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백작 마님의 결심(3)
소뵈르가 얼마나 당혹스러울지는 비앙카가 알 바 아니었다. 비앙카는 태연스레 마사를 둘러보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말들은 전부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앙카는 턱을 치켜든 채 명령했다.
“한번 골라보게.”
“자, 잠시만요. 마님이 말을 타신다고요?”
소뵈르는 당황하여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걸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이 상황에 당황한 것은 소뵈르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말 타실 줄 아세요, 마님?”
이본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고, 가스파르의 짙은 눈썹 사이 미간에 자글 주름 잡혔다. 소뵈르에 이어 이본느와 가스파르까지 난처함과 의심스러움이 뒤범벅 된 표정으로 절 바라보자 비앙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비앙카 자신도 스스로가 활동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너무한 것 아닌가. 비앙카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녀는 얼굴을 가다듬고 엄숙히 답했다.
“이제부터 배울 생각이네.”
“아, 아니 갑자기 왜요? 마님께서는 마차도 있으시고. 아니, 애초에 잘 나가시질 않잖아요.”
이제부터 저녁을 먹겠다는 듯 태연한 비앙카의 태도에 소뵈르는 예의고 뭐고 다 잊은 채 횡설수설했다. 이제 막 나가기로 한 건지,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만 솔직히 본인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엔 상당히 무례한 언사였다.
그런 소뵈르의 태도에 이본느의 눈이 세모꼴로 올라갔다. 소뵈르가 기사든 부장이든, 비앙카가 불쾌한 티를 조금이라도 낸다면 바로 소뵈르에게 삿대질 할 기세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별생각 없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무례하긴 했지만 굳이 트집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소뵈르가 뱅상처럼 빙빙 돌려서 비앙카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의도를 갖고 비앙카를 모욕주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인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런 만큼 비앙카가 굳이 의미를 두고 파르륵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다. 비앙카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오늘 저녁 메뉴를 읊듯 말했다.
“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배워둬서 나쁠 일은 없지 않나?”
“위험해요, 마님.”
이본느가 걱정스레 만류했다. 가스파르 또한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것이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귀부인들 중 소양으로 승마를 배우는 이들이 몇이나 있는데, 굳이 저는 안 된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의 입술이 잘게 삐죽였다. 물론 그들이 안 된다 하더라도 비앙카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녀를 막을 권리가 없었다.
이본느와 가스파르의 참담하고 우려 어린 표정에 소뵈르는 말을 타겠다는 비앙카의 말이 그냥 지나가며 던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침을 꿀꺽 삼켰지만 목소리는 떨렸고 말은 더듬거렸다. 소뵈르는 힘겹게 다시 한 번 질문을 건넸다.
“정, 정말 말을 타실 겁니까?”
“내 허튼소리는 하지 않네. 뭐, 한번 타봐서 영 적성에 안 맞으면 그만둘 생각이지만.”
소뵈르의 떨리는 심장을 비웃듯 비앙카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안 되는 일을 굳이 시간 뺏어가며 노력할 만한 근성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시작도 안 할 이유도 없었고. 안 해 보고 후회하는 것보단 해보고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훗날 찝찝한 미련에 들러붙어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비앙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소뵈르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비앙카는 척 보기에도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 보였다. 거기에 연약했다. 비앙카가 십여 년간 방에 콕 틀어박혀 있었다는 건 아르노 성의 모두가 알았다. 산책이 지상 최대의 운동과제였던 그녀가 갑자기 말을 탔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다. 설령 소뵈르가 아무리 순한 말을 골라드린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혹여 비앙카가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자카리가 무슨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비앙카의 친정인 블랑쉐포르 가에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으리란 건 뻔했다. 비앙카의 고집에 자신의 목을 걸고 싶지는 않았던 소뵈르는 결국 자카리의 핑계를 대기로 했다. 사실 그게 원론이기도 했다.
“마님께서 말을 타시는 건 백작님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만….”
“그럼 그러하지.”
