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22화 (22/192)

#22 동상이몽(2)

“마님의 호위가 되겠습니다.”

“가스파르, 네가?”

“올해도 농담 한 번 없이 지나가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지. 이런 장소에서 농담하는 거 아냐.”

“…….”

어지간히도 깜짝 놀랐는지, 로베르와 소뵈르가 퍼드득 뛰며 물었다. 지금껏 말 못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이 거짓말인 듯, 농담하지 말라는 소뵈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가스파르가 정말로 호위 임무를 하고 싶어 하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절대 반겨서 택할만한 임무는 아니다. 마님의 호위라니. 눈칫밥은 눈칫밥 대로 먹고, 무시는 무시대로 당하고, 성가신 일이란 일은 전부 독차지할 게 뻔했다. 아무리 앙트가 주제를 넘었다 하나 손수 뺨을 올려붙이는 그 성정을 보아할 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란 게 눈에 뻔히 보였다.

동료들의 걱정에도 가스파르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농담하지 말라느니 해도, 로베르나 소뵈르가 나설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가스파르에게는 비앙카의 호위를 맡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스파르는 고개를 들어 자카리를 보았다. 자카리 또한 가스파르를 마주보았다. 침묵 아래 남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자카리의 눈빛은 아내의 호위를 자처한 충직한 부하를 본다기엔 지나치게 건조했다. 자카리의 까만 눈동자는 가스파르가 무슨 생각으로 호위를 지원한 것인지, 그 내심을 살피고 있었다.

그 의도를 뻔히 느꼈음에도 가스파르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철벽의 기사라는 위명에 부끄럽게도, 차마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스파르는 흘끗,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은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비앙카의 목소리만이 가볍고 산뜻했다.

“가스파르 경이라면 저도 좋아요.”

“…정말 괜찮나?”

자카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앙카의 호위를 억지로 들이민 건 자카리 본인이면서, 막상 호위로 가스파르가 선택되니 썩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다. 무언가 임무에 적당하지 않은 걸까. 하지만 비앙카의 입장에서 가스파르는 반색을 하고 반길만한 상대였다.

비앙카가 본 가스파르는 항시 과묵하고 말이 없는 사내였다. 실제로 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다. 가스파르의 커다란 덩치는 쉽게 눈에 잡히는지라 없는 듯 구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소리로서 표출해내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감시자라면, 조금이라도 덜 불편한 상대가 좋겠지. 가식덩어리인 로베르나, 무례한 소뵈르를 곁에 두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가스파르가 나서지 않았다 해도 비앙카는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비앙카는 생긋 웃으며, 자신은 이 결정에 불만이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네. 시끄럽지 않잖아요.”

“…….”

자카리는 납득하지 못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한참동안 비앙카를 바라만보고 있었다. 무언가 파악해 내려는 듯이.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던지. 도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싱긋 올라갔던 비앙카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하여튼 감시자, 아니, 호위도 골랐겠다. 그러면 이제 이 불편한 장소에서 떠나도 될 것이다.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비앙카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저는 이만.”

비앙카는 산뜻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본느 또한 자카리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비앙카의 뒤를 따랐다.

총총 사라지는 비앙카의 가는 뒷모습을 주시하던 자카리는 가스파르를 향해 턱 끝을 까닥였다. 따라가라는 주인의 뜻을 읽은 가스파르는 절도 있는 경례를 올린 뒤 비앙카의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가스파르의 구두굽 소리가 비앙카의 뒤를 따라 멀어졌다.

주인이 사라진 방에 사내들이 오래 남아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자카리와 로베르, 소뵈르 또한 바로 방을 나섰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자카리의 집무실으로 향했다. 자카리에게 검수 받아야 하는 서류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뱅상이 그들을 맞이했다.

“가스파르 님이 호위가 되신 모양이로군요.”

“가스파르로 괜찮을지….”

“요령이 없다보니, 마님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고.”

안 그래도 까칠한 걸로 유명한 백작 마님이다. 여자와는 생판 인연이 없는 가스파르가 상대하기에 너무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로베르와 소뵈르가 연달아 걱정과 우려를 드러냈다.

