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려
셀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밝은 빛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깜깜한 어둠이었다. 사물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깜깜한.
갑작스러운 어둠에 셀레나가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마 그녀를 안고 있는 팔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팔? 게다가 이 감촉…… 맨살이잖아. 누가 날 안고 있는 거지?’
그녀는 다소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위로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은색 머리칼이었다. 연이어 은색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수려한 얼굴이 보인다.
“아…….”
그제야 셀레나는 자신이 무얼 했는지 떠올랐다. 마을을 버리고,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남자를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남자를 따라왔다.
‘혹시 나, 멍청한 짓을 한 건 아닐까?’
그녀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번졌다. 문득 용병을 따라 나갔다가 사창가에 팔려 자신을 임신한 뒤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왔다던 제 어미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처럼……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자. 이 남자는 나를 팔 것 같진 않은걸. 오히려……’
자신을 너무 사랑해 줘서 문제였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셀레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던 입맞춤과 남자의 애무, 그리고 제 안으로 들어왔던 뜨거움 역시 기억했다. 셀레나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와, 속눈썹 정말 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남자의 은색 속눈썹이었다. 색이 밝은 탓인지 그의 속눈썹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길게 뻗은 속눈썹에 셀레나는 한동안 눈을 돌리지 못했다. 문득 남자의 속눈썹만 너무 오래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어둠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략 형체는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던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입술에서 멈추었다.
‘저 입으로 날…….’
지난 일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면서 아랫배에 이유 없이 힘이 들어갔다. 온몸을 휘감은 부끄러움에 더 이상 남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가 고개를 내리려는 순간,
“감상은 다 끝난 건가?”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그녀는 고개를 내리려던 것도 잊고 라슬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었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긴 은색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금색 눈은 지금 막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했다.
“죄송해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상관없다. 보라고 내버려 둔 거니까. 그나저나 감상한 소감은 어떻지?”
“네?”
“내 얼굴이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다.”
“아, 그…… 그, 정말 잘생기셨어요.”
“그게 끝인가?”
“어, 어, 그, 잘생겼고 속눈썹이 특히 긴 것 같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한 걸까.’
셀레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했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망함에 괜스레 시선을 내리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드나 보군.”
“……네.”
“다행이군. 반려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걱정했거든.”
“반려요?”
“그래. 반려.”
셀레나가 반문하자 라슬로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쇄골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 숨결에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여기 있는 이게 네가 내 반려라는 증거지.”
쇄골 위로 입술의 촉감이 느껴지자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피부 위로 닿는 감촉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셀레나는 멍한 눈으로 시선을 내려 제 쇄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쇄골을 본 셀레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그녀의 쇄골에는 붉은 반점들 대신 붉은색의 문양이 선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반점들뿐이었는데……?’
“이게, 당신의 반려라는 증거라고요?”
“그래.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족 중에서도 신수, 일카이의 힘을 짙게 물려받은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반려를 갖는다고 하더군. 그 반려를 알아볼 수 있는 게 각인이다. 내 등 뒤에도 너와 똑같은 문양이 있지.”
‘이 문양이 이 남자에게도…….’
묘한 느낌이 셀레나를 감쌌다. 말을 들어서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남자와 유대감이 생긴 느낌이었다.
‘잠깐. 그런데 왕족? 신수?’
일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왕족이요? 그리고 신수라니, 무슨…….”
“이전에 네가 늑대로 착각했던 모습 기억나나?”
셀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 본체다. 신수, 일카이의 후손이라는 증거이자 내가 그의 힘을 짙게 물려받았다는 증거지.”
“하지만 일카이는 건국 왕의 이름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를 신수라고…….”
말을 하던 셀레나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건국 왕과 똑같은 신수의 이름, 그리고 남자가 언급한 왕족이라는 단어와 남자의 본체…… 혹시?’
“당신, 왕족인가요?”
“정확히는 왕이지.”
‘왕…… 이라고? 맙소사.’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전혀 상상도 못 해 본 전개였다.
“많이 놀랐나 보군.”
셀레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하얬다.
‘왕이라니!’
