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동상이몽(1)
다음 날, 예고했던 대로 자카리가 찾아왔다. 예상했던 만큼 비앙카는 담담히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들을 보고 나서까지 표정 관리를 하기는 힘들었다. 로베르, 가스파르, 소뵈르. 자카리의 세 부대장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등장에 비앙카는 얼떨떨히 눈을 깜빡였다. 호위라고 해봐야 명목상의 이유니 만큼, 끽해야 평범한 기사 하나 붙여줄 줄 알았는데 부대장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이 상황을 얼떨떨하게 여기는 건 비앙카 뿐만이 아닌 듯했다. 부대장들의 얼굴에는 영혼이 없었다. 이미 한차례 푸닥거리를 하고 왔는지 진이 빠져있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평소와 같은 이는 오로지 자카리 뿐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까닥여 자신의 뒤에선 세 부단장을 가리켰다.
“다들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오. 골라보시오.”
“…다들, 제 호위로 시간을 때울 만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의 호위는 시간 때우기가 아니요.”
그러시겠지. 비앙카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어떻게든 거추장스러운 감시자를 떼어내고자 하였는데, 자카리는 물러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보였다. 비앙카는 작게 한 숨 쉰 뒤, 자카리의 뒤에 선 세 부대장들을 보았다. 다들 비앙카가 자신만큼은 선택하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어딜 봐도 억지로 끌려온 모양새였다. 그런 상황이 뻔히 드러나는 얼굴로 찾아오다니. 설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네. 절실히 느껴지는 적대감에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비앙카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어제 저녁, 자카리는 급히 부대장들을 소집했다. 갑작스러운 호출 명령에 부대장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황급히 자카리의 집무실로 향했다. 혹시 아라곤이 또 쳐들어 온 건 아닐까. 그러면 당장 군을 꾸려 출정해야만 했다. 바로 엊그제 귀환했는데…! 부대장들은 제발 출정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발을 놀렸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출정 소식보다도 더 끔찍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그들의 빌어먹을 아르노 백작 부인, 비앙카의 호위 업무가 떨어진 것이다! 소뵈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며 항명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자카리의 서늘한 눈길이 닿기가 무섭게 입술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스파르는 언제나 그렇듯이 돌조각 같은 표정이었고, 비앙카가 앙트를 처벌하던 현장에 있었던 로베르는 지금 이 뜬금없는 광대놀음과도 같은 상황이 아까의 일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침묵했다.
남은 둘이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 소뵈르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다들 이 상황이 이해가 가? 동료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자가 일어나야 하고, 입이 간질거리는 자가 물어봐야 하는 법. 소뵈르는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투덜거렸다.
‘왜입니까? 어차피 마님은 성에서만 돌아다니실 뿐이고.’
‘성에서 돌아다닐 뿐인데, 아까 같은 일이 벌어졌단 말이지.’
자카리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가 불쾌해하고 있단 사실은 명백했다. 그의 음성 아래 도사린 노기에 부대장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시정하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 유일하게 정황을 알고 있는 로베르는 특히나 더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난데없는 호위 임무는 아까의 일과 관련 있는 것이 맞다. 로베르의 단정한 얼굴에 식은땀이 송글 맺혔다.
자카리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는 아르노 가家를 상징하는 늑대 머리가 곧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조각되어있었으며, 등받이는 파란 벨벳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편하고 화려한 의자였다. 하지만 앉은 이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보였다. 자카리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내가 그 꼴 보자고 성을 비우는 게 아니란 말이지, 뱅상.’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인들을 잘 단속하겠습니다.’
세 부대장들에서 대각선 옆에 있던 뱅상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가스파르와 소뵈르는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서로를 곁눈질하며 흘끔거렸다. 오로지 로베르만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로베르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짐작한 소뵈르는 슬쩍 로베르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로베르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녀 하나를 데리고 다닌다고는 하는데. 그걸로는 안심이 안 돼.’
