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27화 (27/192)

#27 동상이몽(7)

결국 비앙카는 시녀들을 모두 쓸모없다 내치고는 자신이 시키는 일 외에는 간섭을 금했다. 곁에 아무도 두지 않은 채, 그녀의 방 청소나 식사를 날라주는 시녀들마저도 주기적으로 교체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비앙카는 이본느가 몸종처럼 옆에서 챙겨주는 일이 낯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거추장스러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즐겁기까지 했다.

이본느의 꼼꼼한 손길 아래 비앙카의 옷차림이 단단히 여며졌고, 밍크 털을 덧댄 가죽 장갑을 낀 손에는 따듯한 손화로가 들렸다. 온기가 퍼지며, 관절관절 얼음이 끼인 것처럼 삐그덕 거렸던 몸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따듯함이 주는 만족스러움에 낮게 탄식한 비앙카는, 그제서야 이본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시가 삐죽이 나온 모직 치마는 성겨보였으며 속에 덧대어 입은 듯한 면옷도 얇디얇았다. 잘 보니 속에 입은 천은 한두 겹이 아니었다. 걸칠 수 있는 모든 옷을 걸친 듯한 모양새다. 나름 고육지책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효과가 좋아보이지는 않았으며, 보기에도 추레했다. 뒤늦게 이본느의 차림새를 깨달은 비앙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옷이 이게 뭐니?”

“다들 이렇게 입고 다녀요. 저는 마님과 달리 튼튼하니까요.”

이본느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튼튼하다며 팔뚝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치는데, 그 손끝의 살갗은 추위에 부르터 있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이본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본느도 놀랐지만, 손을 잡은 비앙카도 놀랐다. 비앙카는 당혹감을 숨기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코끝도 빨갛지 않니. 그리고 다른 하녀들은 너처럼 입지 않아. 어제 나한테 건방지게 굴던 하녀만 해도 훨씬 좋은 옷을 입고 있었는걸. 혹시 성에서 받는 돈이 부족하니?”

“그런 게 아니에요.”

이본느보다 손바닥 반 뼘만큼 작은 비앙카가 이본느를 걱정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앙카는 열여섯이요, 이본느는 스물하나였으니 틀린 바는 아니었다.

이본느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의 동생 같은 비앙카에게 이왕이면 좋은 이미지로 보이고 싶은데, 가정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마치 자신이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노리고 비앙카에게 접근한 것처럼 느껴질까 두려웠다.

게다가 곁에 있는 이는 철벽의 기사, 가스파르 경이 아니던가. 아르노 백작님의 삼익三翼 중 하나. 성의 하녀들이라면 모두가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내 중 하나인 만큼, 그에게까지 자신의 가정 사정을 밝히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건 그저 제 체면치레일 뿐이다. 정말 별 거 아닌 이유인 만큼, 뭐라도 되는 듯이 숨기는 것도 우스웠다. 부끄러움에 귀가 빨개졌지만, 이본느는 더듬거리면서도 용기있게 말했다.

“집에 가족이 많아서 종종 돈을 보내곤 해요. 근데 이번 겨울에 땔감이 부족하다고 해서 좀 더 보냈거든요.”

“조금 더 보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이번에 겨울옷을 새로 맞출 돈이었어요. 그래도 원래 있던 겨울옷도 있고 해서 이번 년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겨울옷이 아니잖니. 그러고 보니 어제 입고 있던 옷은 오늘만치 얇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어제 옷은 어디 갔니?”

“…….”

조목조목 파고드는 비앙카의 말에 이본느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본느가 거짓말을 한건 아니었다. 그저 곤란스러운 사실을 침묵으로서 숨길 뿐이었지. 이본느는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말로 비앙카의 심기를 거슬러 쫓겨난 앙트는 하녀들 사이에서 제법 친구가 많았다. 예쁜 얼굴과 거침없는 태도는 또래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남자들은 예쁜 앙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앙트보다 나이 많은 이들은 앙크가 되바라졌다며, 진중함을 배워야 한다 한소리 덧붙이지만 내심 앙트에게 무른 구석도 있었다. 하물며 아르노 성에 발걸음 하는 귀족 나으리들 중 몇몇이 앙트에게 치근덕거리기도 했다. 아르노 백작의 체면을 보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 자신의 성으로 오는 게 어떠하느냐 달콤한 소리를 건네며 앙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앙트가 주제 모르고 백작님의 마음을 사로 잡겠다 공공연히 목소리를 높인 데에는 아마 항상 그녀에게 쏟아져 내리는 호의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좌우지간 앙트는 친구가 많았다. 앙트가 쫓겨난 뒤, 하녀들은 다들 이본느가 앙트를 배신하고 마님에게 붙어서 알랑거린다고 수군거렸다.

‘약삭빠른 계집애. 그렇게 마님에게 아부해대서 뭐 하나 받을 줄 알고? 마님이 곁에 사람을 두는 것 봤어? 소용없는 짓이야. 너는 욕심에 동료를 판 거야. 배신자!’