왕이라면 그녀가 있는 땅에서 가장 높은 존재였다. 그녀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하고 드높은 존재.
귀족 중 낮은 계급에 속하는 자작마저 어찌 못해 그저 저항하는 게 전부였던 그녀에게 라슬로의 정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말…… 왕이신가요?”
“못 믿는 건가? 왕관이라도 보여 줘야 믿으려나.”
“아니, 못 믿는다기보다는, 그저 놀라서요.”
“내가 왕이라고 해서 놀랄 건 없다.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라슬로가 조곤조곤 속삭이며 셀레나의 가슴 둔덕을 핥았다. 셀레나는 가까스로 신음을 참았다. 몸이 움츠러들고 다리가 절로 꼬인다.
그사이 라슬로의 입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 위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이 그녀의 가슴을 물었다.
“흐윽…….”
기어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입을 조물거릴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기분 좋은 자극에 아래쪽이 점점 흥건해진다. 남자의 손이 모은 두 다리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 잠깐만요, 폐하. 지금은…….”
“폐하 말고 라슬로.”
“네?”
“이름을 불러 달란 소리다.”
동시에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음부에 닿았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야릇한 감각이 올라온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폐하의 이름을 부를 수가…….”
“내가 왕이라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넌 내 반려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폐하의……”
“네 입에서 폐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추가하겠다.”
“네? 그 무슨!”
“지금껏 세 번 불렀던가. 최소 세 번은 더 박아 주지.”
그가 그녀의 다리를 서서히 벌렸다. 점차 벌어지는 다리에 당황한 그녀가 다리를 오므려 보려고 했지만 허벅지가 잡힌 탓에 그녀는 다리를 오므릴 수 없었다. 회음부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셀레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남자의 성기라는 걸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세 번을 더 박는다는 건, 설마…….’
말도 안 되는 숫자에 당황한 셀레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버거웠거늘 세 번이라니.
“폐, 폐하, 잠깐…….”
“네 번.”
순식간에 더 늘어난 숫자에 셀레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달빛에 비친 검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꿀떡, 침을 삼키게 될 정도로 검날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그러나 정작 검을 쥐고 있는 흑발의 남자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는 ‘타마스 데 나자’로 현왕인 라슬로 데 나자 칸의 이복동생이었다. 타마스가 검날의 끝을 잡고 검을 돌려 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이 돌아오셨더군.”
“…….”
“분명 내게 죽었다고 보고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형님이 돌아오신 거지?”
“죄, 죄송…….”
푹―!
살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윽!’ 억지로 비명을 참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복면을 쓴 남자는 제 팔을 꿰뚫은 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곧 검이 팔을 빠져나간다.
찔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픈 고통이 느껴졌지만 남자는 비명을 참았다.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의 무자비한 주군은 제 목을 베어 버릴 테니까.
“알다시피 난 거짓말을 끔찍이도 싫어해. 특히나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 거짓말은 더더욱.”
“죄…… 송합니다.”
“그래도 넌 내가 아끼니까 특별히 이 정도에서 봐주는 거야. 알고 있지?”
“……예.”
“그나저나 이를 어쩐담. 네놈이 흔적을 남기고 오는 바람에 블리크, 그놈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던데.”
“…….”
“아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 이상으로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거든. 난 정말 순수하게 묻고 있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야.”
타마스가 검집 끝으로 남자의 턱을 올렸다. 남자는 덜덜 떨면서 타마스의 금안과 눈을 마주했다. 라슬로와는 다른 채도를 지닌 샛노란 눈이 그를 향해 휘어져 있었다.
“응?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블리크, 그놈은 이미 날 배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잡히는 건 금방 아니겠어? 그러니 어서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이야.”
타마스의 물음에 남자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잔뜩 메말라 붙은 그의 입 사이로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자…….”
“응?”
“왕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여자라고?”
타마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 반응에 용기를 얻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사실 왕이 죽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희는 왕의 흔적을 쫓았고, 곧 왕의 마나가 운용이 된 곳을 발견했습니다.”
“계속 말해.”
