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9화 (9/192)

#9 십오 년 만의 재회(3)

비앙카는 자카리의 방으로 향했다. 자주 발걸음 하지 않던 곳이다 보니 이 길이 맞나 싶어 몇 번이고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를 반복했다. 자카리의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오랜만에 귀환한 영주님을 보필하느라 바쁜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문 틈새로 흘러나왔다.

문이 열려있다 하나 선뜻 들어서는 건 예의가 아니다. 비앙카는 우아하게 똑똑,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 마님?”

문을 열고 상대를 파악한 뱅상은 뜻밖의 상대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예상한 바다. 감춰지지 않는 상대의 거리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백작님은?”

“…씻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뱅상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자카리는 항상 전쟁을 끝내고 성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목욕을 하곤 했다.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아내라는 이가 그런 것 하나 모르다니, 정말 백작님에 대해 관심이 없구나 싶어 뱅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네.”

비앙카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림이 없는 것에 작게 안도했다.

갑자기 비앙카가 자카리를 보겠다 나서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뱅상의 눈빛이 의심스레 비앙카를 훑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연덕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꺼림직하다 해도 안주인인 비앙카를 막을 수는 없는 법. 뱅상은 어쩔 수 없이 비앙카를 방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작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그리하지.”

뱅상이 자카리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자리를 피하고 비앙카 혼자만이 방에 남았다. 비앙카는 초조함에 파르르 떠는 손을 옷자락 사이로 숨겼지만, 서성거리는 발걸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자카리의 방은 비앙카의 방보다 훨씬 크고 넓었지만, 그만큼 휑했다. 벽에 별다른 장식용 무늬가 그려진 것도 아니고, 커튼은 밋밋했고, 카페트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무늬였다. 그의 방에 있는 장식이라 할 만한 것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와 벽에 걸린 몇 개의 무기가 전부였다.

주인의 귀환을 맞이하여 일찍부터 신경 쓴 듯 벽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앙카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을 집어 삼키는 불꽃의 흔들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긴장해서 그런지 주의력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오랜만이로군.”

비앙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커다란 남자가 산처럼 서있었다.

그녀의 남편, 자카리 드 아르노 백작이었다.

(삽화)

짙은 눈썹과 그 밑의 날카로운 눈매는 항상 풀어짐 없이 또렷했으며, 콧대는 높은 자존심을 그대로 드러냈고, 딱 다물린 입술에서는 입이 무거운 그의 성격이 묻어났다. 아내가 아닌, 적군의 수장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스물아홉인가. 지금의 그는 비앙카가 죽었던 서른여덟의 나이보다 젊은, 한창인 나이의 청년이었지만 마냥 풋풋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카리의 관록과 연륜은 나이에 비해 훨씬 농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수성가로 두각을 나타낸 귀족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위그 가의 둘째로 태어나서 수도원과 기사,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카리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하고 열여섯의 나이에 검을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열여섯은 그런 나이다. 어른으로 인정받는 나이. 사내는 가문에서 내쫓기고, 여자는 다른 가문으로 팔려가고. 가문에 남아있는 자식들은 대부분 열여섯을 넘기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다. 가문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문의 후계자, 혹은 결혼 장사를 할 필요가 없는 대단한 가문의 여식들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앙카의 나이이기도 했다.

자카리가 검을 들고 나선 나이에, 비앙카 자신은….

비앙카는 떠오르는 상념을 몰아내었다. 괜한 생각을 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비앙카의 시선이 가볍게 자카리를 훑었다.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사슬 갑옷은 벗어낸 그는 훨씬 가벼운 차림새였다. 가벼운 튜닉과 바지, 그리고 가죽 장화. 그의 한쪽 이마를 덮은 은회색 빛 머리카락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목욕을 하던 중에 자신이 방해를 한 모양이었다.

“제가 목욕을 방해한 건가요?”

“아직이야.”

자카리의 대답은 단조로웠다. 그는 언제나 말이 짧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뿐더러, 필요한 이야기 또한 거의 하지 않았다. 그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부차적인 정보를 얻는다거나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끼이이익. 백작 부부 사이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자카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이제 방안엔 정말 두 사람뿐이다. 비앙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가는 목울대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자카리는 문가에서 몸을 떼고 한 걸음, 한 걸음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바로 비앙카에게로 향하는 대신, 그는 그녀와 어느 정도 일정 거리를 둔 위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확실하게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 때를 노리며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는 거리. 그는 마치 사냥감을 향해 빙빙 돌아 접근하는 맹수 같았다. 물론 사냥감은 비앙카, 그녀였고.

자카리는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꿰뚫릴 것만 같다. 비앙카는 자신을 노려보는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겁먹은 듯한 모습은 앞으로 그녀가 늘어놓을 말들에게서 신뢰를 빼앗아간다. 슬핏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앙카는 표정을 가다듬고 허세를 둘렀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자카리였다.

“웬일이지?”

“웬일이라니요.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왔으니 가문의 안사람으로서 찾아뵙는 게 당연한 법도지요.”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아내가 찾아왔는데 웬일이냐니. 비앙카는 애써 웃음지으며 부드럽게 받아쳤지만, 사실 그들 부부가 ‘당연한 법도’ 운운할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카리가 그녀의 방문을 얼마나 당황스러워하는지 공감하는 만큼, 비앙카는 이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에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급한 일인가 보군.”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다는 듯한 말투에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카리와 말하면 말할수록,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부부 사이의 앙금은 생각보다 깊고 단단하여 쉽게 허물어질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비앙카 또한 자카리가 갑자기 페르낭처럼 군다면 되레 마음의 벽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만큼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비앙카는 주먹을 꾹 쥐고, 참을성 있게 답했다.

“…단순한 안부 차 들른 거였어요.”

“그러니까.”

자카리의 까만 눈은 깜빡임 한번 없었다. 그의 시선은 비앙카의 내심을 샅샅이 파악하려는 듯이 집요했다.

“당신이 내 안부를 물을 정도면, 어지간히도 급한 일 아닌가.”

자카리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그의 말에 섞인 이죽임은 툭 튀어나온 못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앙카를 공격했다. 넌 지금껏 나에게 신경 쓰지 않지 않았더냐, 라고 되묻는 것만 같았다.

자카리가 갑작스러운 자신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모두 예상 범위 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고 나니 심장이 거세게 뛰고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안에 있는 것이 돌덩이 같았다. 비앙카는 진정하려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 해야 이 분위기를 누그러트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녀에게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있나보지? 그런 게 있다면 집사 뱅상에게 요구하면 되네.”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저….”

비앙카의 입이 달싹 거렸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그가 그녀의 말을 곡해 없이 들어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비앙카는 드레스를 꽉 쥐었다. 가늘고 쭉 뻗은 하얀 손가락의 뼈마디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일단 그가 믿든 믿지 않든, 그녀로서는 우겨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그, 그녀 둘 다 알고 있다 해도.

비앙카는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마 남들이 보기엔 괴이한 표정일 테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오신 거잖아요. 아내 된 도리로서 찾아오는 게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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