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갈무리
다소 허름하다고 느껴지는 판잣집.
허리를 잔뜩 굽은 노파가 문을 세게 열고 들어왔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진 않을까 절로 우려될 만큼 헐렁해 보이는 문이 덜렁거렸지만 노파는 문을 차마 갈무리할 생각도 못 하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 노파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거의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틀림없어. 셀레나, 그년이 분명해.’
노파의 시야에는 광장에 나갔다가 보고 온 초상화가 어른거렸다. 정확히 몇 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왕이 죽고 그의 적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당시에는 소년 왕이었던 그는 성년을 치르고 어엿한 한 나라의 군주로서 자리매김한 지 꽤 되었다.
그러나 평민인 노파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장 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왕의 생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저 제 생계만 방해받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게 어연 육십여 년.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왕가와 얽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몇 주 전, 노파는 평생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왕가의 방해를 받았다.
자작에게 셀레나를 팔아먹기 위해, 셀레나에게 미약을 먹이고 자작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던 그날, 난데없이 들려오는 자작의 외침에 문을 여니 문을 열자마자 살을 꿰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더니 자작이 넘어졌다.
바닥으로 번지는 피에 당황도 잠시, 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은색 늑대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동네 사람들을 부르러 갔었다. 집에 늑대가 있다며 정신없이 동네 사람들을 끌어모은 노파는 늑대를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녀를 반긴 건 빈방뿐이었다.
심지어 자작의 시체마저 없어서 노파는 순식간에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려야 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셀레나가 납치된 게 틀림없다며, 그 아이가 산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했다는 거짓말을 치면서까지 산을 뒤졌다.
비록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저 노파가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세상에 은색 털을 가진 늑대가 어디 있냐며 욕하며 돌아갔지만, 몇 명은 셀레나를 찾아 주겠노라고 합류했다.
그리고 산 중턱에 올라갔을 즈음, 그들은 셀레나의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윽고 황금색 빛이 보였다. 다른 이들은 눈을 가리느라 못 본 모양이지만 노파는 빛이 완전히 시야를 덮기 전에 언뜻 보이던 셀레나의 모습과 은색 머리칼의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다.
셀레나가 빛과 함께 사라진 후, 사람들은 셀레나가 말 못 할 부정을 저질러 신의 저주를 받아 사라진 게 틀림없다며 별 이상한 소리를 씨부렁대며 그녀의 존재를 덮으려 했으나, 노파는 셀레나가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함께 사라진 놈의 짓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놈이 무슨 술수를 쓴 것이야. 촌장네 아들이 말하길 마법…… 이라고 했던가?’
평생을 촌구석에서 살아온 노파는 으레 다른 이들이 그렇듯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촌장의 아들이자 유일하게 수도를 다녀와 식견을 넓히고 온 아서의 말을 토대로 셀레나는 저주에 걸려 사라진 게 아니라 남자가 수를 써서 데려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가 마법을 썼고 셀레나를 데려갔다한들, 노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촌장 아들놈인 아서가 ‘제 능력이 닿는 데까지 셀레나를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기껏 해 봐야 촌마을 촌장의 아들인 그가 할 수 있는 게 많을 리가 없었다.
노파는 일찍이 아서가 셀레나에 대해 알아 올 거라는 기대를 버렸다. 대신 노파는 도망갈 궁리를 했다. 자작의 죽음을 알게 된 자작의 부하들이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야반도주를 계획하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기던 그녀는 문득 새삼 자신이 그간 만들어 온 보금자리를 떠나는 게 아쉬워졌다.
‘게다가 이 나이에 또 어딜 가서 자리를 찾고 정착을 하냔 말이야.’
어차피 자작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다, 만약 자작의 행방을 조사하러 군사가 오더라도, 자작이 마차를 타기 위해 나간 걸 마지막으로 이후에 그를 본 적이 없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주가 흘러도 자작의 군사는커녕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노파는 바깥 사정이 궁금했지만 무서워 집 안에 꽁꽁 숨은 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밖으로 나온 건 아서가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셀레나의 행방을 찾았어요!”
그 말에 노파는 몇 주간 열지 않았던 문을 황급히 열었다. 셀레나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마을 광장에 가서 이번에 왕이 새로이 맞이한 왕비의 초상화를 보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노파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지금 자신과 장난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셀레나와 왕비라는 직위의 연관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왕비와 셀레나가 무슨 상관이 있냐며 화를 냈고, 그 말에 아서가 ‘초상화에 그려진 왕비의 얼굴과 셀레나의 얼굴이 닮았어요.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아요. 할머니도 보시면 단번에 알아차리실 거예요.’라는 말에 그녀는 흔들렸지만 혹여나 자작의 사병과 마주치면 어쩌나 우려가 되었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데 아서가 ‘최근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작이 죽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작위를 이었대요.’라는 말에 안도하며 함께 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마을 광장에서 왕비의 초상화를 본 노파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초상화 속의 인물은 셀레나가 맞다는 것을.
‘틀림없어. 셀레나 년이야.’
