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녀, 비앙카(2)
분명 비앙카는 죽었다. 찬 수도원의 돌바닥에 꿇어 앉아, 잦은 기침을 뱉으며 신께 기도를 드렸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방금 전이었던 것처럼 생생했다.
“신이시여, 제발 저를 가엽게 여기신다면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옵소서. 제가 부족했던 것 압니다. 저는 어리석었고 많은 실수를 했어요. 다음에는 기필코 신실하게 살며, 그런 멍청한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움푹 팬 비앙카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를 딱딱한 수도원 바닥으로 쫓아낸 이들이 조소하고 비웃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비앙카는 소리를 쫓아내려는 듯 신에게 더더욱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신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신이 진정으로 비앙카를 굽어 살폈더라면, 애초에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에 나타나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해줬을 테니까.
그녀의 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병든 몸은 축축 늘어진 채 기력이 없었으며, 눈은 가물가물 감겨갔다. 결국 비앙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몸은 일어날 힘조차 없었고, 비앙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고고히 존재하는 성모상을 올려보았다. 흐릿한 눈에 스치는 성모상의 고결한 표정은 마치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말하는 것만 같았다.
비앙카의 거칠게 갈라진 입술이 설핏 움찔이며 자조의 웃음을 뱉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질척질척하게 희망을 놓지 않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 미소를 끝으로 눈을 감으며, 비앙카는 이번에 눈을 감으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깨어났다. 그것도 무려 풋풋하게 피어오르던 젊은 시절로 돌아온 채.
서른여덟, 수도원에서 신을 부르짖으며 폐병으로 죽어가던 비앙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아르노 성에 있는 그녀의 침실이었다. 아르노 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벽의 무늬, 방안의 배치, 너무나 지나치게 생생한 과거의 모습에 비앙카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꿈? 그게 아니라면 천국의 문을 열기 직전의 마지막 환각?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는 방안에 틀어박혔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차갑고 비참한 수도원 돌바닥 위에 쓰러진 제 시체가 보일 것만 같았다. 그곳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던 비앙카는 첫날 와들와들 떨며 이불 밖으로 나서질 않았고, 둘째 날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술 듯 이리 저리 뒤집어엎었다. 그녀의 거친 손길에 궤짝 안에 있던 모든 귀중품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셋째 날은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넷째 날은 계속해서 요리를 가져오라 하녀들을 닦달하며 하루 종일 우걱우걱 품위 없이 먹고 또 먹었다.
괴상한 행동이 연이어졌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저 성격 나쁘고 나태한 안주인이 변덕을 부리는 거라 여길 뿐이었다.
비앙카는 아르노 성의 안주인이었지만 그를 위한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지지 않았다. 하물며 성의 주인이자 그녀의 남편인 자카리의 내조조차도. 그녀가 관심 갖는 것은 자신의 방의 내장을 꾸미는 것이나 사소한 취미들, 그리고 사치품들을 고르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아르노 성의 그 누가 그녀를 좋아하고 신경 쓰겠는가? 그저 그녀의 친가 블랑쉐포르 가의 눈치를 보아 그녀를 홀대하지 않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비앙카는 조용히 읊조렸다. 며칠 간의 행패로 인해 방안은 엉망진창이었고, 그녀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고동색 머리카락이 미친년처럼 헝클어져 있었으며, 연녹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류트 현을 뜯거나 수를 놓거나, 책을 넘길 뿐이었던 가는 손가락은 방안 이곳저곳을 뒤집어엎느라 손톱이 깨지고 부르터 있었다.
그래도 서른여덟, 동상에 걸려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단정했다. 비앙카는 잠옷 치맛자락을 그러쥐었다. 수도원에서 입고 있던 까끌까끌하던 천과 달리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스쳤다.
비앙카의 지친 눈길이 벽난로 위에 걸린 성모조각상에게로 향했다. 상아를 조각해서 만든 성모상은 비앙카가 혼수로 가져온 귀한 물건이었다. 물론 그녀가 수도원으로 내쫓기면서, 저 조각상 또한 무뢰한들에게 빼앗겼지만….