그런 부하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자카리는 책상 근처로 향하며 피식 웃었다.

“말은 그러면서도, 자신이 맡겠단 소리는 하지 않는군.”

“…….”

“가스파르는 잘 해내겠지. 자신이 하겠다 나선 일에선 실망시키지 않는 사내니까.”

말로는 두둔하지만, 그리 말하는 자카리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나서지 않았던 소뵈르와 로베르를 지탄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스파르가 나선 것을 불쾌해하는지 알 수 없던 소뵈르와 로베르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바닥으로 내리 꽂았다.

뱅상이 의자를 빼주었지만, 자카리는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창 너머를 흘끗 보았다. 그의 집무실에서는 비앙카가 종종 거닐곤 하는 정원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옷을 단단히 차려입은 비앙카가 성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입김이 뽀얗게 흐려지는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백작님? 마님께 호위라니…. 물론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굳이 부단장이나 되는 이를 붙일 필요는 없을 텐데요. 가스파르가 이번에 맡은 업무도 있고….”

로베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정원의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올 겨울은 출병 계획이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내년 봄에 수도로 올라가야 하고.”

“네. 수도로 올라갈 땐 부대장들과 전부 함께해야하니, 어차피….”

그러면 당연히 가스파르도 수도로 올라가야하니, 비앙카의 호위도 끝이다. 고작 이번 겨울. 그 짧은 기간 동안 부단장을 호위로 쓰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퍼뜩 로베르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로베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하지만 자카리의 태연한 낯을 보고 있자하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소뵈르는 아직 상황을 파악 못했는지, 로베르가 왜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침을 꿀꺽 삼킨 로베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같이 가실 생각입니까?”

“이번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수도에 반 년 가량 머물러야 할 테니까.”

“그래도….”

자카리의 당연하다는 듯한 답에 로베르는 우물우물 말끝을 흐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소뵈르의 얼굴이 경악으로 치달았다. 지금, 자카리는 비앙카를 데리고 수도로 올라갈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뱅상은 이미 알고 있었는 듯 태연했다.

아니, 그런 생각이셨다면 우리에게도 진즉 말해주셨어야지!

자카리가 그녀의 호위로 굳이 부대장이나 되는 측근을 붙인 이유를 이제야 알 법했다. 왕성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작위가 필요했고, 위험천만한 수도에서 비앙카를 지켜줄 만큼 실력 있는 기사는 손에 꼽았다. 그러니 미리미리 얼굴도 익혀둘 겸, 일찍이 그녀에게 호위를 붙인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의 호위가 내년에 수도에서까지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가스파르는 이 사실을 알까. 당연히 모르겠지. 로베르와 소뵈르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비앙카가 애초에 수도에 가는 걸 원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들이 아는 백작 부인은 아르노 성의 자신의 방에 콕 박힌 채, 그 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의문이 해결되면, 다른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아니, 평소처럼 그냥 비앙카를 버려두면 되는 일을, 왜 갑자기 호위까지 붙여가며 수도에 데려갈 생각인 걸까? 거추장스럽고, 분명 불유쾌한 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게 분명하다. 수도까지 가는 여행을 견딜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카리의 결정은 의문투성이였다.

최근의 그는 이상했다. 정확히, 이번에 아르노 성으로 귀환하고 나서부터.

평소의 자카리였더라면 앙트의 일에서 그리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뱅상을 믿는 만큼, 그는 사용인들의 문제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뱅상에게 맡긴다. 그런데 이번엔 의원을 부르라고 하거나, 성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게 하라는 등 이것저것 참여하시더니, 난데없이 비앙카를 수도에 데려가려고 한다….

그 원인이 비앙카라는 건 분명했지만, 그 근간이 되는 감정이 호오好惡, 둘 중 어느 쪽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호의에 가까운 것 같긴 한데…. 도대체 그 ‘호의’가 왜 갑자기 솟아났는지를 모르겠다. 그들은 장장 결혼 9년 차가 아니던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