“예. 그곳을 조사해 보니 왕의 본체로 추정되는 것이 웬 여자를 데리고 갔다고 하더군요.”
“여자?”
“예. 그리고 그 시기와 맞물려 왕이 귀환했습니다.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이전의 생활과는 달리 침실에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희는 왕에게 각인의 상대가 생기게 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각인의 상대라? 그거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알다시피 형님은 그간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잖아. 그런 형님이 웬 여자를 데리고 있다면 그건 각인의 상대일 확률이 높지.”
타마스는 스스로 한 말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흥미롭네. 혹시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어?”
“……셀레나라고 합니다.”
“셀레나라. 달이라는 뜻인가.”
타마스는 셀레나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며 빙그레 웃었다.
“형님의 달이라…… 마음에 든다. 셀레나.”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얇게 휘었다.
셀레나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앉은 자리의 예닐곱 배는 될 정도로 긴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돼지고기를 이용한 요리부터 갖가지 과일이 들어 있는 황금 잔까지, 살면서 이토록 화려한 식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셀레나는 쉬이 손을 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딱딱한 빵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던 셀레나에게 현재의 식단은 지나치게 과분했던 것이다.
“저…….”
셀레나는 고개를 돌려 식탁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있는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셀레나가 운을 떼자 시녀장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예, 셀레나 님.”
“음식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음식 말이십니까? 식단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요? 원하시는 식단을 말씀하시면 요리사를 시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요!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저는 빵 하나면 충분……”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다는 못 드시더라도 절반은 드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그리 먹이라 명하셨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셀레나는 곤란한 얼굴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의 반은 무조건 먹어야 한다니…….
‘반의반도 못 먹을 것 같은데.’
한숨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셀레나는 억지로 식기를 들었다. 그녀는 정말 못 먹겠다 싶을 정도가 올 때까지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녀가 식기를 놓자 식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배를 쓰다듬었다.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더부룩했다.
‘역시 너무 많이 먹었어.’
그러나 셀레나는 다시 식사를 하던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생길 거란 걸 알았다. 그녀가 안 먹으면 그 음식들이 모두 버려질 거란 말을 들었던 것도 있지만 라슬로에게 밉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라슬로에게 휩쓸려 티를 내지 못했지만 셀레나는 그의 정체를 듣고 난 이후부터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왕이라니…….’
라슬로는 모르겠지만 평민들 사이에서 왕이란 우상시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폄하되는 존재였다. 그중에서 셀레나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말은 ‘왕은 수많은 여자를 마음대로 취한다더라.’와 ‘왕이 본 사생아의 수가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라는 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도 버려질 거야. 어쩌면 엄마처럼 될지도…….’
명색이 왕이니 그녀를 사창가에 팔진 않을 테지만 버려지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셀레나는 시녀를 흘겼다.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시녀장은 라슬로가 꽤 신임을 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라슬로는 필요한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시녀장에게 편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뜩이나 시녀장이 라슬로에게 저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까 겁먹고 있는데, 자신이 시녀장에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비록 라슬로가 자신을 반려라고 말해 주긴 했지만 셀레나는 그녀의 할머니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본디 사내놈들이란 계집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에도 없는 별말을 다 하는 법이지. 그러니, 셀레나. 너도 남자들을 믿지 말거라. 알겠느냐?’
결과적으로 못 미더움에 속하는 건 그녀의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노파의 말을 듣고 자란 셀레나가 생각을 고쳐먹기는 힘들었다.
‘밉보이면 안 돼. 의지하려 들면 안 돼.’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그녀에게는 라슬로가 전부였다. 그에게 버려진다면 그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무릎 위로 주먹을 쥐려던 셀레나는 손에 닿는 지나치게 보드라운 천의 느낌에 지레 놀라며 도로 손을 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은 시녀장에 의해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왕가의 위엄에 걸맞은 정말로 부드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으로 말이다.
혹여나 옷이 구겨지진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눈으로 옷을 살피던 그녀는 구겨진 부분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안도했다.
안도함과 동시에 셀레나는 적막감을 느꼈다. 평소의 이때쯤, 그녀는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할 게 없었다. 바삐 움직여야 할 몸이 가만히 있으려니 온몸이 쑤셨다.
