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7)
속눈썹이 서늘하게 드리운 눈매는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부서진 햇빛이 들어선 듯, 황금빛과 흰빛이 촘촘히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따듯한 봄날, 요정들이 나뭇잎에서 그러모아둔 이슬이 저러할까. 방금전까지만 해도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독사와 같다 생각하던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넋을 빼놓고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계속 초만 바라보고 있던 비앙카가 슬쩍 시선을 니콜라에게 흘렸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니콜라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니콜라는 후다닥 고개를 땅으로 처박았다. 순간 숨이 틀어 막힐 것 같았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까의 두려움과 다른 생소한 위압감이 니콜라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건 뭘까. 발끝이 오그라들며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을 느끼며 니콜라는 숨을 들이켰다.
니콜라가 초조해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초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여상스레 물었다.
“예쁘네. 보기 좋구나. 이런 걸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니?”
“초만 있으면 몇, 몇 개든지 만들 수 있어요.”
니콜라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대답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비앙카가 도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내가 초를 만지작거리는 걸 싫어했는데. 설마 마님은…. 내가 초를 조각하는 걸 인정해주시는 걸까? 이해해주시는 걸까? 차오르는 숨이 목 끝까지 틀어 막혔다.
니콜라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커다란 눈망울 속 작은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고, 콧잔등에 작게 놓인 주근깨가 들썩였다. 니콜라는 본능적으로 상황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그제야 여유가 생긴 니콜라는 조심스레 다시 한번 비앙카를 훔쳐보았다.
마님의 행동 하나하나에 두려움에 떨던 당시 그녀는 마치 마녀처럼 보였지만, 지금 다시 본 마님은 고왔으며 좋은 냄새가 났다. 햇볕에 반짝이는 상록수 이파리 같은 따듯한 보드라움. 니콜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니콜라의 심정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비앙카는 홀로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하던 그녀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말을 태연하게 꺼냈다.
“역시 내 방에 쓸 초는 이런 게 좋겠어.”
“네?”
초장이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비앙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영 알 수가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낯짝이었다. 그나마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뱅상이 성급히 덧붙였다.
“마님, 이런 초는 깎여나간 만큼 오래 타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님의 방에 쓰는 초는 이런 수지를 굳힌 것과 달리….”
“밀랍으로 만든 초를 조각하게 하면 되잖아. 어차피 이곳저곳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방 하나 정도일 뿐인데.”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들은 엄두조차 못 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이 입에 올리는 모습에 뱅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비앙카가 밀랍 초를 쓴다 질책의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 방금 전인데,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어조였다. 애초에 뱅상의 말을 새겨듣기는커녕, 그의 말에 빈정 상했다는 의도가 풀풀 풍겼다.
‘아르노 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배워둘 필요가 있기는 무슨!’
이제야 영지의 제정 상황을 파악하고 소비를 줄이려나 보다, 하고 조금 대견하게 여기려고 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아직도 그녀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가만히 성 안에 틀어박혀 있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뱅상의 그런 생각을 비웃듯 비앙카는 해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작님께서 나에게 언질 주지 않았다는 것은, 초 정도는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어트린 채 뱅상을 올려다보는 비앙카의 모습은 퍽 천연덕스러워 보였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마님이 철없는 소리를 한 것처럼. 하지만 뱅상은 비앙카가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말을 꺼냈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명백히 그를 비꼬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한 대 맞은 뱅상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물론 그조차도 비앙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혹시 내가 이 정도도 쓰지 못할 정도로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가? 집사가 그리 말하면 그렇구나 알아듣겠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분통이 터지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는 집사였고, 그녀는 그의 주인의 아내였다. 종복이 주인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실제로 비앙카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라 노력한 백작님의 명이 있었던 만큼, 뱅상은 비앙카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뱅상은 순순히 꼬리를 말고 물러섰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빠른 시일 내에 이 초를 내 방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노력하겠습니다.”
가벼운 기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이를 갈며 고개를 숙이는 뱅상의 머릿속에서 주판이 타닥타닥 튕겼다. 그래도 비앙카의 방 정도에 한정을 하면 그리 극심한 예산 소모는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이번 겨울 그녀가 산 사치품은 여우 모피 정도였다. 작년에 비하면 눈에 띌 정도로 절약적인 태도였다.
