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39화 (39/192)

#39 백작 마님의 결심(1)

그렇게 뱅상의 안내와 함께 장원을 한 바퀴 돈 비앙카는 그다음부터 항상 하는 산책 시간에 정원 대신 고기 저장소, 제빵실, 양조장, 목축장 등을 들렀다. 들러본다 해서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도 없고, 물어본 다거나 작업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농노들이 일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앙카로서는 그저 산책 코스를 좀 더 넓힌 것이나 다름없는,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세계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기,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서로 주고받는 사람들의 목소리. 소란스러움과 함께 풍기는 삶의 냄새가 그녀의 피부를 따끔하게 찌르고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시끌시끌한 소란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유리되어 살아왔는지 만큼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회귀 전 성에서 쫓겨난 뒤 세상을 유랑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애인이었던 페르낭에게 받은 배반의 상처가 그녀의 시야를 막았다. 아는 것도 없고, 세상 모든 이들이 사기꾼으로 보여 마음을 내어줄 수조차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상은 혹독하고 차가울 뿐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무지가 제 목을 죌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를 떠올린 비앙카의 입술이 자조적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농노들은 마님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깐깐한 집사의 눈총만으로도 힘겨운데, 마님이 무슨 트집을 잡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녀가 대놓고 그들보고 무어라 하진 않지만, 그건 단지 농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인 게 틀림없다. 저 첨탑 끝 화려하게 장식된 방으로 돌아가서 집사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겠지. 농노들은 계속해서 비앙카를 흘끔거렸고, 그런 만큼 일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타인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비앙카나,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무덤덤할 것 같은 가스파르는 모르겠지만 이본느는 그들의 불편함을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본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은 매번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비앙카가 장원을 돌아보는 것이 생소할 테지만, 오래 지나지 않으면 그들도 비앙카에게 익숙해질 것이다. 이본느는 그리 믿었다.

하지만 믿음과 별개로 비앙카가 타인의 달갑지 않는 시선을 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카펫 깔린 바닥만 밟고 다니던 그녀가 폭신한 흙으로 뒤덮인 잘 다듬어진 산책길이 아닌, 오물과 물웅덩이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땅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이본느의 가슴이 졸아붙었다.

옷자락에 진흙이 튀겨도 비앙카는 불쾌한 기색 한번 내지 않았다. 옷을 수선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 옷을 사면 되기 때문일까. 당연히 불쾌해 할 거라 생각한 그녀가 티 한 자락 내지 않으니 농노들은 더 당황해했다. 차라리 불쾌함이라도 비추면 더 나았을까? 이본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새가 토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농노와 비앙카는 애초에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태생부터 고귀한 비앙카가 얼굴에 진흙을 묻힌 채 일하는 모습은 상상하려야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이본느의 생각이 우습게도, 비앙카는 얼굴에 진흙을 묻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길을 끊임없이 걷을 적이 있었다. 한 줌의 물을 얻기 위해 바위 틈새 고인 빗물을 핥아 먹기도 했고, 곰팡이가 핀 빵을 게걸스레 삼키기도 했다. 회귀 전의 상황이었으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비앙카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태생이 고귀할 수는 있으나, 그 끝까지 고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낱 자작의 둘째, 남작 위를 받게 된 자카리가 백작 위를 넘어 차기 왕의 든든한 방패가 될 줄 누가 알았을 것이며,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직전의 그가 전쟁터에서 허무하게 스러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 함께 비앙카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이 흔들리게 되었고, 고귀한 태생의 비앙카의 인생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사람의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만 아는 것이라는 것을 과거의 비앙카는 몰랐다.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는 아득바득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회귀 전의 비앙카는 주변을 살펴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회귀 후의 비앙카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본느가 감탄한, 적대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린 비앙카의 의연한 모습은 그저 그녀의 생각이 다른 곳에 가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루빨리 자카리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르노 가에서 내쫓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를 위한 명분은 무엇일까.

그런 필사적임이 그녀를 주변에 섞이지 못한 채 둥둥 뜨게 만들었지만 비앙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이 주변에 섞일 필요가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본느와 가스파르를 곁에 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많이 달라졌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변화지만 그녀로서는 제법 큰 변화였다.

그렇게 장원 주변을 살펴보면서 보는 것 반 스쳐봄 반으로 지나가고 있던 와중, 비앙카는 생소한 곳에 도착했다. 나무판자로 덧대어진 목조 건물 앞에는 짚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안쪽에서부터 푸르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비앙카는 낯선 건물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곳 같은데.”

“마님, 이곳은 마사에요. 위험하니 돌아가요.”

이본느가 황급히 비앙카의 진로를 막아섰다. 비앙카는 이본느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위험해? 말이 있을 뿐이잖아.”

“그 말이 위험한 거라니까요. 아앗, 마님.”

이본느의 걱정스러운 만류에도 비앙카는 마사 안쪽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내심 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에 잘 되었다 생각했다.

회귀 전의 비앙카는 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방 밖으로 나가 활동적으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도 아니었고, 먼 곳을 이동할 때는 가마를 타면 됐다. 소양으로서 승마를 타는 몇몇 귀부인들도 있었지만, 굳이 강요되는 소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절뚝이며 먼 길을 걷던 그때, 그녀가 말을 탈 줄 알았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길에서 버리던 시간도, 괴롭던 순간도, 천지간에 그녀를 받아줄 곳이 없어 이리저리 치이며 마음고생 하던 시간도 많이 줄었겠지.

이번 생에는 승마를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번 봄은 수도로 올라가니 무리지만, 다음 봄쯤은 가능할 것이다. 아르노 가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해 그녀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황은 생각해두어야 했다.

‘먼저 말을 봐두는 것도 좋겠지.’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가 마사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가스파르가 비앙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스파르는 평소와 같이 엄격한 표정으로 비앙카를 내려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비앙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여긴 고작 마사일 뿐이다. 그것도 그녀의 영지 내에 있는. 위험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비키게, 가스파르 경.”

“……. 위험합니다. 돌아가시지요.”

“불이 치솟고, 날붙이가 번뜩이고, 피가 튀기는 곳도 다녀왔는데, 고작 말이 위험할 이유가 무에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주방과 도축장이 마사보다 더 위험했다. 어차피 다들 타고 다니는 말인데, 뭐가 위험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아까 목축장에서 멀리서나마 말을 보기도 했었다. 비앙카는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게다가 아까 목축장에도 다녀왔지 않나.”

“목축장은 멀리서 보는 것이니까요. 마사는 너무 가깝습니다.”

“자네들은 나를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

“어, 가스파르 아냐?”

그때 가스파르의 뒤, 마사 안쪽에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건들거리는 듯한 가벼운 말투에서는 평민 특유의 억양이 느껴졌다. 자카리의 부장 가스파르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평민 출신의 사내, 자카리의 또 다른 부장 중 하나인 소뵈르였다.

마사 안에서 일하던 와중 입구 근처가 소란스럽기에 나와 보았는데, 못 알아보기 힘든 커다란 가스파르의 덩치가 마사 입구를 딱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이 좁고 퀴퀴한 마사에 갇혀있는 것도 답답했는데, 친우의 등장에 소뵈르는 반갑게 말을 붙였다.

“여긴 웬일이야? 지금쯤 마님의 호위를 맡고…. 있었구나.”

가스파르의 덩치에 가려있던 비앙카를 뒤늦게 발견한 소뵈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소뵈르는 혹여 자신이 뭔가 말실수 한 건 없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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