비앙카가 죽어가며 보았던 대리석 성모상의 은은한 미소가 벽난로 위의 상아 성모상 위에 겹쳐졌다.
꿈도, 환각도 아니다. 이 배고픔은, 피로는, 생생함은….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정말 이게 현실이라고?”
비앙카는 허탈하게 웃었다. 육체는 피로했고, 정신은 한껏 몰려 있었다. 지친 비앙카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멍했다. 몽롱한 머리가 무거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자신의 인생은 무엇이었던 걸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게, 그저 재수 없는 꿈이었던 걸까?
하지만 내쫓겨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 비참함은, 배신당한 사랑의 상처는 꿈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자신을 갖고 논 그 남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로 심장이 욱신욱신 거린다.
이 감정이 그저 꿈일 리가 없다.
비참하게 죽어간 것도 사실이고, 지금 이 곳에 오롯이 있는 것도 현실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걸까?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거란 말이야?”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허허로이 방안을 울렸다.
정말, 정말 그렇다면. 신이 나에게 다시 한 번의 값진 기회를 주신 거라면…!
뒤늦게야 상황을 받아드린 비앙카는 그대로 웅크려 오열했다. 상처받은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서럽디 서러운 울음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렀지만,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다시 마주한 생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 * *
고인 감정을 흘려낼 만큼 흘려낸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얼굴을 단장했다. 감정에 매몰되어있는 건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앙카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만큼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죽어가면서도 간절히 바란 일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기적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인생의 마지막에 수도원에 적을 두기는 했지만, 솔직히 비앙카는 신실한 신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수도원으로 떠밀리듯 향한 것은 그 곳을 제외하고 그녀를 받아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참금을 비롯한 개인 재산을 모조리 빼앗긴데다, 불륜으로 얼룩진 부도덕한 그녀를 반기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수도원에서는 그녀에게 기도하고 참회하며 죄를 덜어내라 했다. 하지만 수도원으로 쫓겨난 비앙카는 신을 증오하기만 했다. 자신의 인생에 후회밖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고된 인생을 내려주는 것이냐 신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녀가 그나마 신에게 잘못했다 빌게 된 것은 수도원에 적을 두고 십오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였다. 그토록 불경한 그녀에게 이런 기적이 내려오다니. 어찌 그 이유를 알겠는가?
비앙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시체처럼 푸르게 질린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거울에 비친 비앙카의 살결은 산양의 우유처럼 희고 부드러웠다. 복숭아의 솜털처럼 솟은 하얀 잔털은 아직 보드라운 뺨에 남아 그녀의 청춘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름 한 점 없이 매끈하고 아름다운 얼굴위에 얹어진 것은 맹목적인 치기가 아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털썩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은 비앙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에 흩어졌다. 비앙카는 그녀가 일곱 살 때, 그녀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비앙카. 사실 오늘, 네 혼담을 넣고 오는 길이다.’
그날은 평소 쉽게 먹지 못하던 초콜릿 케이크가 허락된 날이었다. 어렸던 비앙카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기뻐했다. 비앙카에게 달콤한 것을 잔뜩 안긴 아버지는 온갖 미사여구로 결혼의 장점에 대해 읊었다. 비앙카가 떼쓰지 않고 순순히 제 발로 결혼식장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아르노 가의 자카리 드 아르노 남작이란다. 최근 작위를 하사받았지. 아직 확답 여부는 받지 못했지만, 그쪽에서도 거절하지는 않을 거란다.’
그렇게 설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초콜릿처럼. 그러나 그때 먹었던 초콜릿 케이크는 어딘지 모르게 퍽퍽한 진흙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때의 자신은 아마 본능적으로 자신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눈치 챘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결혼의 끝이 이런 결말일 거라고는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령 예상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결혼 결정을 내리면, 자식으로서는 따르는 수밖에 없으니까. 상대에게 심각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자식은 거절의사를 내비칠 수가 없으며, 심지어 비앙카처럼 어린 나이에는 혹여 상대에게 결격 사유가 있다 하여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