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녀, 비앙카(1)
한때는 명문 블랑쉐포르 백작가의 적장녀였고, 현재는 아르노 백작 부인이 된 비앙카는 녹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 근처에 서서 창밖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잘 다물리지 않은 창문 틈새로 바람이 은밀히 스며들었고, 돌 벽에서는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앙카는 짙은 녹색의 새틴드레스 위에 흰여우 모피를 걸쳤지만, 모피만으로는 벽에서 새어나오는 찬기를 모두 막아내지 못했다. 몸서리쳐지는 추위에 아랫입술이 따닥 부딪혔지만 비앙카는 좀 더 벽에 가까이 달라붙었다. 창밖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창밖에 있는 것은 건장한 한 무리의 군사들이었다. 말에 타고 있는 그들에게선 미처 지우지 못한 전쟁의 기운이 흉흉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투레질을 했다. 모두 혈통 좋은 군마였다.
비앙카가 머무는 삼층 방은 높디높았지만, 창밖에 서있는 사내들의 얼굴을 일일이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비앙카의 연녹색 눈동자가 무리의 제일 우두머리에 있는 사내에게로 꽂혔다.
아르노 가의 집사, 뱅상의 환대를 받으며 유난히 커다란 흑마를 타고 있던 사내가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의 짧은 은회색 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아르노 성의 주인, 철혈(鐵血)의 백작, 그녀의 남편, 자카리 드 아르노의 귀환이었다.
성의 모두가 열렬히 환호하며 그를 반겼다. 그는 패배하는 전쟁을 하는 일이 없었고, 한번 영지를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영지를 부강하게 할 만한 좋은 소식을 물고 왔다. 그는 영지민들에게 제법 사랑받는 영주였다.
본디 가문의 안사람 되는 자로서, 비앙카는 집사의 옆에서 그의 고된 여정을 염려하며 그에게 자수 놓인 손수건을 건네는 것이 옳았을 터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를 맞이하는 대신 높고 딱딱한 성벽 뒤에 몸을 감추었다.
어차피 그녀를 찾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카리는 뛰어난 기사였다. 그는 작위 없는 자작가의 둘째로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지만 그 한 몸만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남작의 작위와 아르노라는 성을 받았다. 그 뒤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며 자작, 그리고 백작의 작위까지 올라서게 되었으며, 철혈(鐵血)의 칭호를 받았다.
비앙카와 약혼할 때만 해도 한낱 남작일 뿐이었는데. 백작가인 블랑쉐포르 가家와는 격이 맞지 않았음에도 비앙카의 아버지는 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그의 가능성을 꿰뚫어 본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인지 용한 점쟁이가 따로 없다. 비앙카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적은 자본으로 훌륭한 결과를 거둔 우수한 사위였지만, 그렇다고 우수한 남편은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 이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언제나 비앙카를 홀로 성에 두고는 전쟁터를 맴돌았다. 마치 죽음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신처럼.
그렇다고 해서 비앙카가 엉망인 결혼의 책임을 모조리 그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은 없었다. 비앙카 또한 좋은 아내는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결혼했을 때 자카리는 스물, 그리고 비앙카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가문을 키우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 출세하고자 하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스무 살의 혈기 넘치는 귀족 청년이 아내로 맞이하기엔 비앙카는 너무 어렸으며, 철도 없었다.
정말 당연하게도 비앙카와 자카리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비앙카는 아르노 가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자카리와도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렇게 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스물아홉. 비앙카는 열여섯이었다. 패기 넘치던 귀족 청년은 많이 담금질 되어 고요하고 묵직한 위엄을 내뿜을 줄 아는 사내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풋풋한 젊음이 남아있었다. 그의 낯선 모습에 비앙카의 심장 언저리가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의 자카리는 얼굴마저 흐려진, 세월에 흘러내린 유화 그림 같은 사내였다. 그만큼 그와 얼굴을 부딪히는 일이 드물었고,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던 지친 시선, 그녀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품지 않은 무미건조함. 그것이 비앙카가 기억하는 자카리의 마지막이자, 그리고 거의 유일한, 느낌에 가까운 기억이었다.
순간 자카리가 비앙카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앙카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의 까만 머루열매 같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비앙카가 있는 곳을 직시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화들짝 놀라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비앙카의 속눈썹이 커다란 연녹빛 눈동자 위에서 파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목련꽃잎처럼 하얀 얼굴에 핏기가 가시니 새하얀 눈밭이 따로 없었다.
“하아….”
비앙카는 숨을 고르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한번 오한이 든 몸은 냉기 때문인지, 앞으로 있을 생소한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계속해서 파르르 떨었다.
어느 정도 진정한 비앙카는 커튼 뒤에 숨겼던 몸을 조심스레 창밖으로 기울였다. 자카리는 거슬리던 시선의 주인이 비앙카라는 것을 확인하고 흥미가 식은 듯, 시선을 돌려 자신의 가신들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비앙카가 두 번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지켜보던 비앙카는, 그가 저택 안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창에 드리운 커튼을 닫았다.
비앙카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을 기도하듯 가슴 위에 포개 잡았다. 그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간만에 보게 된 남편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남편!
비앙카는 혀끝에 울리는 생소한 단어를 어색한 듯 몇 번 더 불러 보았다. 그와 자신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까지는 아니라 해도, 남이나 다를 것 없는 사이였다.
한때 남녀 간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결실을 이루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며 결혼이라는 것은 점점 변질되었고, 작금의 시대에서는 사랑으로 인한 결혼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농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살기 위해 결혼했고, 상대에게 정을 붙이는 것은 그 뒤의 이야기였다.
귀족들의 결혼은 더했다. 귀족들 모두가 결혼을 통해 가문과 가문 사이에 정치적인 결합을 꾀었으며, 그로 인해 이득을 보기를 바랐다. 일종의 결혼 동맹인 셈이다.
날이 갈수록 그 행태는 점점 심각해져, 태중 약혼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결혼 풍습을 ‘결혼 장사’라 조롱하고 비꼬았지만, 귀족들 누구나 다 기회가 된다면 그 ‘장사’를 하려고 애썼다.
비앙카의 결혼 또한 그런 결혼 장사의 결과물이었다. 일곱 살짜리 코찔찔이 계집아이와 스무 살의 뻣뻣한 청년. 그들 사이에 무슨 사랑이 있고, 연애가 있겠는가?
결혼을 장사라 말한다면, 비앙카의 결혼은 실패한 장사였다. 장사품으로 팔려왔지만 비앙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톱니바퀴처럼 끼익끼익 소리를 내다 결국은 멈춰버렸다.
비앙카 드 블랑쉐포르.
자카리 드 아르노의 아내였지만 그의 사후, 사치와 배덕함, 그리고 음탕함을 명분으로 아르노 가家에서 내쳐진 여자. 친가인 블랑쉐포르 가家의 몰락으로 오갈 데 없이 방황한 끝에 초라한 변방의 수도원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여자.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죽게 된 여자.
명예를 모르는 악녀.
그것이 바로 비앙카의 회귀 전 생이었다.
#참고문헌:
마이클 카밀. 『중세의 사랑과 미술』. 예경, 2001.
베아트리스 퐁타넬.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 이봄, 2012.
아일린 파워. 『중세의 여인들』. 즐거운상상, 2010.
양태자. 『중세 뒷골목의 사랑』. 이랑, 2012.
오귀스트 라시네. 『중세 유럽의 복장』. AK커뮤니케이션즈, 2015.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연암서가, 2012.
그 외 네이버 두산 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