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백작 마님의 결심(2)
소뵈르는 싱긋, 넉살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며 비앙카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변덕인지는 몰라도, 마사는 그가 아는 마님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괜히 들였다가 한소리 듣느니 애초에 들이지 않는 것이 낫다. 소뵈르는 넌지시 운을 떼었다.
“마님께서 이곳은 어떻게….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만….”
“내 마사를 구경하러 왔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일 보게.”
비앙카는 턱 끝을 치켜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소뵈르를 내려다보듯 눈썹을 내리깔고 보는 그녀에게선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란 고집이 풍겼다. 소뵈르 앞에 우뚝 선 그녀의 눈길은 얼른 자리를 비키지 않고 무엇 하냐 말하고 있었다.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비앙카의 앞에선 소뵈르는 속으로 땀을 흘렸다.
뭐라고? 마사를 구경하러 왔다고? 예쁘게 차려입은 드레스는 먼지 하나 앉지 않았고, 길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지금 이대로 사교계에 내보내도 될 것 같은 여자가, 말똥 냄새 풀풀 풍기는 마사를 도대체 무엇 하러 보러 온단 말인가?
최근 뱅상을 불러 성을 관리하는 일에 기웃거린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이 또한 그와 같은 연장선의 일임이 분명했다.
아, 그래. 마님도 진심으로 마사를 둘러보고 싶은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차림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적당히 거절하면 그녀도 체면을 구기지 않고, 저도 그녀를 몰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게 문제였다. 애초에 소뵈르는 비앙카와 말을 섞어본 일이 드물었다. 그는 평소 눈치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이것저것 내뱉는 편이었지만, 비앙카의 앞에 서면 입이 절로 다물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점잔 뺀다며 소뵈르에게 놀림당하는 로베르 쪽이 더 건방지게 나설 정도다.
뱅상에게 있어서는 직무를 유기 중인 난처한 마님, 로베르에게 있어서는 거만하고 사람 아낄 줄 모르는 오만불손한 마님일 터지만, 사실 소뵈르는 비앙카가 좀 두려웠다.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고, 설득할 수도 없음에도 마냥 무시해 넘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비앙카와의 대화는 전장의 미친개, 못 뚫는 진형이 없는 돌격 대장, 랜스의 기사 소뵈르라 할지라도 침을 꿀꺽 삼키게 할 만한 일이었다. 그녀와 말을 섞을 걸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비록 몇 마디 나눠본 적도 없지만, 굳이 불 속에 손을 집어넣어야지만 불이 뜨거운 걸 아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평소 자카리나 뱅상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만 봐도 뻔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꼬투리를 잡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패악질을 부리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자신의 주장을 단 한 번도 굽혀본 적이 없다. 만약 소뵈르가 자카리나 뱅상이었다면 말을 한마디도 섞지 못한 채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런 자신의 앞에 비앙카가 서 있고, 그녀는 소뵈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비앙카와 대화를 하고 설득해서 그녀를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쫓아야만 했다! 그것이 소뵈르와 비앙카, 자카리, 하여간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소뵈르는 자카리에게 비앙카와 대화를 하라 떠밀었던 일을 떠올렸다. 주군에게 죄송스러운 일을 했다며 속으로 작게 후회한 그는 필사적으로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잡아 올린 채 능청스레 말했다.
“아이고. 아르노 가의 말은 군마가 많아서 다들 성질이 날카롭기 그지없습니다. 마님처럼 낯선 상대가 들어서면 잔뜩 발을 구를 겁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소뵈르는 비스듬히 마사를 가로막고 마사 입구 옆에 있는 사무실을 손짓했다. 마부들이 교대하거나 쉬는 작은 방이었다. 누추하나마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다. 무슨 변덕으로 마사에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귀한 몸이신 마님은 저런 곳에 들어갈 수 없다며 거부할 터였다. 그럼 자신은 그걸 핑계로 그녀를 몰아내면 된다. 마사 안쪽은 저 좁고 퀴퀴한 공간보다도 더 끔찍하다면서.