아침 일찍, 정무를 보러 간 라슬로는 저녁에 돌아온다고 했고, 시간은 이제 정오가 지났다. 셀레나는 난데없이 생긴 이 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함을 느꼈다.
‘무언가 대체할 만한 게 있다면…… 아, 그러고 보니 왕성에도 정원쯤은 있지 않을까? 왕성 정원에는 왠지 신기할 게 많을 것 같아.’
그러나 셀레나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말해 볼까? 정원을 가고 싶다는 게 무리한 부탁은 아닐 것 같은데.’
말할까, 말까 고민하며 시녀장을 흘기던 그녀는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예, 셀레나 님.”
“저…… 정원에 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정원 말씀이십니까?”
“네. 가만히 있으려니까 적적해서요.”
일순 시녀장의 얼굴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아…….”
셀레나는 상심했다. 그녀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내리자 시녀장이 황급히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당분간 외부로 내보내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던 터라…….”
“절 밖으로 나가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예.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다. 적적하신 게 이유라면 책을 갖다드릴까요? 혹시 수를 놓으실 줄 안다면 천과 실을 갖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이 이상 말해도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결국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원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시녀장은 그녀에게 몇 권의 책과 천 조각들을 갖다 주었다. 그녀가 가져다준 책을 읽고 수를 놓는 동안 날이 어두워졌고, 저녁을 먹기 전에 라슬로가 침실로 돌아왔다.
“셀레나.”
수를 내려놓고 라슬로를 반기려던 셀레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라슬로는 셀레나의 변화를 바로 알아챘다.
“왜 그러지?”
“제가 착각한 건진 모르겠지만, 폐하께 제 이름을 가르쳐드린 적이 있었나 싶어서요.”
“가르쳐 준 적 없다. 다른 이들이 널 부르는 걸 듣고 네 이름이라고 생각했을 뿐. 혹시 기분이 나빴나? 기분 나쁘다면 부르지 않겠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좋아서 탈인걸요.’
셀레나는 라슬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불현듯 간밤에 라슬로가 자신에게 ‘폐하’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한 이유가 떠올랐다.
‘혹시 폐하께서도 이런 느낌을 느껴서 내게 이름을 부르라고 한 걸까?’
셀레나가 붉어진 얼굴로 라슬로를 바라보는 사이, 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셀레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도 되나?”
“책을 읽고 수를 놓았어요. 그리고 음식도 정말 많이 먹었어요. 시녀장님이 간식도 많이 갖다 주셔서 계속 먹기만 한 기분이에요.”
“음식은 입에 맞나?”
“네. 입에 맞긴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먹다 말았어요.”
“먹다 말았다고?”
“네. 그래도 워낙 많이 먹어서 아직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리고 시녀장님이 말하길 폐하께서 저더러 많이 먹게 하……”
돌연 이마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감촉에 셀레나는 말을 하다 말고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 무슨…….”
“방금 전 날 폐하라고 부른 것에 대한 벌이다.”
“아, 이건!”
“그리고 아까 내가 처음 침실로 들어왔을 때도 폐하라고 불렀지.”
“하지만 아직 폐, 아니.”
“또 불렀군. 어젯밤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라슬로가 양손을 그녀의 허벅지 뒤쪽과 등을 받쳐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당황한 셀레나가 버둥거렸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셀레나는 그가 향하는 곳이 침대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았다.
“잠깐만요! 저희 저녁을 먹어야……”
“저녁은 나중에 먹어도 늦지 않아. 그리고 많이 먹어서 배가 안 고프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셀레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하나였다. 라슬로와 그 짓을 하다가 또 정신을 잃을까 봐 걱정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셀레나는 쉬지 않고 자신에게 박아 대는 그가 너무 버거웠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라슬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나. 저녁은 벌을 다 주고 나서 같이 먹지.”
“그, 그런!”
등 뒤로 침대 특유의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칼이 침대 위로 펼쳐진다. 셀레나는 제게로 내려오는 라슬로의 얼굴을 보며 어쩐지 저녁을 먹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날, 셀레나는 저녁을 먹지 못했다.
