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38화 (38/192)

#38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8)

“…물론입니다.”

뱅상은 못마땅한 듯 끙, 혀를 찼지만 순순히 긍정했다. 평소 불퉁한 그녀가 사치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좋아지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고, 그의 주인인 자카리는 비앙카가 기분 좋을 일을 위해서라면 이정도 값은 충분히 쓸 터였다.

뱅상은 무척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혈통 좋은 귀족들이 그러하다면 그가 맞춰야 하는 일이었다. 뱅상은 유능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작가 정도에서 일하던 인사였고, 비앙카는 내로라하는 명문 백작가에서 태어난 귀족 아가씨였다. 사치와 체면이 어느 정도 연계된다는 것은 그도 인정했고, 훗날 자카리가 더더욱 출세를 하였을 때 그런 쪽으로 체면을 깎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뱅상의 긍정에 비앙카는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에겐 한없이 가벼웠고, 모두가 별거 아니라 생각하는 일이 그녀에겐 한없이 무거웠다. 산들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서는 그들과 태생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마 그런 것을 기품이라 하리라. 그녀의 내실이 사치스럽고 한심할지언정, 그와 별개로 날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 태도의 고귀함만큼은 뱅상도 무어라 트집 잡을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겉치레뿐일지라도.

“네가 조각한 초는 아름다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나에게는 그것으로 된 일이야.”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한 비앙카는 답이 되었냐는 듯 가는 눈길로 니콜라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니콜라에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니콜라는 그녀에게 있어 꽃밭에 무성히 나 있는 풀 한 포기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비앙카는 바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채 발을 옮겼다. 비앙카가 움직이자 그녀의 하인들 모두 우르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쌀쌀맞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태도였지만, 니콜라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비앙카가 해준 말이, 그녀의 목소리를 빌어 몇 번이고 그의 귀에 웅웅였다. 비앙카가 자리를 뜬지 한참이 지났지만 니콜라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우리 마님은요, 지금껏 방에만 콕 박혀 계셨어요. 영지에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니 마님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농노들 사이에 오가곤 해요. 물론 들키면 경을 칠 일이라는 걸 알지만, 왕께서 듣지 못하는 곳에서는 왕님 욕도 하는데, 까짓 마님 욕이 대수겠어요? 저도 일하는 와중 틈틈이 마님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마님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안 좋은 이야기예요.

제일 많이 들은 건, 마님의 외모가 끔찍하게 못생겼다는 것이었어요. 옛날에 결혼하실 때만 해도 어여쁜 소녀였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거지요. 햇빛을 쐬지 않아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신경질을 부리느라 비쩍 마른 몸은 노파 같다고도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겠냐 싶었지만, 본성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태도가 농노들의 망상에 확신을 주었어요. 그들은 맨날 모이기만 하면 마님이 하녀들을 질투해서 매질을 했다는 소리를 일삼곤 하거든요. 어여쁜 하녀들의 외모에 흠을 잡아 내쫓고, 얼굴을 어쩔 수 없으니 비싼 옷을 몸에 걸치는 거라고도 했어요. 그래 봐야 예뻐지겠냐며, 마음을 예쁘게 써야 얼굴도 예뻐지는데 우리 마님은 그게 안 된다며 투덜거리곤 했죠.

성 외각에서 일하는 농노들로서는 마님을 볼 일은 없거니와, 실제로 마님에게 혼났다는 하녀들이 엉엉 울며 성을 나가곤 하니 하인들의 말이 사실이겠거니 하고 넘겼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실제로 본 마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시체 같다는 피부는 얼음조각처럼 투명하고 연약했고, 제 몸값으로는 결코 댈 수 없는 고귀한 옥빛 옷감은 마님에게 놀랄 만큼 잘 어울렸어요. 마르시기는 했지만 노파라니요. 매끄러운 피부는 촛농을 녹여 만든 듯 흠 하나 없이 하얬어요. 예쁘다는 하녀들에게 질투를 느끼시기는커녕, 하녀들이 마님에게 열등감을 느낄만한 분이셨죠!

그분은 그저 병약하실 뿐이에요. 느릿한 손짓은 힘이 없었지만, 타오르는 듯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에서는 생명력이 타닥타닥 튀어 올랐어요. 마님이 제가 조각한 초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순간 세상은 멈췄어요. 마치 저와 마님만 존재하는 듯한 순간이었죠. 저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분이 내가 혼을 다해 깎아낸 조각을 마음에 들어해주시다니!

그건 무척 황홀한 경험이었어요.

