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4화 (14/192)

#14 부르튼 손바닥(2)

그때만 해도 비앙카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앙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성 사람들이나 자카리의 가신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그 자작에 의해 비앙카가 쫓겨날 때,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리라. 비앙카는 쓰게 웃음 지었다.

그나마 방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새어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실제로 자카리는 비앙카를 받아주지 않았다. 하녀의 불온한 기대 그대로의 일이 일어났던 만큼, 비앙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에게 소박맞는 아내라는 가설에 확신을 주기라도 했다면 얼굴이 화끈거려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런 쓰잘데기 없는 수다거리들은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쪽이 더 꼴이 우습다. 마치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것 같지 않은가. 더 들어봤자 기분만 나쁠 뿐이라 생각한 비앙카는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지나칠 수 없는 말이 그녀의 귓청을 때렸다.

“영주님의 침대를 데우는 일은 아마 마님보다 내가 더 잘할 걸?”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혹시 마님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듣지 않으셔도 말이야, 마, 마님께 실례야!”

“흥, 하지만 사실이잖아. 마님은 차가운 성격만큼이나 피부도 차가울 거야. 파충류 같을 게 분명해. 게다가 마르고 볼품없고. 어딜 봐도 내가 낫지.”

앙뜨는 가는 허리에 손을 짚고는 엉덩이를 튕겨 올렸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녀의 풍만한 몸매가 흐드러졌고, 목소리에는 우쭐한 기색이 서렸다.

그와 동시에 돌아서려던 비앙카의 몸이 우뚝 섰다. 지금껏 그녀를 우습게 여기는 다른 말은 모두 간과해 넘길 수 있었지만, 저 말만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감히 나를 자신과 비교한 거야? 고작 하녀 일을 하는 계집이?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입꼬리 끝이 아프게 당겨오며 어깨에 뻣뻣이 힘이 들어갔다. 분명 전생에서도 이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지.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왜인지 곱씹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앙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건방진 말을 한 하녀의 팔을 낚아채어 뺨을 내리친 뒤였다.

난데없이 뺨을 맞은 앙트는 어안이 벙벙한 채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깜빡 깜빡이며 정보를 받아들였다. 눈앞에 있는 것이 마님이며, 그녀가 제 뺨을 때렸고…. 그렇게 몇번의 사고를 거친 뒤에서야 뒤늦게 비앙카가 자신의 뒷담화를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앙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비앙카는 그녀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비앙카는 귀찮음이 강할 뿐, 착하고 자비롭지는 않았다. 자신이 받은 모욕은 곱씹다 못해 되돌려 주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시큰거리는 손의 고통을 참은 채 하녀가 회초리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훌쩍이는 앙트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비앙카는 앙트와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다른 하녀들은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오래지 않아 비앙카의 명대로 회초리가 대령되었다. 회초리를 들고 온 하녀는 안쓰러운 듯 앙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모르는 척, 건네받은 회초리를 가볍게 허공에 휙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비앙카는 회초리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마르고, 볼품없는 파충류 같은 여자라….”

비앙카의 혼잣말에 주변사람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디까지 들었나 했더니 정말 다 들었던 모양이다. 비앙카가 흘끗 눈을 치뜨자 하녀들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끝이 올라간 그녀의 새초롬한 눈매는 살쾡이처럼 날카로웠다.

“파충류 같다 말하면서도 내 성격이 독사보다도 악독하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야. 그러니 뚫린 입이라고 그리 쉽게 나불거리지.”

비앙카는 싱긋 웃었다. 웃음 속에 숨겨진 독설. 하녀들로서는 뭐라 변명할 말도 없는 만큼, 그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널 봐줄 것 같니?”

얼핏 듣기로는 상냥했지만, 그녀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다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건, 비앙카의 앞에 선 앙트였다. 적대감이 그녀의 피부를 찔렀다.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앙트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비앙카가 동정심을 갖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 누구라도 제 울음을 듣고는 구해주러 나타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성에는 백작님이 계신다. 백작님이 제 부인의 악독한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자신을 안아 올려 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까짓 매질쯤이야. 버텨줄 수 있다. 백작 부인의 손목은 가늘었고, 그녀가 세게 매질해보았자 자신은 견딜 수 있다. 눈물 진 앙트의 눈빛에 음흉한 빛이 스쳤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 서러운 듯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모습이 제법 처연했다. 사정을 아는 이라 할지라도 측은지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흔들림조차 없이, 회초리를 치켜들며 말했다.

“손을 내밀렴.”

하녀들은 항상 손으로 무얼 하는 만큼, 손바닥을 다치면 일이 무척이나 번거로워졌다. 쓰라린 피부를 찬물에 담근 채 설거지나 빨래를 할 걸 생각하니 무척이나 끔찍하다. 앙트는 주저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비앙카를 향해 펼쳐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비앙카는 주저 없이 회초리를 내리쳤다.

철썩! 앙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주인과 미천한 자신을 비교한 죄.”

철썩! 앙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예쁘지 못한 비명을 질렀다.

“이건 주인들의 이야기에 쓸데없이 귀를 기울인 죄.”

철썩! 앙트는 누군가 저를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모두 앙트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돌리기 급급했다.

“이건 입을 가볍게 놀린 죄.”

“이건 주인을 비방한 죄.”

비앙카의 회초리는 머뭇거림도, 주저함도 없었다. 견딜 수 있을 거란 착각과 달리, 비앙카의 매질이 한 번 한 번, 지속 될수록 앙트는 고통으로 울었다. 비앙카의 가는 손목으로도 회초리는 탄력을 받아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으며, 앙트의 하얀 피부결에 보기 흉한 붉은 선이 울긋불긋 생겼다. 비앙카는 한참 회초리질을 한 뒤에야 손을 멈췄는데, 그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절 구해주기를 바라며 예쁘게 울던 앙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앙트는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어? 마님은 날 질투해서 핍박하는 거야. 내가 더 예뻐서. 나는 화사한 금발인데 마님은 껍질을 고동나무 껍질을 벗겨놓은 같은 머리카락이라서. 내가 더…. 누구든 좋아. 제발 이 악독한 마님에게서 날 구해줘….’

“그리고 감히 손에 닿지 않는 주인을 탐한 죄.”

숨을 고른 비앙카는 다시 회초리를 휘둘렀다. 이번 회초리는 유난히 더 매섭게 공기를 갈랐다. 앙트는 이어질 고통을 짐작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앙트는 무슨 상황인가 싶어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녀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한 사내. 그의 손에 비앙카의 회초리 끝이 단단히 잡혀있었다. 앙트의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앙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 끼어들어 비앙카의 회초리를 막아낸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묻겠네. 자네야말로 이게 무슨 짓인가?”

비앙카는 짜증스레 되물었다. 비앙카는 사내의 손에서 회초리를 빼내려 했지만, 회초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는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헐레벌떡 뱅상이 찾아왔다. 소란을 듣고 온 걸까, 아니면…. 비앙카는 회초리를 가져온 하녀를 흘끗 곁눈질했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하녀는 히익,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비앙카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방해한 사내를 보았다. 자카리와 비슷한 나이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카락, 암녹색 눈동자. 익숙한 얼굴이었다.

분명 자카리의 부대장 중 하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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