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십오 년 만의 재회(4)
자카리의 미간에 미약하게 주름이 졌다. 비앙카의 말이 거슬리는 것일까?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으면서, ‘아내 된 도리’ 운운을 하는 것이 불쾌했을 수도 있다. 그를 비꼬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비앙카의 억지웃음에서 느껴지는 거짓말 또한 한몫 했으리라. 자카리가 자신의 말을 오해할까 두려웠던 비앙카는 급하게 덧붙였다.
“지금까지 제가 소홀했던 것도 있구요.”
자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로 비앙카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자카리는 여전히 비앙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그녀를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의 거리가 머니, 계속해서 대화가 빙빙 겉도는 느낌이었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좀 나아질까. 비앙카는 자카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고작 한 발짝인데도 발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비앙카의 노력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비앙카가 다가서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크게 움찔이더니, 뒷걸음질 쳐 그녀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 그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것도 싫을 만큼 질색이란 말이야? 비앙카는 아까보다도 더 멀어진 거리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걸 자카리 또한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아직 안씻었어.”
“…네?”
엉뚱한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자카리는 당황했다. 그가 당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비앙카 또한 당황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아무 것도 아니네.”
자카리는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더니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알쏭달쏭한 그의 말에 비앙카는 살풋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말의 인과관계가 도통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자카리가 조심스레 비앙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이제는 비앙카의 몸이 움찔했다. 본능이 그에게서 달아나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라 경고했다. 그건 안 된다. 두렵다 하여 마냥 도망친 결과가 어땠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비앙카는 뒷걸음질 치지 않은 채, 고집스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뒷목이 선뜩했으며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선 자카리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자카리는 그녀가 지레짐작한 것보다 훨씬 컸다. 그녀의 시선 높이에 닿은 것은 단단하고 드넓은 자카리의 가슴팍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과거의 그녀는 이런 그가 싫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궤짝 속에 숨어있는 검을 괴물처럼 너무 커다랗고, 무서워서.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그를 마주봐야만 했다.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비앙카의 시선이 자카리의 굵고 긴 목선을 지나 단단한 턱 끝, 그리고 깊게 패인 눈두덩이 아래 빛나는 날카로운 눈에 닿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자카리의 움직임은 훈련받은 군인처럼 절도 있고 딱딱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야만성과 야생성이 드러나곤 했다. 날 것 그대로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 초식동물이나 다름없는 비앙카는 바르르 떨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위협이었다.
자카리는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이렇게 살가운 건 또 처음이로군.”
자카리의 까만 시선이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를, 코를, 뺨을, 목덜미를, 둥근 어깨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샅샅이 훑는 느낌.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비앙카의 하얀 피부가 열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자카리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입안이 바싹 마른 모양이다. 자카리로서는 별것 아닌 행적 하나하나에 비앙카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꿈이 아니에요.”
비앙카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오늘 얼마나 억지 미소를 많이 지어댔는지, 뺨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가운 듯 웃어야만 할 텐데, 차라리 이대로 얼굴이 굳었으면 좋겠다. 비앙카는 그리 바랐다.
그나저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와 자신의 몸이 곧이라도 맞닿을 것만 같았다. 비앙카의 가지런한 앞머리에 자카리의 숨결이 닿으며 살짝 흐트러졌다. 그와의 거리가 좀 가까워지면 마음의 거리도 좀 좁혀질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비앙카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빨리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몸이 움찔움찔했다. 비앙카는 그런 심약한 자신이 싫었지만, 바꾸고 쉽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인내심 초과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비앙카는 최대한 거부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카리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슬쩍 밀어 냈다.
그녀의 약한 힘으로는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할 것 같았던 자카리의 몸이 가는 손끝 아래 순순히 멀어졌다.
비앙카는 마지막 힘을 다해 생긋 웃었다. 자카리가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믿든 안 믿든, 그녀로서는 한동안 구관조처럼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잖아요.”
자카리는 어딘지 얼떨떨해 보였다. 그는 비앙카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짐작도 못하는 모양이다.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언제까지 백작님을 피할 수도 없고…. 제 의무를 다해야죠.”
“의무?”
자카리가 되물었다. 차라리 비웃는 쪽이 낫다. 자카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건조한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오히려 비앙카의 얼굴이 더 홧홧해졌다. 비앙카는 자신의 떨림이 드러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애써 태연한 척, 당연한 척 턱 끝을 치켜들었다.
“백작님의 후계자를 낳는 것이요.”
“…후계자를 낳기 위해 무슨 일을 치러야 하는지는 아시오?”
“물론이죠!”
어른스러운 척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는데, 어린애 취급하는 자카리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자카리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비앙카에게서 빗겨 내려갔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사리 답을 내뱉지 않았다. 계속되는 침묵에 비앙카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몇 번이나 날름였다. 비앙카는 저 혓바닥의 감촉을 알고 있다. 둔탁하고, 거칠고, 비앙카의 저항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거세고 우직한 느낌. 비앙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한참 끝에 자카리의 목소리가 비앙카의 귓가를 두드렸다.
“솔직히 곤혹스럽군.”
한숨 섞인 목소리는 난처함으로 가득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꾸민 듯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일렀다.
“무엇이 그대의 맘을 뒤흔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떠하오?”
일견 다정하게 들리는 말투는 자카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비앙카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붉어졌다 파래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들어가서 쉬라니, 그것밖에 할 말이 없단 말인가? 자신이 어떤 각오로 이 자리에 섰는데…. 자카리의 모욕에 비앙카의 몸이 떨렸다.
비앙카의 초록빛 눈빛에 확 불이 질러졌다. 비앙카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지금껏 애써 붙들고 있던 나긋한 가식에 금이 쩡 갔다. 파편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며, 상처 받은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해서 이러는 줄 알아? 어차피 이 년 뒤에는 날 찾아오게 되잖아. 어차피 나에게서 후계자를 봐야하잖아!
비앙카는 거칠게 토해지는 숨을 죽이려 노력했다.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비앙카의 작은 입술이 달싹이며 올라갔다. 그녀는 다시 가식의 가면을 되찾았지만, 혀끝에는 미처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있었다. 심록의 숲처럼 어둡게 침잠한 비앙카의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했다.
“우리의 결혼은 얼마짜리 결혼이었죠?”
“송아지 400마리, 돼지 900마리, 은그릇 100개, 비단 300필, 보석 두 궤짝, 그리고 영지 일부분…. 아르노 가의 이 년 치 예산 만큼이었지.”
비앙카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에서 오간 예물을 나열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고요하고도 평안했다. 자카리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도 않았고, 손가락을 꼽아 셈해보지도 않았다. 자카리는 외우기라도 한 듯 지참금을 비롯한 그녀의 재산 목록을 줄줄 읊었다. 마치, 항상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비앙카는 자카리가 왜 그런 걸 외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참금이 어마어마한 금액이기는 하지만 늘상 외우고 있을 만큼 자주 들여다 볼 내용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내의 재산은 남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다. 아내의 재산을 셈해봐야 할 때는 남편이 죽어 아내 혼자 남거나, 아내를 쫓아 보내고 새장가를 들 때라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를 쫓아내려고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에게 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상관없다. 어차피 자카리는 그녀를 이혼시킬 생각이 없다.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혼을 당해도 전생에서 진즉 당했겠지. 여자는 이혼을 주장할 수조차 없는 만큼, 이혼은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잖아. 비앙카는 자신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흰여우처럼 웃었다.
“그 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