이튿날도 셀레나는 비슷한 생활을 해야 했다. 라슬로가 돌아올 때까지 침실에 앉아 수를 놓거나 책을 읽고 그가 돌아오면 잠자리를 가졌다. 그 다음날도 비슷했고, 며칠간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셀레나의 기분은 날로 우울해지고 있었다.
분명 이전 생활에 비하면 지금의 생활은 풍족함, 그 자체였다. 옆에는 그녀를 밤마다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었고, 매 끼니때마다 어딜 가도 받아 보지 못할 음식을 맛보았다.
또한 매일 예쁜 옷과 화장품, 장신구들로 치장을 할 수 있었고 시녀장이 그녀가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다 주었다.
‘편하긴 한데…….’
묘하게 불편했다.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했지만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어 바삐 움직이던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적적감이 드는 것이다.
‘예전처럼 산을 타면서 약초를 캐고 싶어.’
그때는 자신이 무언가 쓸모라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비록 그녀의 할머니가 셀레나에게 ‘쓸모없는 년.’이라며 핍박하긴 했지만 셀레나는 자신이 하는 일을 매우 좋아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하는 일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직 책을 읽고 수를 놓거나 홀로 티타임을 가지다가 라슬로가 돌아오면 그에게 안기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라슬로의 옆에 있는 건 좋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고 정성스레 애무해 주는 게 좋았다. 좋다 못해 까무러칠 정도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란 말이야.’
셀레나가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까? 하지만 어디로? 돌아가 봤자, 또다시 자작님 같은 사람에게 팔릴 텐데.’
숨이 턱, 막힌다. 선택지가 없다는 게, 여기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답답한 일일 줄은 몰랐다. 멍하니 손을 움직이던 그녀는 돌연 제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셀레나 님!”
동시에 시녀장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허둥지둥 움직이는 게 보였다. 왜 그런가 싶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저 바늘에 찔린 게 전부인 만큼 피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시녀장은 기겁하며 의사를 찾았다.
라슬로가 있었다면 당장 치료 마법을 써 주었을 테지만, 그는 현재 방에 없었고 치료 마법을 쓸 줄 아는 이는 하녀장이 아는 한 그가 유일했다. 때문에 그녀는 의사를 찾기 바빴다.
‘그저 바늘에 찔렸을 뿐인데, 의사까지 부를 필요는 없는데.’
기겁하는 시녀장과 달리 셀레나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의사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저 바늘에 찔렸을 뿐인걸요.”
“안 됩니다. 귀하신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걸 그냥 두다니요. 금방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시녀장은 셀레나가 말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그 덕에 몸을 반쯤 일으켰던 그녀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별거 아닌데…….’
셀레나는 붉은 점처럼 그려져 있는 상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시녀장이 찻잎을 두는 선반에서 통을 꺼냈다.
‘분명 이게 메릴 가루였지?’
뚜껑을 열어 보니 연녹색의 곱게 갈려 있는 가루가 보였다. 메릴 가루가 맞았다. 통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온 셀레나는 컵 받침대에 가루를 조금 덜었다.
그다음, 찻잔 속에 들어 있던 찻물을 가루가 적셔질 정도로만 따르고 스푼 끝으로 가루를 섞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루들이 끈적끈적한 점액성을 띠며 엉겨 붙었다.
셀레나는 그 엉겨 붙은 덩어리를 덜어 바늘에 찔린 부위에 올렸다. 메릴 가루 엉겨 붙은 덩어리가 반투명해졌을 때쯤, 시녀장이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오는 동안 시녀장에게 들었는지 의사는 오자마자 셀레나에게 상처를 보여 달라고 했다. 셀레나는 의사에게 손을 내밀었고, 손가락 위에 붙어 있는 메릴 가루 덩어리를 본 의사가 얼굴을 굳혔다.
“이건……?”
그 얼굴에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 스스로 잘 조치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전문의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이니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혹시 내가 잘못한 걸까? 왕성에서는 메릴 가루를 쓰면 안 됐던 걸까?’
