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동상이몽(6)
아침나절부터 대거리를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머무른 지 오래된 만큼, 타인과 이야기를 섞는 것 자체만으로도 비앙카의 체력이 뚝뚝 떨어졌다. 특히 상대가 지금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이라면 더더욱.
자카리에게 아양 떨 생각까지는 없지만, 비앙카는 최대한 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우호적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선 자신의 성격을 다소 죽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앙카는 감시니 뭐니 하며 비아냥거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게다가 자카리와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부하들이 보고 있는 와중 아니던가. 가신들이 보고 있는 와중 아내가 그의 체면을 깎아 내리는 것은 자카리라 할지라도 불같이 화를 낼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비앙카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가스파르를 호위로 삼은 뒤 후다닥 그 자리를 떴다.
복도에 나서고 나서야 작게나마 한숨 쉴 여유가 생겼다. 비앙카는 어지러운 머리를 떨쳐내려는 듯 발을 옮겼다.
비앙카를 따라 나선 이본느는 비앙카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 챘다. 이본느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그래. 바깥 공기를 좀 쐬면 괜찮아 질 것 같구나.”
비앙카는 우아하게 고개를 흔들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눈가에 드리운 피곤함을 읽은 이본느는 재빨리 덧붙였다.
“밖은 추워요. 장갑이랑 외투, 손화로를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마.”
안 그래도 미처 외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홧김에 자리를 떴다 보니 옷이 좀 얇았다. 비앙카의 팔뚝을 타고 소름이 으슬으슬 올라왔다. 눈치 빠른 이본느의 제안이 기꺼웠던 비앙카는 흔쾌히 그녀를 물렸다. 이본느는 자카리와 다른 부단장들이 머물러 있을 접견실이 아닌, 비앙카의 옷이 있는 침실을 향해 발을 재촉했다.
혼자 남은 비앙카는 양 팔꿈치를 끌어안듯 잡았다. 우플랑드 특유의 넓은 소매가 손끝에 닿는 차가운 추위를 조금이나마 가려주었다.
우플랑드는 수도의 유행에서 조금 뒤처진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비앙카가 입고 있는 것은 고급인 만큼 촌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옛 된 기품이 느껴졌다. 귀 밑까지 높게 세운 칼라가 흰 사슴처럼 가늘고 긴 목을, 풍성한 품이 호리호리한 체형을 맵시 있게 감싸며 자연스럽게 주름졌다. 옷 가장자리에는 모피를 둘렀고, 카라부터 가슴팍까지는 보석과 자수로 치장되었으며, 섬세하게 조각된 금장 허리띠가 그녀의 골반 위에 늘어졌다.
비앙카가 이본느를 기다리고 있던 찰나, 뒤에서 저벅이는 남자 걸음이 들려왔다. 가스파르였다.
“…….”
비앙카는 그를 흘끗 봤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가스파르 또한 그런 취급을 예상한 듯, 무덤덤히 그녀의 뒤에 섰다.
복도에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 벽의 틈을 트고 찬바람이 스산히 불어와 비앙카의 치맛자락에 휘감겼다.
가스파르는 짐작만큼이나 묵묵한 사내였다. 미동조차 없으니, 오히려 더 거슬렸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단단한 턱. 커다란 덩치. 먹구름이 끼인 것 같은 짙은 회색 머리카락과 밤하늘 같은 남색 눈동자는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절대 가벼운 인상의 사내는 아니었다. 한번 보고 무시할 만큼 가벼운 존재감도 아니었다. 애초 계획했던 것처럼 그가 없는 척 구는 것도 힘들었다. 비앙카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본느가 빨리 돌아와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손화로까지 챙겨오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비앙카는 한숨과 함께 가스파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남색 눈동자가 비앙카를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앞으로 함께 할 이이니 만큼, 서로가 상대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비앙카 혼자만의 생각일지라도. 비앙카는 조곤히 입을 열었다.
“난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건지 모르겠군.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닐 텐데.”
“…….”
“솔직히 자네가 지원해서 한시름 덜었기도 했다네. 나도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 같은 이를 곁에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떤 말을 걸어도 비앙카 혼잣말일 뿐이었다. 가스파르가 비앙카의 말에 화답하듯 남색 눈동자를 껌뻑이지 않았더라면, 비앙카는 그가 듣고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비앙카도 답신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제 할 말을 전부한 비앙카는 이제 일 없다는 듯 가스파르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다행입니다.”