생각보다 비앙카는 순순히 물러났다. 소뵈르는 어안이 벙벙해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말을 타겠다 주장한 것만큼이나 지금의 태도는 그녀답지 않았다. 원래의 비앙카라면 ‘내가 왜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작 허락을 맡자고 뒤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등등의 이유를 대며 소리를 높였을 터였다.
소뵈르는 비앙카가 갑자기 왜 이러느냐는 질문이 담긴 시선을 가스파르에게 던졌지만, 가스파르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혹시 뭘 잘못 드신 걸까? 아니, 애초에 뭘 드시기는 하나? 아무것도 안 드셔서 이러나? 그래. 트집 잡을 기력도 없는 거지….’
물론 기력 없는 사람이 승마를 하겠다 나서지는 않을 테지만, 소뵈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합리화를 했다. 하지만 비앙카가 순순히 물러난 것이 우스울 정도로 더 충격적인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하여간 고생이 많네. 승마를 배우게 된다면 종종 마주치게 되겠군. 잘 부탁하네.”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더 달라질 것이 없다 생각한 비앙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총총, 마사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거침없었다. 이본느는 바로 비앙카의 뒤에 따라붙었고, 가스파르는 소뵈르의 어깨를 툭툭 친 뒤 비앙카를 따라나섰다.
소뵈르는 멍하니 선 채 지금 자신이 겪은 일을 되짚어 보았다. 비앙카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았다. 술을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셔도 이렇게 어지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 마님이 말똥으로 지저분한 마사에 와서 말을 둘러보고, 승마를 배울 거라 하기도 했으며, 백작님의 허락을 받아도 좋다 말했고, 저에게 고생이 많다는 공치사까지 했다고?
비앙카가 마사에 머무른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만으로도 비앙카는 소뵈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직도 믿을 수 없었던 소뵈르는 눈을 깜빡였다. 마치 요정의 장난에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 * *
“생각만치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소뵈르는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소뵈르가 있는 곳은 로베르의 집무실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오더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대던 소뵈르에게 조금 짜증이 난 로베르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누가?”
“마님.”
“뭐?”
로베르가 막 검토하고 있던 서류가 털썩, 책상 위로 떨어졌다. 가스파르가 마님의 호위로 빠져나가고 그 몫의 일을 소뵈르와 나눠 가졌다 보니 일이 많기는 했다. 그러니 헛소리도 듣는 거겠지. 하하.
그래도 주어진 일이니 백작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아니, 뭐, 마님이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고. 말도 통하고.”
소뵈르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의 확신 어린 대꾸는 로베르가 들은 것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강제로 깨닫게 했다. 로베르는 그제야 자신이 며칠 전에 본 괴이쩍은, 환각으로 치부해 넘겼던 광경이 사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이틀 전쯤이었을까. 백작님에게 올릴 보고가 있어 회랑을 걷던 와중, 로베르는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비앙카가 종종 산책하곤 하는 정원이 있었다. 마님이 또 무슨 소란을 벌이는 건지, 로베르는 와락 얼굴을 찡그리고 창문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거기서 벌어지고 있던 꼴이란!
로베르의 예상대로, 정원에 있던 이는 비앙카와 이본느, 가스파르였다. 정원 한편에 있는 긴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중이었다. 남은 이렇게 뻘뻘 땀 흘리며 일하는 와중에 대놓고 띵가띵가 쉬다니? 옆에는 간식도 곁들인 채였다.
그런데 거기에 생각지 못한 이가 같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소뵈르였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찍이서나마 보이는 모습은 퍽 친밀해보였다.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닌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걸까 싶었던 로베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잘 보니 소뵈르가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친밀하기는 무슨. 안도하기가 무섭게 다른 걱정이 로벨르의 가슴에 치솟았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그래도 가스파르가 있으니까…. 아무리 비앙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백작 부인이었다. 로베르는 홀로 가슴을 졸였다.
그때 소뵈르가 대뜸 비앙카가 앉아 있는 벤치 근처로 다가갔다. 로베르의 목 끝까지 악소리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