하지만 비앙카는 소뵈르의 제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소뵈르가 비스듬히 가로막은 반대쪽으로 휙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그녀가 소뵈르의 말을 순순히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완전 예상과 정반대로, 거침없이 나오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소뵈르는 비앙카가 발을 내디디는 근처에 미처 치우지 못한 말똥을 발견했다. 아까 마부가 치우다가 한 덩이 흘린 모양이었다. 안색이 시퍼레진 소뵈르는 울상을 지으며 다급하게 비앙카를 만류했다.
“아니, 아니. 그쪽 말고. 이쪽으로. 마님. 귀한 옷 다 버리십니다.”
비앙카는 바닥을 보았다. 자기가 말똥을 밟을 뻔했다는 걸 깨달은 비앙카는 고개를 슬쩍 갸웃 기울이며 소뵈르를 올려보았다.
“이렇게 마사 관리가 엉망인가?”
“그건 아니옵고.”
질책 아닌 질책에 소뵈르의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조금 허술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깔끔하게 관리한다 했는데, 하필 오늘…. 그런데 바로 코앞에 증거가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비앙카가 그에 대해 오래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비앙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말똥을 휙 피하며 말했다.
“어떤 말이 얼마나 있나 파악하고 싶어서 말이네. 말도 아르노 영지의 재산 아닌가.”
“제, 제가 나중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아슬아슬하게 땅 위에서 펄럭일 때, 소뵈르의 심장도 쿵쾅거렸다. 식은땀 한 방울이 소뵈르의 등을 타고 도록 흘렀다. 그녀가 무슨 변덕에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좋아하는 옷에 말똥이 묻었다며 어깃장을 놓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와달라는 간청을 담아 가스파르를 바라보았지만, 가스파르는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결국 한참 그녀를 붙들고 있던 소뵈르는 결국 비앙카를 마사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사는 거대하고 넓었다. 관리가 깔끔하다는 소뵈르의 주장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마른 건초 냄새와 엷은 짐승의 체취. 목축장에 풀어놓은 말들의 자리인지 군데군데 비어있는 곳도 있었다.
비앙카가 금방 뛰쳐나갈 거라는 소뵈르의 추측과 달리, 비앙카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한참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말을 향해 함부로 손을 뻗지는 않았다.
이본느는 걱정스레 비앙카의 뒤를 따랐다. 그때, 군마 한 마리가 쑥 고개를 내밀어 이본느의 뺨을 핥아 올렸다. 물컹한 느낌과 함께 질척한 침이 들러붙자 이본느는 히이이익,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쳤다. 넘어질 뻔한 이본느를 잡아준 것은 가스파르였다. 이본은 무뚝뚝한 얼굴로 절 내려다보는 가스파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고, 고마워요.”
“괜찮니, 이본느?”
“네. 깜짝 놀랐어요. 마님도 조심하세요.”
이본느는 쿵덕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비앙카에게 답했다. 가스파르는 이본느가 진정하기까지 말없이 그녀를 지지해주었고, 이본느가 한숨 돌리자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비앙카는 마사를 휙휙 둘러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밖에서 보기에도 꽤 컸는데, 안에서 보니 더 웅장했다.
“정말 말이 많구나.”
“저희 백작님께서 세력이 크자마자 제일 먼저 구비한 것이 말이었습죠. 뛰어난 기동력으로 기사들을 무장시키니, 전쟁에서는 백전백승 아니겠습니까.”
소뵈르는 우쭐해서 말했다. 자카리의 추종자인 그는 자카리가 얼마나 현명한 선택을 했는지, 그때 돈을 허투루 쓰는 멍청한 놈이라며 비웃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비앙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말이 많으면, 혹여 비앙카가 쫓겨나는 순간이 된다 하더라도 말 한 마리 정도는 자비로 건네주지 않겠는가. 이 많고 많은 말들이 최후의 전쟁에서 전부 죽어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애초에 그럴 일이 없게 되어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비앙카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회귀 전과 같은 미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습관적으로 최악을 가정하게 되어버린다. 단단히 얽매여 있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말이 많으니, 당장 내가 탈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다음 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지도. 긍정적으로 현재를 직시한 비앙카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탈 만한 말은 있는가?”
“물론 마님이 탈 만한 말도 있…. 네?”
별생각 없이 답하던 소뵈르는 비앙카의 말을 다시 되짚어보고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당혹스레 데굴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