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36화 (36/192)

#36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6)

뱅상은 비앙카의 손에 들린 초만 보고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했다.

그는 자카리가 위그 자작가에서 뛰쳐나왔을 때부터 함께였고, 자카리가 아르노 성에 입성했을 당시에도 함께였다. 그때부터 지금껏 십삼여 년 간 아르노 성을 돌봐온 만큼, 그는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탁 튀어나오자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뱅상은 황당한 낯으로 니콜라와 초장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그…, 제가 주의를 주기는 했습니다만….”

초장이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역력했다. 뱅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들이 양초를 만들고 있지만, 이건 자네들 물건이 아니라 영주님의 물건이야! 이렇게 깎여나가는 만큼 양초 사용 시간이 줄어들지 않나! 어째서 진즉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그, 적당히 혼나면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저놈 고집이 쇠심줄이라 저희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습니다요. 훼손된 초를 성에 비품으로 올릴 수도 없으니….”

뱅상이 소리를 지르자 초장이가 얼른 더 변명을 늘어놓았다. 잘못 대답했다가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쓸까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대꾸는 뱅상의 속을 뒤집었다. 뱅상은 초장이를 닦달하듯 몰아세웠다.

“이렇게 훼손된 초는 어떻게 처리했지? 지금껏 비품 개수 상에는 비는 수가 없었는데?”

“마구간이나…. 저희 양초장에서 쓰기도 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한마디로 보고 없이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쉬시하며 몰래몰래 처리했다는 게 아닌가. 초를 훔치는 것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니콜라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영지에서 일하는 농노인 이상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뱅상은 초장이의 손에 귀를 붙들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니콜라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이걸 정말 네가 했니?”

그러나 뱅상은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그가 입을 떼기 무섭게 비앙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사인 그가 마님의 말을 가로막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뱅상의 입이 자연스레 닫혔지만 그의 눈은 비앙카가 무슨 말을 할까에 대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콜라는 모두가 자신을 둘러싸고 추궁하자 눈을 질끈 감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특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비앙카의 초록 눈동자가, 그를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 같아 섬뜩했다.

니콜라가 일하는 양초장은 아르노 성에서도 변방이었다. 성 중앙의 첨탑에서 거주하는 비앙카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당연히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이야기가 니콜라가 아는 전부였다.

니콜라가 아는 비앙카는 정 없고 괴팍한 여자였으며 온갖 사치를 일삼고, 아르노를 위해 항상 전쟁에 나가시는 백작님에게도 쌀쌀맞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최근에는 그녀를 거스른 하녀를 벌거벗겨 매질을 한 뒤 내쫓았는데, 그 꼴이 얼마나 참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농노들 사이에서 자자했다.

그렇게 손속에 자비가 없는 마님인 만큼, 영주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댔다며 니콜라의 손가락을 뚝뚝 꺾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손톱을 뽑거나.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웅크린 채 꽉 주먹 쥐고 파르르 떨었다.

그런 니콜라의 두려움을 모르는 비앙카는 다시 한번 니콜라에게 답을 재촉했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는 손에 들린 초에 고정된 채였다.

“정말로 네가 이걸 이렇게 만든 거니?”

차마 마님의 말을 두 번씩이나 무시할 수는 없었던 니콜라는 턱을 달달 떨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고 목은 긴장으로 뻣뻣했다. 바싹 마른 입이 타들어 가다 못해 따끔했다. 니콜라는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마른 입을 침으로 축였다. 내리깔린 눈은 누가 저에게 다가올까 바닥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사곤 했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서 힘이 좋지도 않았고, 혼자만의 세상에 골몰하기가 일쑤다 보니 빠릿빠릿하지도 못한 데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도 느렸다. 그런 그가 비품에 손을 대기까지 하니, 화가 난 초장이는 그에게 손을 올리기도 했다.

초장이는 비쩍 마른 사내였지만 어린 니콜라에게는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그는 종아리를 걷어차기도 했고, 니콜라의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다. 귓방망이가 호되게 올려붙여지고 나면 머리 골 속까지 띵하니 울렸다.

물론 초장이도 초장이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요 못된 손버릇을 초장부터 꺾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로 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정말 위험했다. 농노인 그들은 별거 아닌 일만으로도 목숨이 오가는 인생이었고, 손에 들린 이 양초 하나가 그들의 목숨줄을 옭아맬 수도 있었다. 그것이 니콜라의 목숨이든, 양초장을 책임지는 초장이 그의 목숨이든.

그렇게 걱정했건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초장이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초장이는 니콜라를 때리기도 했고 빵으로 꼬드기기도 했고, 갖은 수를 다 썼지만 니콜라는 고집이 셌다. 니콜라는 초에 장난질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니콜라는 ‘조각’한다고 하지만, 조각이라니! 물론 초장이도 니콜라가 나름 솜씨가 있고, 어쩌면 그 재능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초장이였다. 조각을 하려면 조각가의 자식이어야 했고, 비싼 재료비를 대기 위해 귀족에게 후원을 받아야만 했다. 니콜라가 세 살 때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초장이의 동료였던 또 다른 초장이였다. 니콜라는 초장이의 자식이었고, 조각가가 아닌 초장이가 되어야만 했다.

니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니콜라는 초를 조각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초장이는 그 한결같은 고집에 한 발짝 물러서서, 조각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나무에 하라며 나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니콜라에게는 초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어느 날 밤, 니콜라는 여신이 초 안에 갇혀있는 꿈을 꾸었다. 자애롭게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여신 위로 촛농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더니, 이내 여신의 머리끝까지 밀랍이 차오르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니콜라는 땀이 흠뻑 젖은 몸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저 꿈이었음에도, 니콜라는 초 속에 갇힌 여신을 꺼내드려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건 계시였다.

니콜라는 초에 갇힌 여신을 구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고, 독실한 그는 초장이의 거친 만류에도 포기하지 않은 채 고집스레 초에 매달렸다.

그리고 먼 훗날, 니콜라는 완벽하게 여신을 조각해 낸 초를 수도원에 진상하게 된다. 그 초를 받아 든 수도원의 사제는 자비롭고 위엄 있는 여신의 모습에 무척 감격하여 그 초를 교황청에 납품하게 된다. 그리고 초를 받아 든 교황 또한 니콜라의 조각에 매료되어, 그를 교단의 정식 조각가로 임명하게 된다.

그리고 니콜라는 제단에 놓을 초를 조각할 뿐 아니라, 대 예배실에 놓일 여신상을 조각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여신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들은 하나같이 여신의 자비와 관용, 희생과 경건한 위엄을 드러내는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니콜라는 뛰어난 조각가로써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나, 지금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지금의 그는 비앙카가 무슨 벌을 내릴지 몰라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농노일 뿐이었다.

초장이에게 혼이 나는 것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끽해봤자 종아리를 걷어차이거나, 등을 세게 후려 맞는 정도의 일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손가락이 다치기라도 하면…. 니콜라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러나 니콜라의 답에도 비앙카는 조용했다. 마님이 조용하니 주변 이들 또한 조용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니콜라는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침묵에 숨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마님은 무슨 표정을 짓고 계신 걸까, 어떻게 날 혼낼지 골몰하고 계신 걸까? 비앙카의 반응을 알지 못하니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니콜라는 결국 참지 못한 채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비앙카 쪽을 살폈다.

그런데 막상 비앙카를 본 니콜라는 깜짝 놀랐다. 비앙카가 니콜라가 만든 초를 이리저리 매만져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흡족한 미소를 지닌 채! 비앙카의 고운 입가에 빙긋이 걸쳐있는 호선에 니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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