자카리의 목소리는 지친 듯 나른했다.
하녀를 데리고 다닌다니. 그 백작 부인이? 부대장들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앙카는 항상 혼자였다. 하녀와 말을 섞기만 해도 그들이 기어오르고, 그들을 가까이 둘수록 자신의 격이 떨어진다고 진지하게 믿는 것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자카리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도대체 왜 비앙카에게 호위가 필요한지, 뭐가 안심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내일 비앙카가 택하는 이가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되리라 덧붙이고는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집무실을 나선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카리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소뵈르와 가스파르는 로베르를 통해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부당하다는 주장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늦은 뒤였다. 그나마 자신들의 궁둥짝을 걷어차 진창으로 쳐 넣는 이유를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비앙카보다 머리 두개 정도는 더 클까. 하나 같이 훤칠한 세 남자들은 다들 비앙카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기만을 빌며 그녀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다들 얼토당토 않은 사태에 표정관리 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베르는 불만과 우려를 숨기려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소뵈르는 노력조차 못했다.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소뵈르의 얼굴은 이 상황에 대한 끔찍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나마 침착해 ‘보이는’ 것은 가스파르였다. 애초에 가스파르는 희노애락을 포함하여 당황, 놀람 등의 감정표현에 더뎠다. 소뵈르와 로베르는 난생처음, 가스파르의 돌 같은 무표정을 부러워했다.
그렇게 그들이 비앙카의 선택을 사형대 선고처럼 기다리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와중, 하녀 이본느가 비앙카를 찾아왔다.
“마님. 산책하기로 한 시간…. 앗, 죄송합니다, 영주님…!”
이본느는 자카리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자카리와 비앙카가 함께 있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다른 세 명의 부대장들까지 몰려있다니, 여기가 영주의 집무실도 아니고. 백작 부인의 방에 그들이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 틀림없다. 맥박 뛰는 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이본느의 귀까지 울렸다.
이본의 등장에 비앙카는 살짝 웃었다. 선택하기 싫은 끔찍한 난제로 저를 압박하는 네 남자들 사이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이본느가 나타나니 숨통이 트였다. 비앙카는 자못 다정한 목소리로 이본느를 반겼다.
“괜찮아, 이본느. 내가 늦었구나. 바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련?”
“…네.”
이본느가 눈을 데굴 굴려 방안을 살폈다. 객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두명의 부대장들이 목이 졸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일단 자카리와 비앙카가 태연하니 그걸로 되었다. 혹여나 어제의 일로 비앙카에게 한소리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이본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들 이본느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그’ 비앙카에게 살갑게 말을 건네는 하녀가 있다니! 그들은 이본느가 어제 자카리가 언뜻 말했단 ‘그 하녀’라는 걸 눈치 챘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 하녀의 말에 비앙카가 대답을 해줬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척 상냥하고 다정하게. 심지어 미소도 함께!!
비앙카의 미소는 무척 희미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깜짝 놀란 부대장들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어 눈만 끔뻑였다. 평소라면 하녀의 말 따위, 들은 척도 안했을 텐데. 하지만 분명 비앙카는 ‘괜찮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로 ‘괜찮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세 부단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당혹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비앙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녀 또한 무척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세 부대장을 제 코앞에 들이민 시점에서 자카리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골라야겠지. 이본느도 기다리고 있고. 어차피 해야 하는 문제라면 빨리 해치워버리는 게 낫다. 작게 한숨 쉰 비앙카는 운을 떼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비앙카보다 한 박자 먼저 입을 연 상대가 있었다.
“제가.”
낮은 목소리는 솥을 망치로 두드린 듯 깊은 울림이 있었다. 비앙카는 입을 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한결같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산, 혹은 돌벽 같은 남자가 우뚝 서있었다.
그는 여전히 돌을 조각해낸 것 같은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잘 보고 있으면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 상기되어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바위와 같은 남자, 가스파르는 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님의 호위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