셀레나가 혼란스러워하는데 의사가 입을 열었다.
“메릴 가루를 쓰신 겁니까?”
“네. 혹시 무언가 잘못된 거라도…….”
“아니요, 아닙니다. 그저 메릴의 쓰임새를 아는 분을 만나서 놀랐을 뿐입니다. 메릴의 효능을 알고 쓰신 게 맞습니까?”
“향이 좋아 차로도 쓰지만 상처를 소독해 주고 덧나는 걸 막아 주는 걸로 알고 있어서 사용했어요.”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훌륭하십니다. 혹시 그 외에도 다른 식물과 그에 대한 사용법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많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요.”
“혹시 벨라 꽃의 쓰임새도 아십니까?”
“벨라 꽃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효능이 있어서 주로 큰 상처에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혹시 모레임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아시는지요.”
“모레임은…….”
몇 분간 의사가 질문을 하고 셀레나가 대답을 하는 식으로 말이 이어졌다. 의사는 그 뒤로 여덟 개 정도 더 묻고 나서야 질문을 멈추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시군요. 혹시 의사십니까?”
“아, 아니요. 의사는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 식물에 대해 잘 아십니까?”
“고향에서 약초 가게를 운영했거든요.”
“그래서 이리 잘 아셨군요.”
의사는 쉽게 납득했다. 그리고 의사는 셀레나의 지식과 치료 조치가 훌륭했다며 그녀를 칭찬했다. 의사와 대화를 나누며 셀레나는 어쩐지 기분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 뒤로 의사는 몇 마디 더 말을 하다가, ‘나중에 혹 기회가 되신다면 의무실에 한 번 들려 주십시오. 셀레나 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남기고는 침실을 나갔다. 의사가 다녀가고 나서 셀레나는 제 손가락에 붙어 있는 메릴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즐거웠어.’
의사와 약초에 대해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그녀는 적적함을 느끼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와 약초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의무실에 찾아가고 싶은데…… 안 되겠지.’
정원에 나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 침실에만 있어야 하는 신세다. 의무실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여하간 방 밖에 있을 테니 못 나갈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셀레나가 침울한 얼굴로 제 손가락의 상처를 보고 있는데 시녀장이 그녀를 불렀다.
“셀레나 님.”
“네, 네?”
“혹시 바람을 쐬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바람이요?”
“예. 왕성에는 정원이 많습니다. 메릴도 곳곳에 심어져 있고요. 한 번 돌아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라슬로가 못 나가게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제가 나가도 괜찮을까요?”
셀레나가 의아한 눈으로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던 그녀가 바깥에 나가자고 권유하니 절로 의아해지는 것이었다.
사실 시녀장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셀레나를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전에 라슬로가 ‘셀레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타마스, 그놈이 셀레나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셀레나가 위험해진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시녀장은 라슬로의 사람이었고, 라슬로의 명이라면 무조건 떠받들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라슬로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요 며칠간 셀레나와 지내면서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진 걸 내내 걱정스러워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시녀장은 셀레나가 약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밝은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의사가 돌아가자 다시 침울해지는 모습도.
그 모습을 보니 셀레나가 안쓰러워졌고, 시녀장은 잠깐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으로 셀레나에게 산책을 권하게 된 것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안 되지만…… 폐하께서 모르시도록 아주 잠깐만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원에 가시겠습니까?”
시녀장의 물음에 셀레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가고 싶어요.”
망설임 없이 바로 나온 대답에 시녀장이 그녀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정원에는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색색깔의 꽃을 보며 셀레나가 감탄했다.
“너무 예뻐요.”
“왕성 정원사들이 신경 써서 가꾸고 있는 정원입니다. 폐하의 어머님 역시 종종 이곳에서 티파티를 여셨습니다.”
“폐하의 어머님이라면…….”
“전 왕비 전하십니다. 폐하께서 열두 살이실 때 돌아가셨지요.”
“아…….”
셀레나는 낮게 탄식했다.
“왕비님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라슬로가 많이 쓸쓸해했겠네요.”