직감적으로 왕비와 셀레나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그녀가 왕비가 된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까닭에 노파는 한동안 알쏭달쏭한 얼굴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초상화를 보는데 문득, 노파는 왕의 머리칼 색과 눈동자 색이 은발에 금안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봤던 놈도 은발과 금안을 가지고 있었지. 그년이 산에 숨겼다던 놈이 왕이라면, 왕비가 된 것도, 자작이 죽었는데도 조사 없이 자작위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게 가능해.’
노파는 자신에게 일언반구 하나 없이 홀라당 왕을 따라나선 셀레나에게 분노를 느꼈다. 또한 명백히 셀레나가 제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제 허락을 맡지 않음은 물론,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녀를 데려가 버린 왕에게도 분노를 느꼈다.
‘싹수없는 것들 같으니! 내가 그년을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내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천애 고아였던 셀레나의 어미부터 그녀의 딸까지 아무런 대가없이 키워 온 노파였다. 고생해 가며 다 키워 놓았더니 딴 놈만 좋은 꼴을 보고 있으니 노파의 속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뒤집어진 상태였다.
“망할 년 같으니.”
노파는 퉤, 침을 내뱉으려다가 거실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셀레나의 겉옷을 발견했다. 가위를 들고 와서 그대로 잘라 버릴까, 고민하는데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상대는 왕이지. 무려 왕과 잠을 잤는데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분명 금붙이가 하나라도 있을 것이야.’
노파는 셀레나가 지내던 방문을 벌컥 열고 옷장, 옷가지들, 바구니 할 것 없이 그녀가 쓰던 물건이라면 다 뒤져 보았다. 순식간에 셀레나의 방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걸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노파는 금붙이는커녕 돈이 될 만한 것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망할 년!”
노파는 방을 뒤지느라 바닥에 쌓아 놓은 그녀의 옷가지를 걷어찼다. 발바닥에 차인 옷가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옷가지를 보며 씩씩대는데 옷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금색 눈에 노파가 경악했다.
“네, 네놈은!”
은색 머리칼의 미남자. 셀레나를 데려가 버린 놈…… 아니, 왕이었다. 노파는 라슬로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네놈! 셀레나! 셀레나를 내놓거라!”
노파는 그대로 라슬로에게 덤벼들며 멱살을 쥐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단번에 내쳐졌다. 라슬로가 노파의 손을 쳐 낸 건 아니었다. 라슬로의 주위에 쳐져 있는 금색 결계 때문에 노파의 손이 튕겨 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황망하면서도 놀란 얼굴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제 눈으로 목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마법이구나. 역시 네놈이 셀레나를 데려간 게 맞았어! 그때도 이런 이상한 술수를 썼지! 어서 셀레나를 내놓거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긴! 그년은 내 손녀야!”
“세상 어느 할멈이 제 손녀를 년이라고 지칭하지?”
“호칭이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인 게지!”
“호칭은 그렇다 쳐도…….”
라슬로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고개를 살짝 튼 그가 더없이 서늘한 눈으로 노파를 훑었다.
“세상 어느 할멈이 제 손녀를 팔아먹지? 심지어 미약까지 먹여서 말이야.”
“그, 그건…… 이익!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 손녀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키워 준 은혜를 좀 갚으라고 하는 게 뭐 어때서!”
“키워 준 은혜?”
하, 야트막한 비웃음이 방 안에 울렸다. 그 매서운 기세에 노파는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곧 허리를 억지로 피며 당당한 척 외쳤다.
“그래! 키워 준 은혜! 내가 그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년 어미와 그년을 키워 줬는데 적어도 뭔가를 받는 게 있어야지!”
“…….”
“그러고 보니 네놈이 왕이라지? 네놈이 원하면 셀레나에 대한 권리를 이 자리에서 포기할 수 있다. 대신…….”
노파는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서 원을 그렸다.
“셀레나 년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어.”
“그러니까, 지금 그쪽 말은 셀레나의 값을 치르면 신경 쓰지 않겠다…… 이 말인가?”
“그래. 값만 치르면 내 절대 간섭하지도, 발설하지도 않지. 참고로 자작님께서는 금 2괴를 내게 주신다고 약조하셨네.”
“금 2괴라…….”
“…….”
“좋아. 그 이상을 주지.”
“역시 왕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구먼.”
노파가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년의 몸값은 언제 줄 거지? 최대한 빨리 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라슬로가 손을 뻗어 마나를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금괴들이 생겼고, 근처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이는 금괴들을 보는 노파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바닥에 앉아 금괴들을 줍던 노파의 머리 위로 금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악!”
노파가 인상을 쓰며 라슬로를 노려보는데 다시금 그녀의 위로 금괴가 떨어졌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무심코 천장을 올려 본 노파의 얼굴이 곧 새하얗게 질렸다. 천장에 황금빛을 띠는 금괴들이 공중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 이건 너무 많……!”
“많다니, 셀레나의 가치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 정도이지. 내 넓은 아량에 감사하도록.”
라슬로가 손을 내리자 천장에 떠 있던 금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노파의 동공 위로 황금 비가 서렸다.