물론 뱅상은 비앙카가 그 돈을 아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 예상은 역시나였다. 그녀는 돈을 절약하는 법은 모르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은 알뜰하게도 박박 긁어 썼다. 한 푼이나마 남기는 법이 없지. 뱅상의 입술이 비틀렸다.
승자인 비앙카는 이제 양초장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고고하게 명령했다.
“그러면 이곳은 얼추 다 둘러보았군. 다른 곳으로 안내하게.”
뱅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고, 비앙카는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본느와 가스파르도 묵묵히 그녀를 보필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양초장에서 벌어진 때아닌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은 후후닥닥 자리를 피했다. 깐깐한 집사와 표독한 마님의 눈에 밟혔다가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르니까. 비앙카와 뱅상이 어느 정도 멀어졌을까, 그들은 비앙카가 사치에 눈이 돌아갔다고 수군거렸다.
“저 귀한 것을 왜 일부러 파내라 시킨대?”
“그건 모르지. 평민과 같은 모양의 양초를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귀족들은 손 하나 더 간 걸 좋아하잖아.”
“아니, 밀랍이면 되었지, 그걸 또 같은 모양이 싫다 그래? 그러면 귀족 나으리들 잡수시는 빵은 우리가 먹는 빵이랑 다른 모양인가벼?”
“하여간 귀족 나으리들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돈을 펑펑 쓰셔도 되니, 귀족들은 참 좋겠네! 우리는 촛농 흘러내리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백작님은 마님이 저러는 걸 모르시나?”
니콜라의 귓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곧 니콜라의 목소리가 되었다. 본인이 조각한 것임에도 그러했다. 나름의 신념을 갖고 행해온 일이지만, 지금껏 반대에도 굴하지 않은 채 꽉 잡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도리어 반겨지니 생각이 근간부터 흔들렸다.
도대체 왜?
니콜라의 가슴 한 켠에 의심과, 호기심과, 기대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비앙카의 뒤를 쫓아 달음박질쳤다.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니콜라의 돌발행동에 숨을 들이켰다.
그의 가느다란 손끝이 비앙카의 로브 자락에 닿을 듯 말 듯 해졌을 때, 누군가가 니콜라를 가로막았다. 비앙카의 호위로 있는 자카리의 부장, 가스파르였다. 가스파르의 단단한 손에 진로가 막혀, 니콜라는 더 이상 비앙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개의치 않았다. 멀찍이서 비앙카를 바라보는 니콜라의 시선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광인의 편집증적인 집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니콜라를 미쳤냐는 듯 바라보았다. 귀족 나으리들의 발길을 막거나, 함부로 그 뒤를 쫓는 것은 중죄였다. 모두에게서 외면 받던 초가 인정받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했지만, 니콜라는 분수를 잊었다. 어린 니콜라가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거라고 생각한 주변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뼈가 조각난 채 바닥을 뒹구는 니콜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곧 잔인하게 내쳐질 그 아이를 향해 애도의 성호를 긋는 이도 있었다.
비앙카는 느긋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기품 있고 느긋한 여유가 흘렀다. 느릿하게 돌아본 그녀의 뒤로 햇살이 비치면서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니콜라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안에서 계속 맴돌기만 하는 의문을 터트렸다.
“도대체, 도대체 왜 제 초를 쓰신다고 한 거예요? 쟝 아저씨 말대로 제 초는 오래 타지도 않고, 쉽게 녹아 없어지니 장식으로도 쓸모가 없어요. 방을 장식할 화려함은 촛대의 몫이고, 초는 방을 밝히는 것이 목적인 걸요.”
“멍청한 질문이로구나.”
비앙카는 짜증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잘 가던 중에 발걸음이 멈추게 된 것도 짜증이 나고, 그래서 멈춰 섰더니 듣는 말도 어처구니가 없다. 비앙카는 절박하게 저에게 매달리는 니콜라를 서늘하게 내리깐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만 채울 거면 무얼 먹어도 상관없지. 하지만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더 좋아지지 않니? 게다가 맛있는 음식이 예쁘게 장식이 되어있으면 더 좋지. 아름다운 걸 쓴다는 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거란다. 비록 아름다울 이유가 없고, 금방 그 모습을 잃게 된다 해도 말이야. 나는 쉽게 짜증을 내는 편이라, 이정도 소소한 일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값을 치를 만하지. 안 그런가,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