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녀, 비앙카(5)
저도 모르게 페르낭과 자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그와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카리와 했을 때보다 덜 고통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앙카가 페르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페르낭의 것이 자카리의 것보다 작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이것이 불륜이고, 들키면 경을 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비앙카는 막연히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온 세상에 햇빛이 내리쬔 듯 환했으며, 몸은 구름 위에 오른 듯 가벼웠다. 그만큼 비앙카는 페르낭과의 단꿈 같은 연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남편이 전쟁에서 활을 맞고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자카리의 죽음에도 비앙카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도리어 자유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시집오면서 가져 왔던 지참금과, 아버지와 오빠가 전쟁에서 죽고 난 뒤 아르노 가에 위탁된 블랑쉐포르의 영지를 가지고 페르낭과 재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페르낭은 비록 음유시인일 뿐이었지만, 그것이 비앙카와의 결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페르낭과의 자식이 미래의 블랑쉐포르 백작이 된다! 생각만 해도 황홀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찰나에 불과했다. 비앙카가 어딘지 모르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자카리의 형, 롤랑 드 위그 자작이 아르노 영지를 집어 삼킨 뒤였다. 롤랑은 자카리와 비앙카 사이에 애가 없으니 비앙카는 아르노의 사람이 아니라 말했다. 게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비앙카의 불륜을 근거로 들어 지참금 또한 돌려줄 수 없다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블랑쉐포르까지 빼앗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앙카는 격렬하게 항변했지만, 페르낭과의 불륜은 큰 흠이었다. 아무도 비앙카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왕의 백부인 자코브 드 세브랑 공작까지 롤랑의 편을 들고 나서니, 뒷배 없는 비앙카로서는 맨 몸으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비앙카는 애인 페르낭을 믿었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 한 푼 없게 되었지만, 페르낭은 그녀가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사랑할 거라 열렬히 고백했었다. 그 순간 타오르듯 반짝이던 페르낭의 푸른 눈동자는 진실로 가득 차있었다. 비앙카는 애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안고 페르낭을 찾아갔다.
하지만 페르낭은 가진 것 없는 비앙카를 냉대했다.
‘오, 어리석은 마님. 우리의 만남은 끝입니다.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마세요. 당신은 좀 더 기품 있는 여자였잖아요. 이제 가진 것이 없으니 그 기품이라도 간직해야하지 않겠어요?’
‘페르낭, 갑자기 왜 이러나요?’
‘이제 당신과 엮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언제나 꽃처럼 사르르르 지어주던 미소가 페르낭의 얼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매에 남아있는 것은 한심함이 도사린 경멸뿐이었다. 페르낭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입술에 입 맞추었던 기억이 방금처럼 생생한데, 현실의 그는 북풍한설이 따로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린 그의 태도를 믿을 수 없었던 비앙카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무, 무슨 소리에요. 페르낭. 우리는 분명 사랑….’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었겠지요. 불쌍하고도 멍청한 마님. 한순간의 욕정에 눈이 가려져서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다니. 하지만 절 탓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전 분명 저에게 빠지시면 아니 된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페르낭은 입술에 침을 바른 듯 매끄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는 그대로 말하긴 했다. ‘마님, 저에게 빠지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제 이성의 고삐를 죄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올라요. 마님께서 제발 저에게 선을 그어주세요.’ 라고.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영혼을 직시할 듯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덧그리며 움찔댔다. 마치 비앙카에 대한 연정의 감정을 애써 숨기는 듯이.
그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지금까지의 두 사람의 관계가 모두 허상처럼 허물어졌다. 사랑하는 애인의 돌변은 남편의 죽음보다도 매섭게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숨이 턱턱 막혔고, 시야는 어지러웠다. 비앙카는 쉽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찬바람이 으슬으슬 그녀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평소였다면 귀한 흰 여우 모피, 혹은 회색 다람쥐 털을 꿰어 안감을 덧댄 귀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의 몸에 둘러진 것은 낡은 모포자락이었다. 과거의 비앙카라면 발 깔개로도 쓰지 않았을 남루한 것이다. 그래도 비앙카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애인인 페르낭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현실은 음유시인의 노랫가락이 아니었다.
