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백작 마님의 결심(5)
“솔직히 네가 마님을 과도하게 싫어하는 건, 결혼할 당시만 해도 어려서 어느 정도 이용해먹을 수 있겠다 싶었던 마님 고집이 지나치게 셌기 때문이잖아.”
“…….”
로베르는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뵈르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훅 치고 들어와 로베르의 약점을 후벼 팠다. 내심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결벽스러운 면이 있는 로베르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네가 백작님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도 알아. 백작님도 네 충성심을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 네 태도는 전혀 백작님의 가신답지 않아. 그분은 우리 마님인 걸.”
“…어리다 해서 철없는 행동이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야. 백작님은 마님이 아르노 성에 왔을 때와 같은 나이부터 칼을 들고 섰어.”
“백작님을 둘러싼 환경이 그분을 그렇게 몰아갔기 때문이지. 백작님은 특별히 의지가 강하시고, 몸이 건강하셔서 버텨낸 거야. 마님과는 달라.”
“…….”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의 마님은 달라. 그분이라면 지루한 토너먼트의 승리나마 영광의 꽃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지.”
소뵈르는 낙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로베르를 설득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느냐 묻는다면 씩 웃고 넘길 생각이었지만, 다행히도 로베르는 묵묵히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할 뿐이었다.
사실 소뵈르로서도 비앙카가 좋아진 것에 대해서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소뵈르가 생각한 비앙카는 재수 없는 여자애에 가까웠다. 까탈스럽고, 사람에게 벽을 치고. 애초에 말 자체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 그녀에 대해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마사에서 마주친 뒤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거만하기는 했지만 제법 상냥했고,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혼자 결단을 내리는 등 고집이 셌지만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냐 물어보면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간식을 나눠달라 농을 걸었더니 남은 과자 전부를 건네준 건 좀 귀여웠다. 마치 적선이라도 하는 모양새였지만 무시하지 않았다는 게 어디던가.
앗, 이렇게 줄줄 나열해보니 장점이 아닌 것 같군.
하여튼 소뵈르는 그런 비앙카가 싫지 않았다. 아니, 좀 마음에 들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저 작고 건방지고 오만한 마님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소뵈르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채신머리없이 올라갔다. 애초에 소뵈르는 자신을 꼼짝없이 옭아매고 휘두르는 여자에게 약한 면이 있기도 했다.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여지가 없지 않은 편이 좋았다.
그리고 비앙카는 아주, 그에 딱이었다.
* * *
아무리 산책 대신이라 할지라도 넓은 성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은 성의 동쪽, 내일은 성의 남쪽. 조금씩 나누어 본다 하더라도 마을을 둘러보고 나면 해가 기웃기웃 졌다. 말 그대로 둘러만 보는 것일 뿐,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데도 체력이 쪽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몸이 힘든 것 정도는 버틸 만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그녀가 걷는 곳은 그녀의 영지 안이었다. 힘들면 멈출 수 있고, 정 못 걷겠으면 그녀를 옮겨줄 마차를 부르면 된다.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인가!
과거의 비앙카는 몸을 위탁할 곳을 찾기 위해 발바닥이 엉망이 될 때까지 쉬지도 못한 채, 모난 돌이 총총 박혀있는 길고 긴 길을 걸었었다. 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끔찍한 고행을 이어나가며 눈물을 줄줄 흘렸었다. 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앙카가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하인들의 거부감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비출 때마다 수군덕거리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비앙카가 조금이라도 다가올 성싶으면 후닥닥 도망쳐버린다. 비앙카가 손짓해 부르면 고분고분 와서 고개를 조아리기는 했지만, 그들이 바닥을 향해 내리꽂은 얼굴에 어떤 표정이 드리우고 있는지 비앙카는 알 수 없었다.
비앙카는 의연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실제로 그런 일에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상처받지 않는다 하여 피부를 따끔따끔 찔러오는 적대 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닌지라,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군중의 적대가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날카로운 창이 되었다가, 이내 분열하여 가시 돋친 방패가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떠드는 목소리들에 스며 있는 거리낌. 비앙카는 분명 까다로운 마님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이런 적대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도 그들을 분노하게 하였던 것일까?
비앙카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무척 우연히 듣게 된 하인의 대화에서였다. 비앙카가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채 비앙카의 욕을 하던 그들 사이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바로 앙트였다.
비앙카는 앙트가 누군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녀를 모욕하여 손이 부르틀 때까지 뺨을 때리기까지 했던 하녀였지만, 결국은 그저 하녀였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같이 하인들의 대화를 들은 이본느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평생을 몰랐을 것이다.
아르노 성이 큰 영지이기는 했지만, 영지 안에 사는 이들 모두가 서로를 알 만큼은 좁았다. 그들이 앙트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떠나고 두어 달의 시간이 지났고, 고작 하녀 하나와의 해프닝은 지금까지 거론될 만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백작을 꼬시려던 하녀를 마님이 내치는 것 정도야 책이 될 일도 아니지 않던가? 게다가 앙트를 내쫓은 건 그들이 칭송하는 ‘그’ 백작의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득권층인 백작 마님의 질투로 인해 자신과 같은 신분인 가련한 앙트가 희생당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비앙카는 앙트의 일이 과장, 혹은 변질되어 소문났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니. 굳이 앙트 때문은 아니었다. 앙트의 일은 그저 계기일 뿐, 그 전의 비앙카가 쌓아 올렸던 행동들에 불씨가 지펴진 것이었다.
우스운 것은, 모두가 적대적인 와중 비앙카에게 호의적인 시선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이본느가 비앙카에게 다람쥐 털로 된 모피를 받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비앙카가 자신의 사람에게 씀씀이를 아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비앙카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낯설고 경직된 호의를 갖고 얼쩡거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비앙카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괜히 변덕스러운 그녀와 잘못 엮였다가 앙트처럼 내쫓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비앙카를 둘러싼 아르노 영지의 상황이 어지러운 만큼, 그녀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영지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현재 아르노 영지에는 비앙카의 행동을 ‘어차피 하는 것도 없이 생색만 내는 것’이라 주장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 영지를 돌아보기로 시작한 것은 자신이 백작 부인으로서 아르노 가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는 걸 표출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일을 배워두는 것은 좋을 테지만, 그렇다 해서 뱅상이 맡고 있는 일을 빼앗아 자신이 총괄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면 이 모든 것은 결과론 적으로 자카리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였으니까.
끈기 있고 근성이 있는 자라면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계속 이어나갔을 테지만, 비앙카는 어차피 해봤자인 일에 오래 시간 빼앗기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아르노 가를 위해 자신이 헌신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굳이 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비앙카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며 서서히 회랑을 거닐었다.
그렇게 비앙카가 회랑 중반쯤까지 왔을까, 하녀들이 도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명쯤 되는 이들은 회랑 바로 옆에 난 공터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햇빛을 받으며 자수를 놓고 있었다. 천이 고급인 걸 보아하니 비앙카의 옷에 들어갈 자수였다.
비앙카는 멀뚱히 하녀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하녀의 자수를 놓는 솜씨가 무척 훌륭했다. 저렇게 좋은 솜씨라면 레이스도 잘 떠낼 것이다….
떠올리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레이스. 레이스다.
무언가를 생각해 낸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그들이 있는 난간 밖으로 몸을 기울였다. 옆에 나 있는 계단을 생각지 못할 정도로 다급했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