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악녀, 비앙카(6)
귀족의 딸로 태어났던 비앙카는 철이 없었고, 자신의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내쫓겼다. 차가운 수도원에서 비앙카는 마음을 닫은 채 절절히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다.
내가 왜 페르낭의 사랑을 믿었던 걸까. 왜 나는 자식이 없었을까. 왜 나는 이렇게 내쫓긴 걸까.
비앙카의 모든 후회는 하나의 원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 자카리 드 아르노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내쫓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와 좋은 관계였더라면 페르낭에게 이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위그 자작의 음모에 휘말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열여섯이 아닌, 자카리와 결혼하기 전인 일곱 살의 나이로 회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결국 그녀는 자카리와 결혼했을 것이다. 자카리와 비앙카의 결혼은 비앙카의 아버지가 고르고 골라 진행한, 블랑쉐포르 가를 위한 최고의 정략결혼이었으니까.
그래도 열여섯이라 해도 돌아온 것이 감지덕지요, 천지일우 아니던가.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과분한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만큼은 명백했다. 추운 수도원에서 그려가 몇 번이고 곱씹으며 후회했던 일이니까.
이번 생만큼은 그런 모욕, 그런 굴욕, 다신 겪지 않으리라.
어차피 결혼이 장사라면, 이왕지사 한 몫 단단히 챙겨 나가는 쪽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부질없는 생각을 접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따져보는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다짐으로 반짝였다.
자카리가 죽는 것은 그가 서른여섯 되는 해의 전쟁. 비앙카가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앞으로 7년. 그의 사후, 비앙카가 맨몸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 페르낭이나 다른 사내에겐 눈도 돌려선 안 되었고, 오로지 자카리의 아이를 임신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차기 아르노 가의 후계가 될 것이고, 비앙카는 그 아이가 자랄 때까지 아르노 영지를 다스리며 버틸 수 있다. 아이가 전부 자란 뒤에는 아이가 자신을 보살펴 줄 터이니, 완벽한 대책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녀와 남편의 사이가 아이를 갖기엔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열여섯…. 그렇다면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않은 상태겠네….’
비앙카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밤을 치르려면 아직도 이 년이나 남았다. 그리고 자카리는 절대 먼저 비앙카에게 손을 뻗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절대 급하지 않았다. 만약 가신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첫날밤은 자카리가 죽는 그날까지도 요원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녀에게 남은 칠 년의 시간은 얼핏 길어 보이지만, 자카리가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며 성을 비우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 반절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임신이야 운 좋으면 한 번의 정사만으로도 가능하다지만, 임신이라는 것은 자고로 바라는 사람에게는 한껏 거드름을 빼며 찾아오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냉큼 달려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일일이 따져보고 나면 칠 년은 아이를 갖기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인 만큼, 이년이나 허송세월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비앙카가 먼저 행동해야만 했다. 그를 유혹하든, 설득하든.
비앙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떻게 하지? 나긋하게 그를 유혹해서 그가 손 뻗기를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없는 편에 속했다.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요구해야할까? 가신들이 자카리를 설득한 것처럼, 아르노 가문을 위해서 일찍이 후계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주장하면 자카리 또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비앙카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뻗는다 하여 자카리는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의심하겠지. 언제부터 아르노 가를 그렇게 신경 썼느냐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눈을 흘길 것이다. 애초에 그와 그녀는 타인이나 다를 바 없는 부부 사이, 아니, 어쩌면 타인보다도 못한 사이였으니까.
되짚어 생각해보니, 자카리가 전쟁에서 죽기까지 비앙카가 아르노 가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자신이 자카리였다면 진작 그녀를 내쫓았을 텐데.
어쩌면 내쫓고 싶었지만, 그녀가 돌아갈 친정이 없었기에 불쌍하게 여기고 내버려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후계자를 잃은 블랑쉐포르 가를 완벽하게 집어삼키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고.