“예. 더욱이 제2왕비 전하께서 왕비가 된 이후, 폐하는 수시로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셨습니다. 열넷이 되시고 신수의 힘을 자각하신 이후로 그런 위험은 사라졌지만 무언가에 마음을 붙일 여유가 없으셨죠.”
“암살 시도까지 당했다고요? 어떻게 그런…….”
“왕비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제 2왕비 전하께서 정비로 정해지고, 그 자식이었던 타마스 전하께서 후계자로 추진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비가 되신 제 2왕비 전하께 적손인자 장자인 폐하의 존재는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
“다행히 폐하께서 즉위함과 동시에 제 2왕비 전하 역시 돌아가시면서 위험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타마스 전하가 계시기 때문에 실로 불안한 상황입니다.”
“왜인가요?”
“그분을 지지하는 세력도 세력 문제지만 타마스 전하, 본인 역시 폐하의 자리를 탐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셀레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몰랐어. 언제나 커 보이고 듬직한 사람이었던 터라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가슴이 아릿해졌다. 셀레나는 라슬로,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마음과 외로움, 두려움을 모두 이해하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지 그의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셀레나 님께서 오신 이후로 폐하께서 많이 유해지셨습니다. 셀레나 님은 폐하께 긍정적인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제가요?”
“예. 폐하께서 셀레나 님을 보며 미소를 지을 때 제가 다 놀랐지 뭡니까. 폐하께서 그리 웃는 모습은 물론, 편히 있어 하는 모습은 굉장히 오랜만에 봤……”
“호오? 형님께서 이 여자와 있을 때 그렇게 흐트러진단 말이지?”
“누…… 타, 타마스 전하!”
뒤돌아본 시녀장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머리칼에 금안을 가진 남자는 라슬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았다.
‘저 남자가 라슬로의 이복동생이구나. 라슬로의 자리를 탐내는 자…….’
셀레나가 타마스를 보는 동안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자 시녀장이 셀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물러나 주십시오, 전하.”
“이런, 무슨 괴한을 보는 것도 아니고…… 섭섭한걸.”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타마스의 얼굴은 전혀 섭섭한 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경고 드렸습니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하하, 경계가 너무 삼엄한 거 아니야? 그렇게 숨기면 괜히 건드려 보고 싶어지잖아.”
“전하야말로 장난이 심하십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애초에 왕자궁에 계셔야 할 분께서 폐하의 궁에는 왜 오신 겁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별거 있겠어? 당연히 형님을 만나러 온 거지.”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은 별로 집무실에 가고 싶지 않네?”
셀레나가 어쩐지 타마스의 목소리가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 여자에게 흥미가 생겼거든.”
타마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낯선 숨결에 셀레나가 기겁하며 타마스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타마스는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윽!”
‘무슨 힘이……!’
셀레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시녀장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당장 셀레나 님을 놓아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는데. 이미 데려가기로 마음먹었거든.”
“폐하께서 노하실 겁니다!”
“상관없어. 그러라고 데려가는 거니까.”
“그 무슨!”
“형님에게 전해. 이 여자를 찾고 싶거든 왕의 인장을 들고 혼자 날 찾아오라고 말이야. 위대하신 신수의 힘을 물려받은 형님이니, 제 반려의 위치 정도는 쉽게 알아내겠지.”
타마스의 발밑으로 금빛 무리가 일었다. 이동 마법이란 걸 알아챈 시녀장이 재빨리 타마스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황금색 빛이 번쩍였다.
“참, 너무 늦게 오면 이 여자의 안전은 보장 못 한다고도 전해 줘.”
눈을 뜨지 못하는 시녀장의 귓가로 타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팔을 앞으로 뻗었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곧 빛이 사그라지고 시녀장이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어코 타마스가 셀레나를 데려간 것이다.
‘어서, 폐하께 알려야 해…….’
시녀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돌렸고, 그녀는 곧장 집무실로 달려가 라슬로에게 타마스가 셀레나를 납치했다고 말했다.
“셀레나가 타마스에게 잡혀갔다고?”
“예, 폐하.”
