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42화 (42/192)

#42 백작 마님의 결심(4)

소뵈르는 전장의 미친개라 불리곤 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내였다. 전장에서는 이성을 굳이 잡고 있을 필요가 없기에 미친개라 불릴 정도로 잔혹 무도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지만, 순간의 판단력만큼은 발군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이성적이고 싶은 순간에만 이성적이었고, 그가 이성적이고 싶지 않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말과 동일했다.

왜 가스파르는 소뵈르를 멈추지 않는 거지?

생각만치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로베르가 초조해하는 사이, 소뵈르는 비앙카의 앞에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비앙카가 무어라 무어라 하며 옆을 향해 손짓하니, 그녀의 옆에 있던 시녀 이본느가 비앙카의 간식 접시를 들어 소뵈르에게 들이밀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소뵈르는 개의치 않고 희희낙락해 하며 간식 접시를 호로록 입안으로 쓸어 담았다. 비앙카의 간식 접시를 홀라당 비운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손을 휙휙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앙카의 산책에 천연덕스레 끼어들더니, 간식까지 얻어먹는다. 그런 소뵈르의 모습을 본 로베르의 심정은 어이없기 짝이 없었다. 로베르는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비앙카는 소뵈르가 왔다 간 일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로베르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 내가 본 것이 환각이로구나!

그렇게 믿고 싶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로베르는 그날의 해프닝을 그렇게 웃어넘겼다. 하하하….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헛것을 보기도 하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나 보다. 로베르는 마냥 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뵈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게 정말 전쟁터에 정신 줄을 놓고 왔나. 뭐? 생각만치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럼 좋은 인간일까?

로베르의 암녹색 눈동자가 찢어지며 날카롭게 빛났다.

“마님이 널 인간 취급하는 줄 알아? 개 취급이나 다름없지. 그게 좋아? 자존심도 없는 놈.”

“개 취급이면 어때. 솔직히 개 맞지. 아르노 백작님의 개. 남편의 개니까 부인에게도 개. 귀여워 해주는 게 어디야. 간식도 주시고.”

“그거 좀 얻어먹겠다고 자존심도 없이 거길 가서 꼬리 치고 있어? 넌 지금껏 그 여자가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

“사실 뭔가 기억날 정도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어서.”

힐난하듯 쏘아붙이는 로베르의 말투는 매섭기 짝이 없었지만, 소뵈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히 넘길 뿐이었다. 로베르는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그 여자가 얼마나 그들을 멸시하고 무시했던가! 그들이 좋게 말을 붙이려 해도 찬바람 쌩쌩 부는 태도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그들과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비앙카가 그나마 ‘대화’라는 것을 하는 이는 남편인 자카리, 끽해야 뱅상 정도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화가 아닌 명령. 그게 아니면 말을 붙이지도, 타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것은 가스파르와 로베르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소뵈르는 자카리의 세 부장 중 유일한 평민 출신이었다. 자유민이었던 소뵈르는 병역에 징집되었다가 뛰어난 두각을 보여주어 자카리에게 간택되었다. 로베르는 남작가의 둘째였고, 가스파르는 세습되지 않는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비앙카는 유난히 소뵈르와 말을 섞는 것을 꺼려했다.

그럼에도 저렇게 좋게 받아들이고, 꼬리까지 쳐대다니? 소뵈르 놈, 약은 줄 알았더니 멍청이가 따로 없다. 로베르는 전우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로베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뵈르는 비앙카에 대한 좋은 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겁먹는 집채만 한 군마 앞에서도 당당하시고, 내 앞에서도 할 말 따박따박 하시고. 확실히 귀족은 귀족이라니까.”

혼자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꼴이 한심스럽다. 장점이라 늘어놓는 것이 정말로 장점인가는 둘째치고서라도, 도대체 뭐가 이렇게 단시간에 소뵈르를 홀려 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베르의 입꼬리가 파들 거렸다.