이본느가 한 짓은 앙트를 배신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하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앙트를 때린 것은 마님이요, 내쫓으라 명령한 것은 영주님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원인은 앙트의 가벼운 입이었다.

하지만 하녀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마님과 영주님은 까마득한 이들이었고, 앙트는 친구일 뿐이었다. 친구의 허물을 모르는 척 눈을 감은 그들은 이본느의 하나뿐이던 겨울옷에 부지깽이를 드리웠다.

‘한번 마님에게 일러 보시지? 마님은 휘둘리는 걸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지. 네가 혹시라도 마님을 이용해서 무언가 하려는 듯한 낌새를 느끼시면, 너도 앙트처럼 쫓겨날걸? 차라리 그렇게라도 앙트의 뒤를 따르는 건 어때?’

부지깽이가 앙트의 옷에 닿았고, 천이 까맣게 그으르며 오그라 들더니 크게 구멍이 났다. 그들은 다시 한번 동료를 팔았다가는 큰일 날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고는 총총 사라졌다.

만약 비앙카의 장악력이 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녀를 총괄하는 것은 비앙카로부터 전권을 받은 뱅상이었고, 그녀들은 이정도의 일로 굳이 비앙카가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본느는 그나마 이정도에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옷을 숨기거나 오물을 모아둔 곳에 던지거나, 날붙이로 갈기갈기 찢었더라면 정말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이정도 구멍이라면 다른 천을 기워서 입으면 괜찮다. 이본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당장 오늘 그 옷을 기워 입고 오기엔 시간도, 자투리 천도 부족했다. 하녀들에게 주어지는 양초는 무척 조금이었고, 달빛에 의존하여 바느질을 하기엔 방이 너무나 깜깜했다.

비앙카는 한참 머뭇거리기만 할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이본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지, 이본느를 질책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돌리듯 자신의 담비털 외투를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담비 털 외투를 사고 나서부터는, 회색 다람쥐 털로 된 외투는 전혀 입지를 않았구나.”

“회색 다람쥐 털도 좋은 모피지만, 아무래도 담비 털이나 여우 털에 비할 바는 아니죠. 마님께도 이런 것들이 더 잘 어울리세요.”

회색 다람쥐 털은 가성비가 좋은 모피였지만 확실히 담비 털에 비한다면 저렴한 제품이었다. 비앙카가 블랑쉐포르 가에 있었을 때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물건이었다. 아르노 가로 시집오던 당시에는 혼수로 들고 온 모피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비앙카가 자라자 갖고 있는 모피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아르노 가는 한참 이어지는 전쟁으로 돈이 없었다. 지금이야 흰 여우 모피도 너끈히 구해온다지만, 그 당시의 아르노 가의 재정 상황으로는 회색 다람쥐 털 정도가 한계였다.

지금의 비앙카는 이미 많은 고급 모피가 있었다. 더이상 회색 다람쥐 털 모피를 걸치지 않아도 된다. 아마 그 모피는 궤짝 속에서 평생을 썩어갈 것이다. 비앙카는 심드렁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회색 다람쥐 털로 지은 외투를 전혀 입지 않을 것 같은데. 네가 처분하렴.”

“네?”

“나는 안 입으니까. 내가 그런 걸 어찌 입겠니? 올해는 흰여우 모피도 샀으니까 더 입을 일이 없을 것 같구나. 너나 입던지, 아니면 버리던지. 나는 그래도 네가 입었으면 좋겠구나. 내 수발을 들기도 전부터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잖니? 넌 내 시녀니까.”

비앙카는 쏘아 붙이듯 일부러 퉁명스레 말하고는 홱 돌아섰다. 턱끝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작은 등에는 다른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고집이 서려있었다.

지금 마님께서, 날 생각해주신 거야?

이본느는 눈을 껌뻑였다. 회색 다람쥐 털은 비앙카의 입장에서야 저렴할 뿐, 평민인 이본느의 입장에서는 일 년치 봉급을 털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본느를 정말로 감동시킨 것은 귀한 모피가 생겼다는 것보다, 계속 그녀를 곁에 둘 거라는 암시한 듯한 비앙카의 말이었다.

시녀. 멀리서 잡일을 하는 하녀와 달리, 주인의 바로 곁에서 주인을 보필할 수 있는 자리였다. 분명 비앙카는 이본느를 ‘내 시녀’라고 했다….

“…갑시다.”

넋을 놓고 비앙카의 등을 따라보던 이본느는 갑작스레 건네진 가스파르의 말에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가스파르는 짙은 밤하늘과 같은 눈동자로 이본느를 빤히 내려 보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 비앙카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본느는 치맛단을 잡은 채 화닥닥 그들의 뒤를 쫓았다. 피부에 스며드는 추위는 어느새 잊혀진 뒤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