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7화 (7/192)

#7 십오 년 만의 재회(1)

“백작님은 어디 계시지?”

영주의 행방을 묻는 비앙카의 뜬금없는 질문에 집사 뱅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앙카가 얼마나 자카리에게 관심이 없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만, 이번에는 해도 너무 했다. 그는 비앙카에 대한 힐난을 감추지 않은 채,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영주님께서는 전쟁에 나가셨잖습니까.”

어쩐지. 회귀한 뒤 정신을 다잡기기까지 비앙카는 난리법석을 피웠었다. 아무리 그들 부부 사이가 냉담해도 이정도 소란이라면 한번쯤은 찾아왔을 텐데, 자카리가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때마침 전쟁으로 성을 비웠다니, 여러모로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은 반가웠다. 당장 그를 마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비앙카는 안도의 숨을 속으로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연덕스레 물었다.

“그래?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래?”

“…마지막으로 연락 받았을 때는, 겨울이 올 때쯤 귀환할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흐응.”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보았다. 고갯짓 하나에서도 귀족적인 우아함과 나태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자카리에게 무심한지도. 그녀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던 뱅상은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집사 뱅상은 마흔 쯤 되는 사내였다. 자카리가 남작 위를 받기 전, 위그 가에 있었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했다. 제일 오래된 가신인 만큼 자카리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고, 내성을 관리하는 집사인 만큼 비앙카와 제일 자주 부딪히고는 했다.

이 성에 비앙카를 못마땅해 하고 미워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아마 그 중 제일은 바로 이 뱅상일 것이다. 아마 자카리를 사모하는 하녀들보다도 더 비앙카를 저주하겠지. 게다가 그는 비앙카를 싫어하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아마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뱅상의 태도를 트집 잡더라도, 자카리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사로서의 그는 우수했다. 태도가 재수 없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사감이었을 뿐, 그는 아르노 가의 안주인인 비앙카가 바라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려 노력했고, 그녀를 모시는데 있어서 소홀하거나 트집잡힐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 비앙카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흘러 넘기는 것이다. 정도 이상으로 기어오르지 않고 제 분수를 안다. 비앙카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차피 아랫것들에게 깊은 충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게으름 부리지 않고 제대로 일하고, 주인의 것을 노리는 도둑놈만 아니라면 비앙카는 제법 관대했다….

물론 그것은 비앙카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르노 가의 하인들은 모두 그녀를 꺼려했다. 그녀가 유난스레 못되게 구는 주인도 아니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렇다 해서 현생에서 그 이유를 알아내어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전생의 삶에 대해 후회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 가지 요소에 관한 것일 뿐, 딱히 착한 사람이 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천지가 개벽하였다 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앙카는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졌으면서도 남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내쫓긴 굴욕을 못 잊어 하는 형편없는 아내였다. 되살아나서도 다시 남편을 사랑하겠다 다짐하는 것보다 애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여자. 그것이 바로 비앙카였고, 비앙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신의 안녕과 전생의 업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의 평판, 혹은 타인과의 관계 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뱅상은 창밖을 보며 상념에 빠진 비앙카에게 딱딱한 어투로 되물었다.

“별달리 지시하실 일이라도?”

“아니, 딱히.”

비앙카는 고개를 저었다. 궁금했던 것은 물었으니 이걸로 되었다. 이제 쓸모없어진 뱅상을 돌려보내려고 한 순간, 그녀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맞아. 이번 겨울, 추울 것 같으니까 여우털 모피를 준비해줘. 흰여우가 좋아.”

“…알겠습니다.”

뱅상은 다시 한 번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미 모피가 몇 개나 있으면서도 매번 새 모피를 맞춘다. 남편은 전장에 있는데, 평소와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는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그들의 어린 안주인은 사치스럽기로도 유명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그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 갖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녀와 자카리가 결혼 했을 때, 블랑쉐포르 가에서 보낸 지참금이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지참금은 신부 측에서 보내는 혼수였지만 만약의 경우, 그러니까 신랑이 일찍 죽기라도 한다면 과부가 된 신부에게 그만큼을 더 얹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면 남편이 죽고 난 뒤 신부는 지참금의 두 배만큼의 재산을 갖고 재혼을 하거나 홀로 살아가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딸을 생각하는 신부 측 부모는 줄 수 있는 만큼 지참금을 챙겨주려 했고, 신랑 측에서도 당장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것을 반기기도 했다.