페르낭의 비꼬는 말이 계속 되면 계속될수록, 비앙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의 입술이 옴실거렸지만, 그녀가 받은 상처는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배신의 상처가 너무나 크디커 그녀는 날카롭게 대꾸할 기력마저 잃어버렸다.
‘…나, 난 욕정에 진 게 아니에요. 정말로 그대를….’
‘마님. 필사적인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거짓말하지는 마십시오. 시종일관 자리를 비우는 전쟁광 남편 때문에 외로우셨다는 것 잘 압니다. 그래서 저에게 눈을 주신 것 아니십니까?’
페르낭의 날카로운 말은 비수처럼 비앙카의 여린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는 관계가 파탄 나는 모든 원인을 비앙카에게 돌렸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욕정이라니.
비앙카는 그저 외로웠을 뿐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 커다란 아르노 성에서 작은 어깨를 추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안에 시린 냉기를 더 이상 혼자 견디고 싶지 않았다. 남편인 자카리에게 좀 더 살갑게 대했으면 좀 달랐을까? 하지만 이미 고착화된 관계를 뒤바꾸기엔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외로움에 지친 그녀가 입속의 혀처럼, 단 꿀처럼 구는 화사한 페르낭에게 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르낭은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듯이 굴었고, 남자라고는 자카리 밖에 몰랐던 그녀는 그 사랑을 쉽게 믿었다.
‘덕분에 저는 쉽게 마님을 꾀어낼 수 있었지요. 위그 자작, 오, 이제는 백작이 되신 그분에게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거구요. 마님과의 잠자리는 즐거웠습니다만, 아시잖습니까?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러니 제가 당신을 외면한다 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비앙카의 머리가 띵하니 울렸다. 위그 자작은 자카리의 형으로 그녀를 내쫓은 장본인이었다. 페르낭과 위그 자작이 아는 사이라는 것도 놀랍거니와, 페르낭이 위그 자작에게 보상을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페르낭은 망연자실함을 감추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비에 젖은 고양이 같은 비앙카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마님. 마님의 눈에는 세상이 꽃밭처럼 보인 모양입니다. 갑자기 성에 찾아온 잘생긴 음유시인과 사랑에 빠진다니. 구식 로맨스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이야기 아닙니까. 무언가 이상한 점을 한 톨도 느끼지 못하신 건가요? 어떻게 자랐기에 귀족 마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편하게만 보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페르낭!!’
페르낭은 끝까지 비앙카를 조롱했다. 그녀를 내치고 냉정히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그때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참 뒤에서야 그녀는 페르낭이 위그 자작의 사주를 받고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비앙카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재산도, 사랑도, 자식도, 가족도, 아무 것도. 심지어 추억과 마음마저도.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불쏘시개로 써졌다.
“개자식.”
다시 페르낭을 떠올리니 나오는 것은 욕설밖에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사에 대한 두려움을 페르낭에 대한 사랑으로 꾹 참아 눌렀건만, 그는 욕정이라는 말로 그녀를 기만했다. 더군다나 그 잠자리의 결과가 어떠했던가. 음탕하다는 빌미가 되어 비앙카를 돌바닥으로 내쫓지 않았던가. 페르낭이 그녀를 간절히 유혹한 것은 그녀에게 푹 빠져서가 아니라, 위그 자작의 지시를 받아서라는 걸 알게 되자 남녀 간의 정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비앙카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페르낭은 류트를 튕기고 자신은 가만히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자신이 연애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지만, 그 안에 켜켜이 쌓여있었을 가식과 음모를 떠올리니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기필코 그 잘난 낯짝을 갈아주리라. 비앙카는 짙은 독기가 줄줄 흐르는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