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7화 (17/192)

#17 부르튼 손바닥(5)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비앙카는 도리질 쳐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지워냈다.

비앙카에게 있어서 자카리는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

좌우지간 아랫것들 앞에서 비앙카의 명예가 지켜졌으니 긍정적인 일이지. 비앙카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방으로 발을 돌렸다. 뱅상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비앙카의 차가운 거절에도 불구하고 뱅상은 비앙카의 뒤를 따라붙었다. 충실한 자카리의 심복인 그는 꿋꿋이 명을 다시 읊었다.

“백작님께서 의원을 부르라 하셨습니다.”

“시끄러운 일 없게 하라고도 하셨지. 내 알아서 할테니 그대는 그대 볼 일이나 보게.”

비앙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레 답했다. 총총총 사라지는 발걸음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일정했다.

남의 얘기는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은 비앙카와 자카리 둘 다 똑같았다. 뱅상은 자존심 강하고 고집스러운 비앙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의원은 나중에 보내도 되겠지. 어차피 지금 바로 올려 보내봐야 문전박대 당할 것이 뻔했다. 뱅상은 비앙카를 따라가는 대신,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앙트는 망연히 주저앉아 훌쩍이고만 있었다. 뱅상은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훑으며 냉정히 말했다.

“그만 울고.”

뱅상이 자신을 위로한다고 착각한 앙트는 코끝을 작게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찍어내었다.

뱅상은 성을 버려둔 마님을 대신해서 아르노 성을 꾸려나갔는데, 하인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일 또한 그의 소관이었다. 그 주인에 그 하인이라고, 뱅상은 얼핏 차가워보이지만 고용인들에게 잘 대해주는 좋은 상관이었고, 앙트는 당연히 뱅상이 간단한 꾸지람 정도만 한 뒤 자신을 다독여 보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뱅상의 말에 그녀의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너는 집으로 갈 채비를 해라.”

“흑, 흐흑…. 네?”

앙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한창 가녀린 연기를 하던 와중인지라 얼굴 표정만큼은 처량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핏자국과 눈물자국으로 범벅이 된 몰골은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그녀의 어리석음에 뱅상은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앙트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영주님의 말씀 듣지 않았느냐. 시끄러운 일 없게 하라고. 네가 시끄러운 원흉이다.”

“하지만 집사장님…!”

“사용인의 미덕은 입조심이지. 네 입은 너무 가벼워서 이 성에 맞지 않구나. 돌아갈 준비를 해라. 맨 몸으로 내쫓기고 싶지 않으면.”

자카리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한 집사, 뱅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 부뚜막에 오르려 했던 고양이가 두 번 오르지 않을 리 없다. 한 번 마님에게 대든 앙트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생각하면 골머리가 아팠다.

앙트를 내쫓으면 그녀의 가벼운 입과 행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더불어 주변 다른 하인들에게 충분한 엄포가 될 테니 일석이조다. 실제로 앙트는 멍석말이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주제넘은 행동을 했다. 이정도면 충분히 자비로운 벌이지. 뱅상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냉정한 뱅상의 말에 자신이 붙잡을 동아줄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앙트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녀는 정말 가벼운 농담을 했을 뿐이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뱅상은 옆에서 우물쭈물 서있는 다른 하녀들을 향해 눈짓했다. 뱅상의 지시를 기민하게 알아들은 하녀들이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앙트를 잡아끌었다. 앙트가 발버둥 쳤지만, 많은 하녀들의 힘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앙트가 하녀들에 의해 들려 사라지고, 소란스레 시끄러웠던 공간에 로베르와 뱅상 단 둘만이 남았다.

로베르는 입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듯, 항시 단정하게 정돈된 얼굴이 흐트러져 있었다. 로베르는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의 암록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당황스러움이 그득했다.

“…뭡니까.”

“뭐가 말입니까.”

“백작님과 마님 사이가 평소와 명백히 다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제 마님이 백작님을 찾았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뭐가 다르다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그 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로베르가 캐묻는 말에 뱅상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카리의 방은 방음이 잘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면 뚜렷하게 대화를 듣기 어려웠다. 어제 있었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뱅상으로서는 그저 어제 일과 뭔가 관계가 있겠거니 하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갑자기 왜 비앙카가 먼저 자카리를 찾아 갔는가, 였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찾아가지 않으면, 그를 먼저 찾는 법이 없었다. 그런 비앙카가 난데없이 먼저 자카리를 찾아가지를 않나, 평생 ‘블랑쉐포르 가家’의 사람인 것처럼 굴더니 ‘아르노 가家’에 대해 운운하지를 않나…. 뱅상은 그녀의 변심의 내막이 궁금했다.

물론 궁금하다 해서 당장 알게 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간단하다. 뱅상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의 입꼬리를 따라 패인 주름이 여유롭게 휘어졌다. 로베르보다 열다섯 살 가량 더 많은 그는 아직 혈기를 추스르지 못하는, 성격 급한 젊은 기사를 가르치듯 덧붙였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지긴 했지요. 그리고 저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명에 따르는 것. 주인을 위해 무엇이 맞는 행동인지는 명백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로베르 경?”

* * *

방안으로 돌아온 비앙카는 창가 근처의 궤짝위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의 일을 곱씹었다. 하녀에게 모욕당했다는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속을 채운 것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 자카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되짚어보면 볼수록, 그가 자신에 대해 마냥 나쁜 감정이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왜 날 거부한 거지?

자신이 그렇게까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잠자리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던가. 모든 사내들이 여자들의 가랑이 사이에 한번 파고 들어보려고 기를 쓰는 걸 생각할 때, 자카리의 거리가 느껴지는 행동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 몸이 취향이 아닌 걸지도.

그래, 정부가 있다면 굳이 취향이 아닌 절 안고자 안달 낼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 가신들이 시끄럽게 굴 때까지 첫날밤을 미루고 미뤄왔던 것일 테고.

비앙카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열여섯의 몸은 앙트의 말대로 비쩍 말랐고, 가슴은 봉긋 솟았지만 커다란 손으로 틀어쥐기엔 다소 부족했다. 확실히 사내들이 반길 만한 몸은 아니었다. 아직 열여섯이니까, 라고 하기엔 그녀가 열여덟이 된다 해도 여기서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마 열여덟이 되면 조금이나마 여성다운 곡선이 생긴다는 것에 만족해야할까.

비앙카는 습관적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손바닥에 찌릿 전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고통이 오래 갈 것 같았다.

그때 하녀 하나가 방에 들어섰다. 발소리를 죽이고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들어서는 하녀의 모습이 익숙했다. 아까 회초리를 가지러 오라 보냈던 연갈색 머리카락의 하녀였다.

하녀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마님. 의원이….”

“되었다 했어. 거추장스럽게 이런 일로 의원을 만나. 내가 하녀를 매질했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생각이라시더냐?”

“…….”

의원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빈정거리듯 대꾸하고는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옆선에서는 거절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하녀는 차마 다시 한 번 이야기를 건넬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렸다. 그렇게 한참 비앙카의 눈치를 본 그녀는, 결국 다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비앙카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팠지만, 그래도 의원을 불러들이는 건 달갑지 않았다. 얼마나 지독하게 하녀를 때렸으면 때린 본인이 의원의 치료를 받느냐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밑의 사용인들이 무어라 수군거리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소문이 돌게 뻔히 보이는데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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