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3)
자카리는 그런 부하들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무척 고맙다고도 했어.”
자카리의 시선이 멀어졌다. 검은 눈동자는 물먹은 머루처럼 아련했다. 그는 어제의 일을 곱씹는 듯, 했던 말을 조용히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이내 쿡쿡 웃기까지 했다. 소리 내어 웃는 자카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가신들은 자신들이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귀신에 홀린 것이던가.
그만큼 자카리의 행동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가신들은 당혹스러움을 쉽게 감추지 못한 채 입만 뻐끔였다.
먼저 용기를 내어 나선 것은 로베르였다. 그는 눈에서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저, 백작님…. 실례지만, 마님께서 정말 그렇게 답하셨습니까?”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한 질문이로군.”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자카리의 대답에 로베르는 재깍 고개를 숙였다. 자카리가 저리 나오는 걸 보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의 주군이 거짓으로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면 정말로 마님이 수도 행에 찬성했단 말인데…. 지금껏 현실 도피하듯 외면했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지 그들은 괜히 뱃가죽을 슥슥 긁었다.
우왕좌왕하는 부하들의 심정을 뻔히 읽은 자카리는 불쾌해하며 혀를 찼다. 이게 그리도 믿기지 못할 일이란 말인가? 자카리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좌우지간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게. 내년 수도 행에는 그녀도 함께야.”
자카리의 말은 확고부동했다. 결과가 뒤바뀔 리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부하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종달새를 잡을 수 있다지만, 그것도 종달새가 눈에 보일 때의 이야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들은 희망이 없는 현실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르노 성을 지키느라 수도에 가지 않는 뱅상만이 빙긋 웃으며, ‘그럼 저는 혼자 성을 지키게 되겠네요.’라 덧붙였다. 괜히 억울해진 로베르와 소뵈르는 뱅상을 씨근덕 노려보았지만, 뱅상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좋은 여행 되시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그 미소가 퍽 천연덕스러워, 두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 * *
로베르와 소뵈르 앞에서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뱅상의 속에서도 의심 한 가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카리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보였던 그녀의 이상행동들. 분명 그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언제나와 같았다….
이본느라는 시녀를 곁에 두게 된 것도 그랬다. 앙트의 일로 이본느가 비앙카의 눈에 든 모양인데, 지금껏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던 그녀가 고작 그런 일로 이본느를 전담 시녀로 삼았다니? 그것도 자카리가 돌아오자마자.
딱 봐도 미심쩍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님에게 보여주기 식의 관계가 분명하다. 뱅상은 잘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시녀를 곁에 두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노련한 뱅상이라 할지라도 선뜻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뭔가 꿍꿍이가 있어.’
뱅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얇은 입술이 비틀리며 코밑에 가지런히 난 콧수염이 비틀렸다.
이렇게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백작님은 그녀의 행동이 의심스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기는커녕 심중을 짐작할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일 뿐이었다. 거기에 호위니 수도니 하는 소리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런 백작님의 행동은 뱅상의 마음에 짐을 한 덩이 더 얹었다.
지금껏 십여 년 동안 한결 같았던 그들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동시에 손바닥을 훼까닥 뒤집어 버렸다. 가신 된 입장에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답답했다.
마님이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백작님은 그런 마님에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 무슨 감언이설로 백작님을 속여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뱅상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뱅상은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의 앞에 섰다.
갑자기 오늘 아침 호출이 있었다. 보통 비앙카가 그를 부르는 이유는 새로운 사치품을 사기 위해서였던 만큼 뱅상은 혀를 찼다. 아르노 가를 위하느니 뭐라느니. 역시 거짓말이다. 언뜻 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본질은 그대로였다…, 라고 뱅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뱅상의 생각을 비웃듯, 비앙카가 건넨 말은 뱅상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뱅상은 비앙카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직은 정정하다 생각했는데, 나이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뱅상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내가 이제 나이가 찼으니, 아르노 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나둘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말했네.”
“…….”
비앙카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반복했다. 두 번째 듣는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얼떨떨하다. 뱅상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가, 혹여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이것저것 재보며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푹신한 쿠션이 얹어진 의자에 앉아 뱅상을 올려다보는 비앙카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비앙카는 뱅상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물끄럼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지만, 도통 비앙카를 믿을 수 없으니 쉽사리 그리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뱅상은 비앙카의 가는 어깨를 잡고 탈탈 털어서라도 진실을 듣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불경스러운 행동이지만, 그렇게라도 저 조막만 한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뱅상은 그럴만한 위치가 되지 않았다. 비앙카의 진심을 가늠하듯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뱅상은 결국 혀를 찼다.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비앙카가 지금껏 방치해두었던 의무를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마님께서는 일꾼을 고용한다거나 농사일, 시장의 물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시니…. 일꾼의 관리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직원들의 봉급을 비롯한 성의 예산에 대해서는 제가 기록한 문서를 드리겠습니다. 문서를 보고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신 뒤에 실권을 잡으셔도 될 것입니다. 어차피 내년에는 성을 비우시니까요. 본격적인 일들은 수도에서 돌아오신 뒤 지휘하셔도 될 것입니다.”
“내 남편이 믿는 그대를 믿네. 그대에게 전부 맡길 테니 부탁하네.”
비앙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수긍하는 태도는 까탈스러움이 없었지만, 오히려 더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차라리 뱅상의 일에 트집 잡고 못마땅해 할 때가 더 대꾸하기 쉬웠다. 뱅상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에라도 성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좋네. 옷차림을 정돈할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게. 이본느.”
“네, 마님.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방 한 구석에 있던 이본느는 비앙카의 부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냉큼 그녀에게 달려왔다. 위에 걸칠 외투를 비롯하여 옷가지를 챙기던 그녀는 오도카니 서있는 뱅상을 흘끔 보았다. 뱅상은 항시 냉정하고 단호하여 하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외시되었는데, 오늘은 그런 그답지 않게 멍한 모습에 이본느는 고개를 갸웃였다.
이본느는 꿈쩍도 않는 뱅상에게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 집사님. 마님께서 치장하셔야 하는지라….”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뱅상은 뒤늦게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무리 얼떨떨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아서야! 아르노 성을 책임지는 집사답지 못한 노릇이었다. 뱅상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마님이 안주인으로서의 일을 배우겠다니!
비앙카의 방문 앞에는 가스파르가 기둥처럼 고요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뱅상은 가스파르를 흘끔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호위로 발탁되고 난 뒤, 가스파르는 항시 비앙카의 곁을 지켰다. 혹시 가스파르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뱅상은 넌지시 물었다.
“가스파르 경, 마님께서 최근 심경에 변동이 있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요?”
“딱히 없었습니다.”
가스파르의 답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뱅상도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던 것이지만, 가스파르의 답은 일말의 희망조차 송두리째 뽑아버릴 듯 단호했다. 그러면 그렇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스파르 경에게 유의미한 대답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뱅상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한숨은 아까보다 더욱 깊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