 쉽게 보이지는 않겠다는 듯 평정이란 방패를 얼굴에 두른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속은 긴장으로 팽창된 심장이 크게 울려대고 있었다. 바싹 마른입을 축인 비앙카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침을 삼켰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답하고 싶지 않았던 비앙카는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때 말씀드렸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마사에 처음 들렀던 날, 비앙카는 바로 자카리를 찾아갔다. 승마를 배우고 싶다는 비앙카의 말에 그는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까만 눈동자로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가 말을 타는 건 힘들 것 같은데.’
‘힘든 일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자카리는 비앙카가 말을 타는 걸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소뵈르 때와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자카리를 설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카리의 고집을 꺾는 건 자신 있었다. 기실, 자카리는 단 한 번도 비앙카의 결정을 막아본 적이 없었다.
자카리와 비앙카는 몇 번의 공방전을 거쳤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건강과 체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었다. 자카리가 자신을 걱정할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비앙카는 그에게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카리는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비앙카의 추측대로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내비쳤던 자카리는 결국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알아서 조치를 취할 테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라 말하고는 그 화제를 종식시켰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비앙카의 질문에 자카리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무뚝뚝이 대답했다.
“굳이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잊지 않고 있소. 뱅상을 시켜 그대에게 어울리는 조랑말을 알아보라 시켰소. 겨울이라 장에 매물이 별로 없지만, 그는 솜씨가 좋으니 금방 찾아낼 것이오.”
자카리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비앙카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비앙카가 체력도 되지 않는데 욕심을 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못마땅함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은 겨울이라 눈이 내려 위험하고 추우니, 싹이 터 오르는 초봄이 되고 나서부터 승마를 배워도 될 것이요. 잘만하면 수도에 가서도 승마를 할 수 있겠지.”
“기쁜 소식이네요.”
기쁘다 말은 하지만 비앙카의 낯은 마냥 밝지 못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되기가 무섭게 자카리는 비앙카의 뒤를 지키고 있는 이본느와 가스파르를 향해 턱짓을 했다. 물러서 있으라는 축객령이었다.
주인의 뜻을 금방 읽은 가스파르는 바로 허리를 숙이고 물러섰다. 이본느는 묘하게 파리하게 질린 안색의 비앙카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법. 이본느 또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