차마 말을 내뱉진 못하고 그저 입술을 방긋거리던 노파가 곧 비명을 내지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렸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이 나올 수 없었다.
쏟아져 내린 황금 비 아래로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바닥을 뒤덮었다.
* * *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블리크는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은색의 미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폐하, 제발 이렇게 번쩍번쩍 나타나지 말아 주십시오. 제 심장이 놀라 떨어져 버리면 폐하께서 책임져 주실 겁니까?”
“엄살이 심하군.”
“엄살 아닙니다. 서류 정리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시면 놀란단 말입니다.”
제 가슴을 쓸어내린 블리크가 투덜거렸다.
“블리크.”
“예.”
“지금 내 차림새가 어떻지?”
“차림새 말입니까?”
블리크의 시선이 라슬로의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말끔한 셔츠 차림에 크라바트를 매고 겉 조끼까지 갖춰 입은 그는 그야말로 말쑥한 차림새였다.
“완벽하십니다만…… 옷차림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방금 떨거지를 하나 처리하고 왔거든. 셀레나를 만나러 갈 건데 혹시 핏자국이 묻진 않았을지 걱정돼서 말이다.”
그 말에 블리크는 별말도 안 되는 걱정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왕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한 마법사인 그가 설마하니 떨거지를 처리하면서 피 튀기는 것 하나 관리 못했을까. 실드만 쳐도 다 막아지는 것을.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완벽하시니까요.”
“그렇군.”
“그런데 설마, 그거 물으시려고 오신 겁니까?”
블리크는 ‘아니죠?’하는 얼굴로 라슬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맞다.”
그 뒤에 들려오는 대답에 제 신뢰가 와장창 깨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각인의 상대에게는 헌신적으로 변하게 되고 그 상대만을 위해 살게 된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그럼 이만 가 보지.”
라슬로가 순간 이동을 하려는 듯 마나를 응집시켰다. 그 기운을 느끼며 블리크는 애써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전에 각인의 상대를 찾아 힘을 보완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라고 했던 자신의 입을 때려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라슬로가 이동한 곳은 왕비궁의 침실 문 앞이었다. 기실 마음만 먹으면 침실 안으로 이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셀레나를 배려해 주고 싶었다.
물론 셀레나에 대한 배려와는 별개로 문을 지키고 있던 시녀와 시종은 그를 보고 놀란 얼굴이었지만 라슬로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곧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을 읽고 있는 셀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이름 모를 약초들이 한가득이었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잘 오셨…… 라슬로?”
“조금 섭섭하군. 선생님이라니.”
“아, 미안해요. 이 시간대에 당신은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당신인지 몰랐어요.”
셀레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라슬로는 셀레나가 있는 쪽으로 가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바라보았다. 제법 열심히 공부를 한 건지 책 위에는 셀레나가 쓴 걸로 보이는 글자들이 막 써 있었다. 라슬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나도 모르겠군.”
그의 말에 셀레나가 옅게 웃었다.
“공부하면 알 수 있어요.”
“공부라…… 공부하는 게 재밌나?”
“그럼요. 참, 요즘 제가 공부하고 있는 이 약초가 허리 통증에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공부해서 보급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 노인분들을 상대로 무료로 증정해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라슬로는 약초를 들고 자신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셀레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는 실로 아름다웠다.
“라슬로?”
재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늦게 그가 정신을 차릴 정도로.
“아…… 그렇게 해. 네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정말요?”
“그래. 너는 내 하나뿐인 반려니까.”
그 말에 셀레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양 뺨에 홍조를 띤 그녀가 라슬로의 시선을 피하며,
“난 다른 걸 공부하고 싶은데.”
“다른 거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라슬로가 셀레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흰 얼굴 위로 마치 달을 담아 둔 듯한 연회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슬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알고 싶나?”
“궁금한걸요.”
“궁금하다면 알려 줘야지.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건…….”
그가 고개를 숙여 셀레나의 목가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손이 봉긋한 가슴을 뒤덮자, 그제야 셀레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라, 라슬로…… 아직 낮인데…….”
“낮인 게 뭐가 문제지? 내 달이 여기에 있는데.”
“하지만 밖에 시녀들과 시종들이 있잖아요. 선생님도 언제 오실지 모르고…….”
“괜찮다. 밖에 결계를 걸어 두어 못 들어올 테니까. 우릴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흐윽!”
돌연 라슬로가 이를 세워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에 셀레나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뜨거운 숨이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그 감촉에 취한 나머지 셀레나는 자신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는 사실도 몰랐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책이 보이고 약초의 향이 코끝을 맴돌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눕혀졌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 정말 짓궂어요. 공부 중이었던 거 뻔히 알면서…….”
“내게는 이쪽을 공부하는 게 더 급해서 말이야. 흥미롭기도 하고.”
그 말과 함께 옷이 사르륵 벗겨진다. 셀레나는 제 목가에서 가슴께로 내려가는 숨결을 느끼며 그를 끌어안았다.
각인의 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