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십오 년 만의 재회(6)
비앙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기력이 모조리 빼앗긴 듯, 몸이 축축 늘어졌다. 오늘 하루 몸이 피로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극과 극을 오가다 보니 온 몸에 진이 빠졌다. 비앙카는 바로 침대로 쓰러지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았다. 저 멀리 농노들의 집인 듯 반짝이는 불빛이 하나둘 흔들렸다. 비앙카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만약 낮이었다 해도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익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성에서 내쫓겨 십오 년 동안이나 외지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에서 머물던 그전 십오 년 동안에도 성 밖의 전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 밖의 세상에는 흥미가 없었다. 과거의 그녀는 자신의 방에 콕 박힌 채, 어떻게 해야 자신의 방을 블랑쉐포르처럼 꾸밀 수 있을지에만 골몰했다.
이제 비앙카는 세상이 자신의 방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먼 지평선 끝에서 자신이 앉은 곳을 희번득한 눈으로 갈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 것들이 모두 얽히고 설켜 제 목을 죌 수도 있다는 것을 이 한 몸으로 직접 겪어내지 않았던가.
저 어둠의 끝자락이 닿은 저 끝까지 세상은 흘러간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앙카는 그렇게 스스로를 추슬렀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 부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엉망이었다. 애초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결혼이었으니까. 과거의 비앙카가 자카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남작이었던 그의 신분이 비앙카의 집안보다 한참 격이 떨어진다거나, 전쟁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느라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거나. 혹은 열세 살의 나이 차라거나.
사실 귀족들의 결혼에서 그 정도 나이 차는 흔한 편이었다. 열여섯의 소녀가 예순이 다되어 가는 늙은이와 결혼한 적도 있고, 열여덟의 풋풋한 젊은이가 마흔다섯의 미망인과 결혼한 일도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열셋 정도야. 다만 그들의 문제는 자카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비앙카의 나이가 바로 일곱 살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들의 제일 큰 문제였다.
너무 어린 시절에 만나, 너무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다.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음에도, 십 년의 세월은 어설프게나마 상대를 파악하게 만들었다. 단단히, 그리고 켜켜이 쌓아올려진 편견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대로 계속해서 꿰어온 단추. 이미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올리고 나서야 그 어긋남을 깨달았다. 아니. 하나하나 잠그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푸르고 다시 잠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뻔했음에도, 보지 않고자 눈을 질끈 감으며.
창틈을 타고 스며든 냉기에 비앙카는 으슬으슬한 팔을 문지르며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덮은 따듯한 모피를 추슬렀다. 원래도 유난히 추위를 타는 편이었지만, 수도원에서 병든 몸으로 얼어 죽고 난 뒤 깨어나 보니 조금의 추위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비앙카는 목 끝까지 모피에 파묻은 채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에 희뿌옇게 비앙카의 모습이 비쳤다. 새하얗고 예쁜 얼굴은 티 하나 없었고, 걸치고 있는 것은 모두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그럼에도 거울 속에 비친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모피가 잘 어울린다고 했었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걸까? 비꼬는 거였을까? 그가 전쟁하는 동안 자신은 이런 사치나 하고 있었다고?’
픽, 자조의 웃음이 여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블랑쉐포르 가와의 협정의 대가라고 치기엔, 그녀에게 들어가는 유지비는 꽤 과했을 것이다. 흰여우 모피. 저 먼 타국에서 비싸게 수입해온 염료로 물들인 옷감. 보석과 금붙이. 목욕물에는 꼭 향유가 들어가야 하며, 하다못해 취미로 튕기는 악기마저도 비싼 것이었다.
치졸하게나마 변명을 하자면, 비앙카의 인생에 있어서 그런 것들은 당연한 것들이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항상 최고급으로만 두르고 있던 그녀의 안목에 아르노 가는 한참 부족했다. 비참하게 내쫓기고 나서야 비앙카는 그녀가 향유하던 것들이 얼마나 값비싼 것들인 지 깨닫게 되었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뱅상에게 요구하라는 자카리의 말을 떠올려보면, 자카리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면서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해도 반기기는커녕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아내. 그녀가 말을 거는 순간은 언제나 사치품에 관한 것들일 뿐. 자카리의 입장에서 비앙카는 증오스러운 족쇄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힐난하려 그런 말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내로서의 의무 운운하는 비앙카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런데 왜일까. 비앙카에게 여우 모피가 어울린다던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처음 듣는 누그러진 상냥함.
내가 착각한 걸까. 아니면 자카리가 대상을 착각한 걸까.
한때는 자카리가 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무뚝뚝했고, 항상 여유로웠으며, 비앙카가 무엇을 하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무리 무뚝뚝한 사내라 해도 정부에게만큼은 달콤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앙카가 듣게 된 것은 그 파편일 뿐이다. 비앙카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자카리가 미처 추스르지 못한, 흔적에 가까운 상냥함. 비앙카의 가슴 한 켠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시큰거렸다.
아니야. 내가 그만큼 그를 당황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앙카는 도리질 쳤다. 마음이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고 있다. 비앙카에게 중요한 건 자카리가 정부에게 어떤 목소리로 속삭이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정부는 정부. 정부가 아이를 가져봐야 그 아이는 사생아일 뿐이다.
항상 비앙카가 무얼 하든 알 수 없는 태도만 취하던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이 무척 미약한데다, 정확한 속내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지금껏 꽁꽁 숨겨왔던 것을 드러날 듯 말 듯한 수면 위까지 끌어올린 것에 의의가 있다.
과거와 같은 인생을 두 번 다시 보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카리를 꽉 붙들고 살아야 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동아줄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가 전사하기 전에 그의 자식을 낳자. 그렇게 되면 그들은 쉬이 비앙카를 내쫓을 수 없을 테니까. 열여섯 소녀가 하기엔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서른여덟의 나이로 수도원에서 비참하게 죽은 여자가 품기엔 충분한 독기였다.
* * *
자카리는 욕실로 들어갔다. 한참 데워진 물은 비앙카의 방문으로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자카리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물었다.
“다시 데워올까요?”
“됐다. 상관없어.”
자카리는 단호하게 답하고는 가볍게 차려 입었던 옷을 훨훨 벗어던졌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죄여있었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만큼 자잘한 상처도 많았고, 꽤 큰 상처들도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대부분은 그가 젊고 혈기왕성했던 시절 입은 것들이었지만, 비앙카와 결혼한 뒤에 입은 상처들도 꽤 있었다. 물론 비앙카는 언제 그런 부상을 겪게 된 것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자카리는 성큼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뜨끈한 열기는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미약한 온기뿐이었지만, 자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락했다. 등 뒤에서 화살이 언제 겨누어질지 신경 쓰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던가. 자카리는 참아온 숨을 길게 뱉어냈다. 몸에 쌓인 피로와 독소가 한 올 한 올 물속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