하지만 블랑쉐포르 가에서 제안한 금액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당시 아르노 가의 이 년 치 예산에 육박했는데, 만약 자카리가 전쟁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아르노 영지의 대부분이 그대로 블랑쉐포르 가로 굴러 떨어질 정도의 금액이었다. 결국 자카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참금을 좀 조정해 주십사,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셔온 아가씨는 기품과 오만함을 두른,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꿉놀이를 해주는 대신 보석이나 여우 모피를 사다 나름으로서 비위를 맞춰야 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유모와만 이야기 했으며, 필요한 말 이외에는 사용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작의 혈통인 고귀한 그녀가 근본 없는 것들과는 이야기조차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에는 비앙카의 시선 또한 한몫했다. 블랑쉐포르가의 맑은 연녹색 눈동자는 언뜻 보기엔 봄에 솟아나는 새싹처럼 따듯한 온기를 품고 있었으나, 실제로 마주한 그녀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차가운지 비앙카가 일곱 살일 적부터 기가 약한 이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기가 센 이들은 불퉁하니 치솟는 반발심으로 씩씩거렸다. 그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혈기 넘치는 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뱅상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의 쌀쌀맞은 시선은 이 성의 주인, 아르노 백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할 당시 자카리는 남작이었고, 본가는 자작가 출신의 한미한 집안이었다.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자작가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수도원과 기사,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는 열여섯의 나이에 첫 출전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스물의 나이에 남작의 작위와 함께 아르노 땅을 하사받게 됨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명문 블랑쉐포르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자카리 본인조차도 어째서 블랑쉐포르 백작이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했다.

블랑쉐포르 백작이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깊은 뜻을 딸아이에게 전달해주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일곱 살의 비앙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못마땅한 듯 투정을 부리고 남편인 자카리를 기피했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달래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했다. 비앙카와 함께 식사를 하려 해보기도 하고, 비앙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주기도 하고…. 하지만 무뚝뚝한 얼굴과 험한 말투가 결합되니 썩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카리는 최선을 다했고, 그런 만큼 아내에게 찬바람이 쌩쌩 날릴 정도로 차가운 태도로 홀대당할 이유는 없었다.

뱅상은 비앙카가 지금껏 계속해서 자카리를 밀쳐내는 것은, 그녀가 내심 자카리의 작위와 혈통을 깔보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주인님이 그저 혈통 좋게 태어났을 뿐인 어린 여자아이에게 멸시당하는 것이 분통 터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인 자카리가 그런 그녀의 태도를 흘러 넘기니, 뱅상으로서는 어찌할 바가 없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이제 비앙카는 어린 아이가 아닌 소녀가 되었고, 곧 여인이 될 것이다. 그녀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치러지지 않았던 첫날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정략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사랑이 있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귀족 부부들은 양가 사이에 켜켜이 쌓여진 계약서와, 잠자리를 하며 붙은 정, 그리고 핏줄을 통한 후계자를 의지하며 살아가곤 했다.

후계자. 그 후계자가 생기게 되면 좀 나아질까.

무공으로 작위를 받고 세력을 불린 귀족인 만큼, 자카리는 일련의 절반 가까이를 전장에서 보냈다. 집사이자 가신 된 입장에서 후계도 없는 영주님이 그렇게 위험한 전장을 전전하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부터 후계를 가지시라 계속해서 간청 드려왔는데, 비앙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자카리는 그의 청을 묵살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던가. 남편이 사지에 있는데, 아직도 철이 없는 백작부인은 흰여우 모피나 가져다 달라 요청하고 있지 않던가. 뱅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겨울, 자카리가 돌아오면 다시 한 번 후계에 대해 진지하게 건의 드려봐야겠다. 후계가 생기고 나면 마님께서도 철이 들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뱅상은 혀를 차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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