그가 아는 소뵈르는 다혈질 적이고 생각 없는 듯 보이지만 묘하게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비앙카에게 호감을 느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뵈르의 얼굴 가득한 호감을 보고 있자 하니, 거짓이라 섣불리 단언할 수가 없었다.

소뵈르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자기 마음을 숨기거나 속이는 이중적인 사내는 아니었다. 저건 진심이다. 로베르는 입을 딱 붙인 채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머릿속을 몇 번이나 뒤집어엎었다.

“까짓 조금 싸가지, 아니, 성격이 좀 세면 어때. 나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이번 수도에 가게 되면 토너먼트에서 마님의 손수건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아. 내가 이기게 되면 마님에게 꽃을 건넬 수 있으려나? 그건 좀 의욕이 나는데.”

“뭐?”

지금까지는 그래도 소뵈르의 말을 잘 듣고 있던 로베르가 파드득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불신감이 가득 찼다. 토너먼트에 손수건을 받아간다니! 게다가 마님에게 꽃을 건넨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 바보가 알기는 하나?

“너 진짜 뭐 잘못 먹었어? 지난번에 마님이 준 과자, 멀쩡한 거 맞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뭐야. 그때 그거 본 거야? 부끄럽게.”

말로는 부끄럽다 하지만 히죽이며 올라가는 입꼬리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소뵈르의 낙천적인 모습에 로베르의 얼굴이 더더욱 굳었다.

토너먼트에 앞서 기사가 숙녀에게 보석이나 지니고 있던 물품을 받는 것은 서로 은밀하고 내밀한 관계임을 암시하는 것이요, 승리의 영광을 돌리는 것 또한 그러했다. 물론 주군 아내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출전한 기사들도 있기는 했지만 무척 드물었다.

지금까지는 비앙카가 토너먼트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렇다 하여 생면부지의 다른 여인네에게 꽃을 건네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던 자카리의 세 기사들은 항상 주군인 자카리가 모시는 1왕자, 고티에 드 세브랑의 왕비에게 꽃을 건네곤 했다.

솔직히 그들이라 하여 몇 마디 이야기 나눠보지도 않은 그 왕비에게 꽃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마님인 비앙카보다 차라리 고티에 왕자의 왕비가 승리의 꽃에 더 어울리는 숙녀일 터였다. 적어도 그녀는 꽃을 받고 치하의 인사 정도는 건네주었으니까.

로베르의 얼굴에 비앙카를 꺼려한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인지, 소뵈르는 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우리는 백작님의 기사니까 마님께 영광을 돌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물론 그렇지. 내가 싫다 해도 결국 주군과 아르노 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승리를 돌려야 할 테고.”

소뵈르의 말은 정론이었고, 그에 대해 결연히 동의하기는 했지만 로베르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나오지 않아서 이런 상황을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내년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토너먼트에서 ‘저’ 마님에게 꽃을 건넸다가 무슨 답을 받을까. ‘저’ 마님이라면 그들을 모욕 주는 일도 주저 없이 저지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로베르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건넨 꽃이 내동댕이쳐지기라도 하면, 그 수치심을 어떻게 하지.”

“그냥 별생각 없이 받으시지 않을까.”

소뵈르는 로베르가 과잉반응 한다는 듯 답했다.

소뵈르도 로베르가 비앙카를 꺼려하는 이유에 공감하긴 했다. 그 또한 비앙카에 대해 좋은 기억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까 로베르에게 말했던 대로 애초에 그녀와 제대로 맞닥트린 일 자체가 드물었다. 그들은 자카리를 따라 항시 전쟁터를 나돌아다녔고, 그 전의 비앙카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어린 여자아이의 잘못까지 일일이 마음에 담아두는 것은 어른스럽지도, 남자답지도 않은 짓이었다.

“솔직히 네가 마님을 과도하게 싫어하는 건, 결혼할 당시만 해도 어려서 어느 정도 이용해먹을 수 있겠다 싶었던 마님 고집이 지나치게 셌기 때문이잖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