비앙카는 후자 쪽이 좀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그녀의 행패를 견뎌줄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결혼은 그저 정략결혼일 뿐이었고, 부부간의 애정과 신의 따위는 존재하지 조차 않았다. 게다가 그가 지킬 신의의 대상은 비앙카가 아니기도 했고. 자카리가 결혼한 것은 비앙카가 아닌 블랑쉐포르 가였다. 그는 블랑쉐포르 가와의 정치적 협력을 공고히 하며 1왕자를 위해 전쟁을 앞장서 주는 것으로 이 결혼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래. 그와 비앙카는 계약관계다. 그들의 목적은 가문의 결합과 번영. 후계라는 목적을 들이댄다면, 그 또한 거부하지 않으리라.
혹여 사랑하는 다른 상대가 있다하더라도.
자카리에게 정부가 있을지도 모른다던 하녀들의 말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는 진저리치며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상대 따위는 짜증만 날 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비앙카는 정말로 자카리에게 정부가 있을까 확인조차 해보지 않았다. 솔직히 자카리에게 정부가 없는 쪽이 더 이상하다는 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낯선 여자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자카리가 그녀와 몸을 겹치는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어떤 여자일까. 농노? 아니면 다른 귀족의 딸? 자카리는 그 여자를 사랑했을까. 비앙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카리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여전했으니까. 물론 다른 여자를 품은 몸을 끌어안아야 한다니, 굴욕적이고 역겨웠지만 타인에게 농락당한 채 자신의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장사를 하는 거야. 결혼도 장사였으니까. 자카리의 아이는 좋은 장사 밑천이 되어줄 거야. 내 지참금도 지켜주겠지. 블랑쉐포르 영지도, 아르노 영지도 그 빌어먹을 자작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거야.’
질끈 감았다 떠진 비앙카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위그 자작 때문이다. 그 잔인하고 간악한 사내에게 있어 동생 자카리의 죽음은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기회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카리의 죽음 또한 그와 연관되었을지도. 자카리의 죽음으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위그 자작뿐이었으니까.
게다가 페르낭이 비앙카에게 접근한 시기를 보아할 때, 위그 자작의 불온한 계획은 진득해진 먼지처럼 오래된 것이 분명했다. 애초부터 그녀를 내쫓을 생각이었기에 페르낭을 접근 시킨 거겠지. 위그 자작은 페르낭을 이용해 그녀를 상처 주었으며 모든 것을 갈취해갔다. 미래도, 과거의 추억도. 그녀의 모든 것을 불쏘시개로 밀어 넣어 놓고는 자신이 쥐게 될 것을 떠올리며 희희낙락했겠지.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고 속이 뒤집어졌다.
만약 자카리와의 관계가 잘 풀리게 되고, 그녀가 순탄히 임신하여 아르노 가의 핏줄을 낳게 된다면-.
그 뒤엔 복수하리라.
위그 자작이든, 페르낭이든. 어떻게든, 언제든지 간에 기필코 꼭. 내가 받은 모욕과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 줄 것이다.
비앙카는 백작가의 딸이었고, 한낱 남작에게 시집가게 되긴 하였으나 결국은 백작부인이 된 여자였다. 그녀의 자존심은 높디높았다. 자카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데에는, 그녀의 높은 자존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의 인생을 고작 자작 되는 자가 잡고 흔들었다니.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분노케 하였다.
창밖에 노을 지던 하늘은 어느새 완연한 어둠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하늘은 지금 그녀의 심정과도 같았다. 지금은 어둡고, 앞이 안 보이고, 끝이 없다. 하지만 해가 떠오르면 언제 밤이 세상을 잠식했냐는 듯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복수라는 이름의 새벽의 여명이 터오를 날을 기대하며, 회귀를 완벽하게 받아들인 비앙카는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중얼중얼 신에게 기도했다.
“…몸의 부활로서 제 죄를 사함과 함께 소원을 들어주시는 그대의 자비를 칭송합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으며, 당신의 뜻이 저와 함께 함을 믿고 행동하겠나이다…. 되살아난 이 목숨을 걸고, 진실로.”
비앙카의 입술이 기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초봄의 새싹처럼 싱그러운 빛을 지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일렁이듯 불꽃이 타올랐다. 쉽게 꺼지지 않을, 집착어린 열망의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