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6화 (16/192)

#16 부르튼 손바닥(4)

앙트는 자카리가 비앙카의 독한 행동을 알게 되고는 정이 똑 떨어질 거라 여겼다. 더불어 자신을 안쓰럽게 여길 거라고도. 지금껏 봐 온 백작님이라면 당연했다. 백작님은 아내에게 관심이 없고,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카리는 비앙카의 손을 보았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손에 쥐고 있는 회초리를 뒤로 숨기고 싶었지만 비앙카는 꿋꿋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비앙카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듯 되뇌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미간에 주름이 지자, 애써 다잡은 용기는 물에 녹아드는 소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앙카.”

자카리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나직이 비앙카를 불렀다. 그저 이름이 불려졌을 뿐이지만 비앙카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질책을 읽었다.

비앙카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가슴이 숯불을 넣은 듯 덥고 답답해졌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런 눈길로 바라보는 걸까. 하녀 하나 입단속 제대로 못시켜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을만한 여자라서 듣는 이야기인데, 별 것도 아닌 일을 소란 피워서? 비앙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앙트가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자카리에게 말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처음 알았다는 듯 깜짝 놀랄까, 아니면 당연하다는 듯 덤덤할까?

수치심에 견딜 수가 없었음에도 비앙카는 목에 뻣뻣이 힘을 줬다. 자존심.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앙카를 지탱해왔다. 하물며 위그 자작에게서 내쫓기는 그 순간마저도. 비앙카가 단 한 번 자존심을 꺾은 것은 아르노 성에서 내쫓긴 뒤 페르낭에게 매달렸을 때뿐이었다. 그건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물론 그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자존심을 꺾어봐야 되돌아오는 것이 비참함뿐이라는 걸 알게 된 비앙카는 고개를 치켜들고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성대와 혀끝에 온 힘을 다하며,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말했다.

“당신도 제가 너무했다고 말할 생각인가요? 전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 성의 안주인으로서, 그리고 당신의 아내로서.”

“…….”

“…만약 이 여자가 당신 정부라면, 저도 한 발짝 물러설게요. 나 대신 당신 침대를 데워주겠느니 마느니, 그런 말을 할 만한 위치니까요.”

“그런 것 아니요.”

비앙카가 비꼼 반, 비참함 반의 심정으로 토로한 말에 자카리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꽉 다물린 어금니가 보였다. 마치 말 못하는 짐승이 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말할 수 없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는 성큼성큼 비앙카에게로 다가갔다. 뱅상과 로베르, 그리고 다른 하녀들은 혹시라도 그의 길에 방해가 될까 훌쩍 물러섰다. 살 떨릴 듯한 긴장감이 드리웠다.

비앙카 또한 거침없이 저에게로 다가서는 자카리의 모습에 뒷걸음질 쳤다. 커다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은 언제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비앙카가 뒤로 물러서는 것보다 자카리가 그녀의 앞에 도달하는 것이 먼저였다. 자카리는 손을 뻗었다. 긴 팔이 자신을 향해 불쑥 접근하자 비앙카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자카리의 손은 비앙카가 아닌, 비앙카가 꼭 쥐고 있던 회초리 끝부분을 향했다. 자카리가 회초리를 잡아당기자, 비앙카는 엉겁결에 회초리를 쥐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사람은 서로 회초리 끝을 잡은 채 대치했다.

갑자기 자카리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던 비앙카는 황당함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면 자카리의 시선은 회초리를 쥐고 있는 비앙카의 손을 향해 떨어졌다. 항상 하얗고 마른, 자작나무 가지 같은 손가락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당신 손이 붉어.”

뜬금없는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게 지금 중요한 건가? 비앙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카리는 무언가 불쾌한 사람처럼 시종일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의 미간 사이 주름과 눈썹 밑 그림자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러는지 비앙카는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가벼운 행동이다. 비앙카는 태연한 척, 느릿하게 답했다.

“…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손을 썼어요.”

“이러다 퉁퉁 붓겠군.”

