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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장사-24화 (24/192)

#24 동상이몽(4)

뱅상이 알겠다 하였음에도 자카리는 안심하지 못한 듯 걱정스러운 낯을 지우지 못했다. 자카리의 손가락이 다시 타닥타닥,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면, 방에 틀어박히기 전에는 별일 없었나?”

“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말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뱅상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었다. 마님이 방에 틀어박힌 날은 어땠더라. 방금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지만 차근차근 떠올리니 기억이 실마리가 되어 술술 떠올랐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식사는 입에 맞지 않는다며 거르고, 산책을 한 뒤 낮잠을 잤다…. 그러더니 돌연 방에 틀어박혀서 소리를 내질렀다. 항상 조용하고 귀족으로서의 품격을 중시하는 마님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알았지만, 뱅상은 그저 그녀가 변덕을 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정확히는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에 가까웠다. 그녀의 변덕에 맞춰 줄 만큼 그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여튼 뱅상이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갑자기 방에 틀어박히기 직전까지의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카리로서는 별 다른 일 없었다는 뱅상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방에 틀어박히고, 자카리에게 후계자를 갖자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무언가 기점이 되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뱅상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일 뿐이겠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 누가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속삭였든지….”

“마님은 항상 혼자셨습니다만.”

“그러면 혼자 있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나보군.”

뱅상의 끼어듦에도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할 뿐이었다.

평소 자카리는 비앙카에 관한 일만큼은 그녀 원하는 대로 들어줘라, 하고 가볍게 넘길 뿐, 깊게 생각하는 바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백작마님은 도대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신걸까. 뱅상과 자카리의 대담을 곁에서 듣고 있던 로베르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결국 결론은….

“그, 그래서 수도까지 데려가신다구요?”

“그럴 생각이야. 예술품이나 가구 구경을 좋아하니까, 수도에 가는 것도 좋아할 게야. 사고 싶은 것도 잔뜩 사게 하면 기분이 좀 풀리겠지.”

좋아하는 것을 실컷 보고, 하면 그가 그녀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자카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자신의 결정이 썩 괜찮다고 여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자카리 뿐이었다. 뱅상과 로베르, 심지어 눈치가 없는 소뵈르 마저도 자카리의 생각이 썩 탐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백작님의 착각이 아닐까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수도 여행? 절대 백작 마님이 좋아할만한 일정이 아니다. 애초에 비앙카가 수도 여행을 갈망했더라면 진즉 가도 갔을 것이다. 자카리가 전쟁 중이든 아니든 사람을 차출하고 인력을 모아서. 하지만 지금껏 그녀는 꿈쩍도 안했다. 하물며 수도 보다 가까운 블랑쉐포르 가에도 간 적이 없다. 그 이야기인 즉슨, 그녀는 성 밖에 나가는 일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뜻이었다!

머뭇거리던 소뵈르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냥 그대로 말해주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마님께서 수도로 올라가시는 걸 반기지 않으실 수도 있고.”

“…별로 안 좋아하려나?”

소뵈르의 제안에 자카리는 침중함에 끙, 혀를 찼다. 생각도 못 해본 듯한 모양이었다. 자카리는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은회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자카리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긴, 반 년 동안이나 내 얼굴을 마주해야하니 썩 좋진 않겠지.”

“아니,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 건 아니고….”

소뵈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카리를 위로하려 했지만, 말에 진심이 섞이지 않았다 보니 말이 흐려졌다. 소베르의 입가가 파들 떨렸다. 자카리는 소뵈르의 변명은 듣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역시 한번 물어보기는 해야겠군….”

“그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혹시 수도에 갔다가 다른 귀족들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큰일이니까요. 마님께서 백작님의 체면을 거기까지 생각해 주실 리도 없고….”

로베르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무리 정략결혼인 걸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대놓고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던가. 연회장이나 다른 귀족들 앞에서나마 살가운 척 연기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비앙카는 그럴 여자가 아니었다. 솔직히 로베르는 비앙카와 수도에 가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말끝에 묻어나는 비앙카에 대한 적대감에 자카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카리는 정색한 채 짧지만 단호하게 로베르를 질책했다.

“로베르.”

“…실언했습니다.”

로베르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평소였다면 자카리의 앞에서 비앙카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입조심을 했을 텐데, 최근 앙트의 일로 비앙카와 대면했던 이후로 쉽게 불뚝이는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일은 확실히 그 하녀의 잘못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상대의 뺨을 향해 거침없이 회초리를 내지르던 그녀의 행동이 옹호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는 백작부인이었던 만큼 옹호되지 않을 이유도 없었지만, 한번 심기에 거슬리고 나니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나는 자네를 신임하고 있어, 로베르. 그런 만큼 이런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로 내 신의를 깎아내지 말게.”

“…네.”

로베르는 느릿하게 답했다. 자신이 자카리를 보필해온 기간은 비앙카가 자카리와 결혼한 기간보다도 더 길다. 그 동안 그는 전쟁통에서 자카리의 등 뒤를 지켰고, 그의 검으로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비앙카의 일로 자카리의 신의를 깎게 된다니, 이 어찌 우습지 아니한 일인가!

비앙카가 제대로 된 영주의 아내답다면 또 모를까, 그녀는 영주의 아내로서의 모든 일을 뱅상에게 미뤄두고 사치에 골몰하는 여자가 아닌가. 로베르의 얼굴이 침통함으로 일그러졌다.

‘하여간 로베르 저놈은 꼭 한마디 더 해서 빈축을 산다니까.’

소뵈르는 혀를 쯧쯧 찼다. 가스파르는 필요한 말조차 하지 않고, 로뵈르는 자카리에 대한 걱정으로 쓸데없는 말까지 지껄인다. 역시 내가 제일 낫다니까. 소뵈르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화자찬했다.

어차피 자카리는 남들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필요한 조언이라면 충분히 새겨듣지만, 이미 결론 내린 일에 대해서는 자기 멋대로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적인 성질이 있다. 그만큼 자기주장이 강하니 수도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도 무시한 채 방랑기사로서 뛰쳐나온 것일 테지.

그리고 그 자카리조차 꺾지 못하는 게 비앙카의 고집이었다. 결국 가신인 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비앙카가 못 가겠다고 버텨주거나, 그게 아니면 자카리의 명대로 비앙카를 모시고 수도로 가야겠지. 그들이 무어라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소뵈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긴 했다. 분명 마차가 흔들린다, 티타임 따위는 없냐, 여관의 침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잔뜩 투덜댈 테지. 차라리 그녀가 결혼하러 왔던 일곱 살일 때는 작고 귀엽기라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작은 건 마찬가지지만, 지금의 그녀는 열여섯이 아닌가. 안 그래도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던 여자가 더 예민하고 까탈스러워 지는 나이.

맞아. 비앙카는 열여섯이다. 한창 여자로 피어오르는 나이. 아이를 갖기 충분한 나이….

그래! 후계자!

소뵈르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짝, 쳤다. 세쌍의 눈총이 모조리 소뵈르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소뵈르?”

“네? 아뇨. 하하…. 마님을 모시고 수도에 갈 생각을 하니 의욕이 샘솟아서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기합을 넣고 있었습니다!”

로베르는 미쳤냐는 듯 경악에 찬 눈길로 소뵈르를 보았다. 자카리 또한 소뵈르의 말을 썩 믿지는 않아보였다. 자카리의 짙은 눈썹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 하하. 하하하…. 소뵈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믿어주지 않으리란 걸 뻔히 알았지만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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