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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장사-8화 (8/192)

#8 십오 년 만의 재회(2)

겨울이 다가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낙엽은 파스스 사라지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눈이 소복이 올라왔다. 그리고 자카리는 한 무리의 군사들을 이끌고 아르노 성으로 돌아왔다.

뱅상은 겨울이 오기 전 흰여우 모피를 구해왔다. 흰여우는 쉽게 잡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하얀 털이 아름다워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발 빠르게 움직인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꾼이나 상인들과 나름의 연결책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 흰여우 모피를 냉큼 구해오다니, 뱅상은 여러모로 유능한 집사였다.

비앙카가 굳이 뱅상에게 흰 여우 모피를 가져다 달라 요구한 것은 사치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과거의 화려했던 추억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각오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비앙카는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내리 감았다. 이런 것을 계속 두르고 있고 싶다면, 계속해서 안락한 삶을 살고 싶다면,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내놓을 것이 있어야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주어지기만을 기대했지만, 이제 세상을 겪을 만치 겪은 그녀는 이제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해야 하는 일 또한, 일종의 ‘대가’였다.

흰 여우 모피를 어깨에 두른 비앙카는 창밖을 보았다. 귀환한 자카리와 그 부하들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온 듯, 창밖으로는 마부들이 말의 고삐를 잡아끄는 모습만이 보였다.

비앙카는 심호흡을 했다. 남편과의 대면이 코앞으로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까 언뜻 본 그의 모습이 눈에 각인된 듯 선명했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뿌옇게 가려진 안개 속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듯 그의 젊은 모습은 반가움보다는 생소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자카리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십오 년도 더 전이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도 하다. 낯선 것도 당연하지. 비앙카는 스스로를 그리 타일렀다.

몇 달 만에 성으로 귀환했지만 자카리는 비앙카를 찾아오지도, 찾지도 않을 것이다. 별다른 용건이 없는 한, 그들 부부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어디까지나 같은 행동반경에서 동선이 겹칠 때 이루어지는 우연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카리에게 있어 전쟁에서 돌아온 일은 별다른 용건조차 되지 못했다.

자카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비앙카는 방을 나섰다. 다리가 치맛단 속에서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 끝을 잡아 당겼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주변 하녀들은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 쳐 그녀를 피했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로비로 향했다.

그녀가 로비로 가까이 갈수록, 사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자카리가 이끄는 아르노 기사단의 이번 출정은 그다지 험난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내들의 낯에 승리의 기쁨만이 흘러 넘쳤다. 기사들은 왁자지껄하게 자신의 무훈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였고, 하인들은 그들을 선망의 눈길로 지켜 보았으며, 하녀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그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아직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들떠 오른 분위기는 이미 연회의 한창이나 다름없었다.

비앙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가 그 놈의 목을 딱! 움켜쥐고 탈탈 흔들었는데….”

“소뵈르.”

아르노 군의 부대장, 소뵈르가 흥분한 태도로 침을 튀기며 자신의 활약을 늘어놓고 있던 찰나, 그의 동료이자 같은 부대장인 로베르가 소뵈르의 옆구리를 툭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한창 신이 났던 소뵈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로베르를 돌아보았는데, 그는 그제야 로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 어어….”

“…….”

로비는 언제부터인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로베르의 턱 끝이 슬쩍 2층의 계단참을 향했다. 소뵈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로베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르노 성의 안주인, 비앙카였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도 섣불리 반발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그녀의 작은 몸집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비를 잠식한 무거운 침묵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비앙카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숨을 들이켠 채 침묵한 이유. 그것은 바로….

“마님께서 소란스러운 이곳에는 어떤 연유로….”

로베르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비앙카에게 물었다. 그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공손하였으나, 암녹색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보는 듯한 불안함이었다.

로베르 뿐만이 아니었다. 로비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에 도사리고 있는 적대감과 거리낌. 그들에게 있어 비앙카는 어리고 까탈스러운 데다,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주인마님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앙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런 그들의 태도에 상처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들키면 다들 자신을 우습게 볼까 두려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더 콧대를 높였고, 지금은 그런 것에 상처받기엔 다른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비앙카의 시선이 로비를 훑었다. 자카리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집사 뱅상을 찾았지만, 뱅상 또한 로비에 없었다. 비앙카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채 로베르에게 물었다.

“백작님은?”

“…방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그래? 왜?”

“몸을 씻으신다고.”

“알았네.”

