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4)
뱅상이 비앙카의 꿍꿍이가 무엇일까 골몰한 것이 우습게도, 비앙카의 속셈은 별것 아니었다.
겉으로는 살랑이는 체 하며 뱅상의 뒤통수를 쳐 골탕 먹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갑자기 철이 들어 아르노 가를 책임지기 위한 대의를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자카리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찰한 결과였을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그녀의 보신(保身)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자카리가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한 발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 야심한 시간에 그녀의 침실에 찾아오더라도 사무적인 볼일이 있기 때문이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비앙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자카리와 거사를 치루기를 바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비앙카로서는 가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자카리를 어찌하겠는가? 마음만 같아서는 그의 목에 줄을 매고 침대로 질질 끌고 와서 엎어트리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체격 차가 크다 보니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비앙카로서는 자카리가 ‘그럴’ 기분이 되도록 꼬드기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역시 자카리의 취향이 되기엔 나는 너무 어린 게 아닐까. 그는 좀 더 풍만한 여인에게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앙카 자체가 그에게 있어 썩 매력적이지 못한 여자이든가….
비앙카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빈약한 가슴, 딱딱한 입가, 노려보는 듯 또렷한 눈매. 굽실거리지 않는, 직모인 머리카락은 땋아 내리기조차 힘들다. 금방 풀려버리거나, 간신히 땋는다 하더라도 볼품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색은 한겨울의 나무껍질처럼 칙칙하기 그지없는 고동색. 풍성하고 굽이치는 곱슬 어린 금발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치는 만큼, 비앙카의 외견은 부족함이 많았다.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갈 길이 구만리였다.
그래도 정치적 동반자는 될 수 있을 거야. 그가 날 찾아오지 않는 건, 그에게 내가 여전히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고.
비앙카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입맛이 당기면 식사를 하고, 아니면 거르고. 호위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몸에 걸친 것은 모두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새로 맞춘 것들. 잠이 오면 일찍 침대에 눕고, 보기 싫은 상대는 마주하지 않고.
어떻게 봐도 의무는 모두 뱅상에게 미뤄둔 채 쇼핑이나 자기 좋을 일만 하는 철부지였다. 그렇다보니 자카리는 분명 후계자 운운했던 비앙카의 제안 또한 어린아이의 치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고.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과거 자신의 행동이 현재 자신의 목을 죄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페르낭과의 일로 발목 잡혔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이런 불유쾌한 찜찜함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찰나 마주친 환영은 비앙카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도리질 쳐 들러붙는 환영을 떨쳐낸 비앙카는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자신은 페르낭과의 사랑만을 꿈꾸며 귀족 사회에서 도려내지기를 무력하게 기다리던 과거와 다르다.
창밖으로 주렁주렁 내려온 라푼젤의 머리카락이 마녀의 손에 들린 가짜라는 걸 알게 된 왕자는 가시나무 숲으로 추락하고는 장님이 된다. 비앙카는 그 왕자였다. 페르낭의 사랑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수도원으로 내쫓긴 끝에 죽었지만, 왕자가 시력을 되찾은 것처럼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기적으로 이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카리와 마주하니 괜히 초조해진 것일 뿐이야. 나에겐 아직 기회가 많아. 바꿀 수 있는 일들도 많고. 벌써 달라진 일도 있잖아. 수도에 가는 일이라거나…. 비앙카는 진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타일렀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돼.
자카리가 죽기까지 앞으로 6년. 짧지만 긴 시간이다. 자카리의 애를 낳는 것이 그녀의 재산을 지킬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아르노 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새로 옹립된 왕과 자카리의 형인 위그 자작이 그녀에게서 아르노 성과 가문을 빼앗으려 해도 호락호락 그녀를 내쫓진 못하리라.
쇠도 달구어져 있을 때 두드려야 하는 법. 굳게 추가한 비앙카는 바로 뱅상을 불렀다. 그녀가 아르노 성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뱅상만큼 적절한 사람이 없었다. 자주 성을 비우는 자카리나 다른 사람보다 이 성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앙카가 그녀의 일을 모조리 뱅상에게 미뤄두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뱅상은 유능했다.
알고 있다. 비앙카가 직접 영지를 살피게 된다 하더라도 뱅상만큼 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그녀가 열의를 보여줌으로서 뱅상과 그녀 사이에 있는 감정적 골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솔직히 뱅상과 그녀는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나름 잘 지내온 편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서로를 기꺼이 여긴다는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전생에서 비앙카가 페르낭과의 일이 트집 잡혀 아르노 성에서 내쫓기게 되었을 때, 뱅상은 그녀를 방관하였다. 비앙카 또한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희희낙락하는 마님이라니. 그쯤 되면 아마 주인에게 품은 존경심은 다 떨어졌고, 남아있는 것은 환멸뿐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때까지 품고 있을 호의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비앙카는 그런 그의 선택을 이해하는 만큼, 뱅상과의 긍정적 관계를 구축하자 결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아니라도 솔직히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의 손이라도 빌렸을 것이다. 비앙카가 걱정하는 것은 뱅상이 그녀의 제안을 쳐내는가 여부였지, 한번 그녀의 손을 놓았던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옳은지 따위가 아니었다.
다행히 뱅상은 비앙카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수상쩍어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대놓고 묻진 않았다.
뱅상으로서는 급작스러운 제안이었을 텐데도, 그는 이내 능숙하게 비앙카를 데리고 성을 순회했다. 제빵실과 양조장, 목축장 등. 비앙카가 한 번도 발걸음 해 본적 없는 곳들이었다.
제빵실에서는 장원에서 경작한 옥수수를 갈아 빵을 만들었고, 양조장에서는 술을, 목축장에서 치즈와 버터를 만들었다. 영지는 자급자족으로 운용되는 만큼, 때를 맞춰 물건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영지 살림에 신경 쓰는 이들은 자식보다도 귀하게 비품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순회하던 비앙카가 새로운 곳에 도달한 순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주춤했지만 뱅상은 거리낌 없이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은 고기 저장소입니다. 초와 베이컨을 만들죠.”
건물 안 대들보에는 소시지와 도축된 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도살장에서 도살되어 오는데도 불구하고 미처 빠지지 않은 피 냄새, 고기가 마르면서 풍기는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처음 코를 찌른 퀴퀴한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비앙카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고기 저장소에서 일하는 이들은 뱅상에게 아부라도 하듯 굽실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비앙카를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하는 생각이 그들의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 척 봐도 이질적인 귀한 옷차림, 깨끗하게 정돈된 손끝과 귀 뒤, 목은 가늘고 시선은 곧다. 어딜 보아도 귀족 마나님이었다.
그리고 이 성에서 귀족 여성은 단 한 사람뿐이다.
본성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몰라도, 성 가장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은 비앙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들이 부기지수였다. 그들로서는 본성에 들락날락할 일이 없고, 비앙카 또한 본성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야 비앙카의 정체를 깨달은 그들은 놀라움과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마님이 여기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비앙카에게 밉보인 하녀가 어떻게 쫓겨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번져 있던 뒤였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동자에는 심지어 적대심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비앙카에겐 그런 사용인들의 반응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비앙카는 개의치 않고 꼿꼿이 발을 옮겼다. 제빵실에서도, 양조장에서도. 이와 같은 시선을 이미 몇 번이고 받은 뒤였다. 그렇지만 이본느는 내심 걱정되는지, 불안한 눈길로 비앙카를 흘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