자카리는 쯧 혀를 찼다.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어쩌면 백작 부인이나 되는 이가 함부로 손을 휘두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수도. 하녀의 뺨을 올려붙인 그 순간이 통쾌하기는 했지만, 비앙카도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건 동의했다. 비앙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짙은 고동색 눈썹이 초록빛 눈동자 위에 드리워졌다.

순간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손 주위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저 배회하기만 할 뿐, 그는 오래지 않아 손을 거두었다. 마치 비앙카의 손에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나와 닿기도 싫다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자카리의 태도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자카리는 언짢은 눈길로 비앙카의 손을 다시 한번 보더니, 뱅상을 불렀다.

“뱅상. 마님을 안으로 모시고, 의원을 불러.”

“네.”

자카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뱅상이 비앙카에게로 다가왔다. 의원이라는 말에 뭔 일인가 하고 봤더니, 비앙카의 손바닥이 부르터 있었다. 손바닥의 핏줄이 다 터진 것 같았다. 이정도면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도 꽤 아팠을 텐데, 내색 한번 하지 않다니 독하기도 독하다. 뱅상은 혀를 내둘렀다.

앙트는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하지만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간절한 눈으로 자카리를 올려보았다. 우리 백작님은 무뚝뚝하지만 자상하고, 성의 사람들을 아끼고…. 자신이 이렇게 얼굴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실 리 없다. 백작님이 자신을 한 번만 봐주신다면, 깜짝 놀라실 것이다. 지금은 그저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보지 못하셔서 그런 것일 뿐이다…. 앙트는 그렇게 일말의 기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앙트의 기대가 통했는지, 자카리는 슬쩍 시선을 내려 앙트를 보았다. 흘끔 스쳐지나가는 시선에 불과했지만, 그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앙트는 더욱 서럽고 안쓰럽게 울었다. 자카리의 동정표를 사기 위해서였다. 눈썹을 축 내리 깔고 처연하게 훌쩍이는 그녀의 모습은 가엾기 짝이 없었다. 어깨를 잘게 떨어 연약함을 강조하고, 슬쩍 치맛단을 올려 가늘고 흰 발목을 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자카리의 시선이 두 번 다시 앙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바닥에 있는 돌멩이 보듯 앙트를 스쳐 지나간 자카리는 뱅상이 비앙카의 손바닥을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골몰했다. 회초리를 쥐고 있던 비앙카의 붉은 손바닥이 훤히 드러나자, 자카리의 얼굴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카리가 짜증스레 덧붙였다.

“그리고 성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게 하게.”

“…네.”

뱅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자카리는 휙 뒤돌아섰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자카리의 넓은 등은 뒤돌아봄 한번 없이 꿋꿋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더니, 휑하니 자리를 떠 버린다. 그의 몇 안 되는 말과 행동에 서린 의미를 되짚느라 비앙카의 머리는 복잡했다. 비앙카는 멀쩡한 손으로 지끈 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황당한 건 비앙카 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르는 망연히 서있었고, 앙트 또한 망연자실함을 숨기지 못했다.

앙트는 몰랐다. 자카리가 영지민에게는 너그러운 영주였지만, 전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것을. 철혈(鐵血)의 백작이라는 칭호는 그의 강력한 군대와 전쟁 업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은발 머리가 피에 물든 모습이 마치 피에 젖은 검과도 같다 하여 붙여진 것이기도 했다.

자상해 보이는 것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성의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것에나, 혹은 그들을 부리는 것에나. 그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인하고 냉정해질 수 있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리 냉정한 영주는 자신의 아내를 모욕한 하녀를 편들 리가 없다.

모두가 멍하니 있는 동안, 뱅상이 비앙카를 재촉했다.

“마님,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알아서 돌아갈 수 있네. 의원은 됐어. 그리 소란 피울 일도 아니니까.”

자카리의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비앙카는 뱅상의 재촉에 짜증스레 답했다. 고작 두 대 뺨을 올려붙였을 뿐인데, 의원이니 뭐니 소란을 피우는 것이 부끄러웠다. 손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손의 아픔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마치 그가 나를… .

걱정하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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