마님께서는 다들 코웃음 치는 제 솜씨를 좋게 봐주셨어요. 그리고는 마님의 방에 놓을 초를 제가 조각하라고 하셨죠.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양초장의 사람들은 다들 마님이 변덕을 부리는 것일 뿐이라고 했어요. 너 따윈 그냥 놀림감이었을 뿐이라고, 네 양초 조각 따위 지금은 뭐라도 된 듯 호들갑을 떠시지만 그건 지금의 변덕일 뿐이라고요. 내일이면 다른 귀족 나으리들처럼 새까맣게 잊어버리실 테니 많은 기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은 지금껏 괜한 핑계로 연약한 마님을 헐뜯었고, 지금의 속삭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이제 저는 알아요.

그렇게 얼떨떨한 채 하루가 지나가고, 저는 달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나무판자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어요. 마음만 같아선 달빛을 의지 삼아 조각해 내려가고 싶었지만, 양초는 재고관리가 엄격한 만큼 쉽게 빼올 수 없었거든요. 특히나 마님이 쓰시는 밀랍 초는 귀한 것이라 집사장님이 따로 관리하는 물건이었어요. 저는 제발 마님이 절 잊지 말아 주시기를 기도하며 뜬 눈으로 하룻밤을 샜어요.

그렇게 저는 불안과 초조에 떨며 아침을 맞이했어요. 쟝 아저씨는 제 눈 밑에 퀭하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혀를 쯧쯧 차셨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평소였다면 무엇보다도 기다려졌을 아침 식사가 목에 턱턱 막혔어요. 마님에게서 언제쯤 연락이 올까요?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정오가 되기까지 제 피는 바싹바싹 말라갔어요. 하지만 점심 식사를 하기 전, 쟝 아저씨가 절 불렀어요. 마님에게서 기별이 온 것이었어요!

집사장님께서 밀랍초가 들어있는 나무 상자를 건네며 마님께서 오늘 저녁 제가 만든 양초를 쓰고 싶다 하셨다 말하셨어요. 그러니 다른 일보다도 이걸 우선시해달라고도 하셨죠! 저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어요.

전 신이 나서 양초를 조각했어요. 마님의 명령이다 보니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어요. 마님께서 저를 까맣게 잊을 거라 말했던 수잔 아줌마는 머쓱한 듯 감자 한 알을 건네주셨어요. 저는 감자를 감사히 받았지만, 바로 먹지는 않았어요. 예전이었다면 바로 껍질을 까서 홀랑 입안으로 집어넣었을 테지만, 지금은 끌을 한 번이라도 움직이는 게 더 중요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했던 조각 중 제일 아름답고 완벽한 조각을 해낼 수 있었어요. 안도와 함께 조각된 초를 집사님에게 건네 드렸는데, 집사님은 조각을 가만히 보더니 저보고 따라오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집사님을 따라갔어요. 성문을 몇 개나 지나면서 주변이 확확 바뀌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점점 좋아져만 갔어요.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저는 커다란 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어요. 집사님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도착했습니다, 마님.’ 하고 말하고 나서야 저는 제가 마님의 방에 왔다는 걸 알게 되었죠.

집사님은 방 안으로 제 등을 떠밀었어요. 저는 조각된 초가 담긴 나무상자를 들고 마님의 방에 들어섰죠. 머리가 핑핑 돌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요. 마님의 시녀가 제 손에서 상자를 가져가는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죠.

조각을 이리저리 둘러본 마님은 살포시 웃으며 ‘잘했다, 니콜라.’라고 하셨어요. 그제야 저는 파드득 정신을 차릴 수 있었죠. 마님의 미소는 꽃이 봉오리를 막 틔워 올리는 순간처럼 조용하여 눈치 채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값진 미소였어요.

게다가 마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이건 어떻게 조각한 거고 뭘 조각한 거냐는 마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리니, 마님께서는 다시 한번 웃으며 천천히 대답하라 해주셨지요. 얼마나 상냥하기 그지없으신지!

마님의 미소를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요. 지금까지는 여신님을 꺼내드리기 위해 조각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마님과 만난 뒤로는 마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마님께서 조각을 부탁할 때마다, 마님을 위해, 마님만을 위해 조각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올라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마님을 조각하기엔 제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껴버렸거든요.

지금껏 구석진 곳에서 쭈그려서 조각하던 제가 초장이 공방 한 구석에 나무의자를 놓고 버젓하게 조각을 하니 저로서는 정말 인생 역전을 한 거예요. 어찌 신이 나지 않겠어요? 이게 모두 마님 덕분이에요. 제가 마님의 총애를 받으니 제 앞에서 소리 높여 말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여전히 마님이 못되고 신경질적이라는 등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전 이제 그 이야기는 절대 믿지 않을 거예요. 마님은 좋은 분이신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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