마님께서 절 받아들여주셔서. 가스파르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존재감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이 희뿌열 뿐이었다. 가스파르가 무언가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비앙카는 화들짝 놀랐으나, 그런 기색을 애써 감춘 채 슬그머니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고, 비앙카는 아까와 같이 덤덤한 그의 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비앙카가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때마침 이본느가 산더미처럼 모피와 다른 물건들을 이것저것 부랴부랴 짊어진 채 종종 달려왔다. 비앙카는 가스파르에게 궁금했던 점을 묻는 대신 이본느를 돌아보며 반겼다.
“마님, 많이 추우셨죠? 여기 외투를 가져왔어요…!”
비앙카의 옷가지를 든 이본느가 활짝 웃으며 비앙카에게로 다가왔다. 이본느는 아마 이 성에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호의를 가진 이일 것이다. 그녀의 밀빛 머리카락에 겨울 햇살이 반사되는 것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졌다.
이본느가 비앙카로부터 비스듬히 뒤에 서있는 가스파르를 보기가 무섭게, 그녀의 활짝 웃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어떻게 가스파르를 대해야할지 모르겠는 듯한 난감함이 절로 느껴졌다. 그런 어색한 그녀의 심정에 동감하는 만큼, 비앙카는 모르는 척 이본느를 재촉했다.
“그래. 어서 오거라. 역시 좀 춥구나.”
“오늘 붉은 우플랑드를 입으셨기에 검은 외투로 가져와봤어요.”
“좋아. 이 외투는 퍽 따듯하지. 검은 담비 털이 덧대어져 있거든. 작년 겨울에 산 거야.”
“정말 윤기가 자르르해요.”
이본느는 비앙카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며 호들갑스레 맞장구쳤다. 물론 비앙카의 외투는 그만큼 좋은 물건이기도 했다. 비앙카가 걸치는 옷들은 유행에서 뒤처질지언정 품질은 수도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좋았다. 비앙카는 싱긋 웃으며 담비 털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흰 손등에 검은 털이 사르르르 스치고 지나갔다.
비앙카는 이본느와 이야기 하며 흘끔 가스파르를 곁눈질 했다. 솔직히 가스파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자카리의 가신들은 보통 비앙카가 사치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뱅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물건을 사다 주고, 가끔은 비앙카가 놓친 것까지 꼼꼼히 정리 해주지만 그뿐이었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사치를 허락했으니 들어줄 뿐이라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비앙카는 그런 태도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주 볼 얼굴도 아니고. 애초에 로베르처럼 대놓고 뭐라 하는 경우는 열외로 쳤다.
그러나 가스파르는 앞으로 자주 볼 상대가 아니던가. 이런 작은 일 하나서부터 속마음을 감추지 못해 신경에 거슬린다면 앞으로는 뻔할 뻔 자였다.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보인다면 그걸 꼬투리 잡아 자카리에게 물려달라 말할 생각이었다.
비앙카가 본 가스파르는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아까 자카리와 함께 찾아왔을 때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말수가 없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어지간하다.
비앙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술의 틈을 타고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번져나갔다. 비앙카의 그런 태도가 무언가 준비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라 착각한 이본느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님, 춥지 않으세요?”
“이렇게 껴입었는데. 추울 리가.”
비앙카는 살짝 웃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일일이 신경써주는 일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유모 잔이 죽고 나서, 그녀를 대신해 비앙카를 수발 들기 위해 온 시녀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비앙카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않고 일처리를 못마땅하게 하기가 일쑤였다. 비앙카가 입고 싶은 옷에 이것은 마님께 어울리지 않는다느니, 너무 과한 옷이라느니 하나하나 훈수를 두기도 했다.
머리를 한쪽만 땋으라는 비앙카의 말을 무시하고 양쪽을 땋거나, 자기 전에 꿀물을 마시곤 하는 비앙카에게 몸에 안 좋다며 우유를 대신 주기도 했다. 하나하나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이지만 계속해서 쌓이다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비앙카와 하루, 이틀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어오르는 횟수는 더욱 번번히 일어났다. 아직 어린 소녀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비앙카는 어렸을 때부터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고집이 엄청난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