비앙카는 별 거 아닌 듯 천연덕스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로비에서 자카리를 만날 줄 알았는데. 잔뜩 긴장했던 몸이 일순 풀어지며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었다.

비앙카가 로비에서 사라지고 난 뒤, 약속이라도 한듯 다같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제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던 소뵈르는 그 동안 숨조차 쉬지 않은 듯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로베르는 비앙카가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저러지?”

“뭐가?”

“뭐긴 뭐야. 마님이 여기까지 행차한 게 신기해서 그러지.”

“하긴. 항상 방안에 콕 박혀서 백작님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던 분이셨으니까.”

“…….”

무뚝뚝하니 말 없는 가스파르 또한 로베르와 소뵈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소뵈르와 로베르, 그리고 말없는 가스파르. 아르노 기사단의 부대장인 세 사람은 자카리의 수족과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자카리를 홀대하는 비앙카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자카리가 그녀를 위해 얼마나 신경써주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이것밖에 안되느냐는 듯 구는 걸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들의 안주인은 비앙카, 그녀였는데. 그녀를 욕해봐야 누워서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다. 소뵈르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비앙카의 돌발 행동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별 거 아닌 변덕이겠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야.”

“또 괜히 백작님을 찾아가서 심기 거스르는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면….”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가 막을 수는 없잖아.”

“하긴. 아, 백작님도 백작님이지. 마님이 뭔 소리를 하든 그냥 듣고만 계시고…. 한번 쯤은 화를 내셔도 되는데.”

“아서라, 아서.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바람 불면 날아갈까 찍소리도 못하시는데, 화는 무슨 놈의 화.”

“그러니까 그 어린 신부 비위를 언제까지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하는 소리지!”

로베르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용이 내용이니 만큼 아차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소뵈르가 먼저 눈짓으로 하인들을 물려놓은지라, 그의 불경한 지탄을 들은 하인은 없었다. 애써 진정한 로베르는 언성을 낮췄지만, 미처 삭이지 못한 분이 남아있다 보니 그의 목소리는 이글이글 끓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혼담이 왔을 때,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데리고 소꿉놀이 하게 생겼다며 놀리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다른 혼처를 찾아보라 했었어야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블랑쉐포르 가만 한 가문은 또 없어. 블랑쉐포르 가의 지원 덕에 백작님께서 작위를 얻는 게 더 수월했다고 한 건 로베르, 너잖아.”

“…….”

자신이 했던 말을 끄집어내는 소뵈르의 말에 로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셋 중에서 제일 경박하고 정치판도 읽는 수가 얕은 소뵈르에게 사실을 지적당하니 로베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베르에게 한 소리 하기는 했지만, 소뵈르는 로베르가 왜 그리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로베르는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기는 했지만, 세 부장들 중 유일한 귀족이었다. 그런 만큼 귀족들의 허례허식과 예의를 숭상하며 점잔하고 숙녀들에게 상냥했다. 원래의 그였더라면 귀족 마님, 그것도 그들의 주군의 아내인 비앙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가는 자카리의 충신이었다. 소뵈르와 가스파르 또한 목숨을 내걸 수 있을 정도로 자카리에게 충성했지만, 로베르는 충성을 넘어서 헌신에 가까울 정도였다. 자카리를 위하는 마음을 제일 대놓고 드러내는 이도 그였고, 자카리가 남작이었던 시절 백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는 말에 ‘우리 남작님이 인정받은 것’이라며 제일 기뻐했던 것도 그였다. 그랬던 만큼 비앙카와 자카리의 결혼생활이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더더욱 못마땅했으리라.

소뵈르는 자신의 말에 입을 꾹 다문 로베르를 보며 난처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말을 돌리기 위해 아까 비앙카의 모습을 떠올리며 과장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흰여우 모피는 처음 보는 건데. 또 그새 사재끼셨어. 대단하다, 대단해.”

“…백작님이 허용하신 걸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우리 영지가 모피 하나로 벌벌 떨 정도로 빈곤하지도 않고.”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로베르가 정돈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베르는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투덜댔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와 마음의 문제지. 우리 마님께서는 저 여우 모피를 받아들고 희희낙락하시는 동안 우리 백작님께서 죽을 고생하며 전장에서 구르고 있었던 건 아시나 몰라.”

“확실히 유지비가 많이 드는 장사기는 하지.”

소뵈르의 말에 동감이었던 만큼, 로베르는 그의 입을 다물리는 대신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뚝뚝한 가스파르 만이 그런 둘의 태도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말재간이 없는 그는 두 사람을 말리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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