“침실에는 내가 결계를 걸어서 그놈이 들어오지 못할 텐데?”
“죄송합니다. 제가 셀레나 님께 정원으로 나가자고 했고, 정원에서 그만 봉변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당분간 셀레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명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셀레나 님께서 너무 적적해하셔서……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시녀장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그의 용서를 구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라슬로의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라슬로는 가까스로 제 화를 삼켰다.
“그래서, 그놈이 셀레나를 데려가면서 뭐라고 한 말은 없나?”
“그게…… 왕의 인장을 들고 홀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장소는.”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신수의 힘을 물려받으신 폐하라면 제 반려의 위치 정도는 쉽게 아실 거라면서…….”
라슬로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 소리에 놀란 시녀장이 몸을 떨며 더욱 납작 엎드렸다. 덜덜 떠는 시녀장을 달랜 건 보좌관, 블리크였다.
“자자, 일은 일어났으니 시녀장님께서는 일단 돌아가십시오. 셀레나 님의 문제는 폐하와 제가 해결할 테니까요.”
“하지만…….”
“여기 더 있으시다간 좋은 꼴 못 보실 텐데요. 저라면 지금 기회가 될 때 나가겠습니다.”
블리크의 말에 시녀장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시녀장이 밖으로 나가자 블리크가 라슬로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
“죽인다.”
“지금 타마스 전하를 죽이면 원로회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그 늙은이들 때문에 그놈을 살려 놨더니 지금 결과가 어떻지? 타마스, 그놈이 날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내 반려를 납치까지 했다.”
블리크는 라슬로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걸 인지했다. 또한 지금 당장 마법을 써서 타마스를 잡으러 가지 않은 게 용한 거란 것도.
“폐하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타마스 전하를 죽이는 것까지 말리진 않겠습니다. 제가 증거를 만들어 원로회에 제출하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끝까지 들으십시오. 현재, 셀레나 님께서 인질로 잡혀 계시니 혼자 가시면 폐하께서 당하실 확률이 큽니다. 특히나 셀레나 님이 죽으시면 폐하께도 그대로 영향이 가지 않습니까.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셀레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한가하게 방안이나 찾을 시간은 없다. 가자마자 타마스, 그놈을 죽인다.”
라슬로의 주위에서 금색 빛무리가 휘몰아쳤다. 블리크는 라슬로가 순간 이동 마법을 쓰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폐하! 이성을 되찾으셔야!”
블리크가 라슬로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그보다는 라슬로가 마법을 완성하는 게 더 빨랐다.
* * *
셀레나는 붕 떠올랐던 몸이 바닥에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라슬로에게 안겨 순간 이동을 했을 때와 달리 시야가 팽그르르 돌았다.
‘어지러워……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되잡으며 주위를 살폈다. 타마스가 셀레나를 데려온 곳은 방이었다. 다만 보통의 방과 달리 그들이 있는 방은 커튼을 쳐 빛이 들어오는 걸 막았고, 가구란 가구에는 죄다 흰 천을 덮어 둔 방이었다. 그리고 천이 덮인 가구들 사이로 유일하게 천에 덮여 있지 않은 게 있었다.
‘왜 저 의자만 천이 안 덮여 있는 거지?’
셀레나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의자를 보는데,
“윽!”
돌연 몸이 내팽개쳐졌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셀레나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타마스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
“아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내팽개쳐 버렸네. 오해는 말아 주라. 내가 원래 여자한테는 제법 살가운 성격인데 지금은 감정이 격해진 상태라서 나도 모르게 그래 버렸네.”
타마스가 바닥에 쓰러진 셀레나의 팔을 잡고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반동으로 튀어 오른 몸이 지나칠 정도로 가깝게 맞닿았다. 그 상태로 타마스는 셀레나를 끌고 가 의자에 앉혔다.
바닥에 내팽개쳐질 때와 달리 폭신함이 셀레나를 감쌌지만 그녀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불쑥, 찻잔이 내밀어졌다.
“마셔. 형님이 올 때까지 적적할 거 아니야.”
“죄송하지만…….”
“내가 잘해 줄 때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걸? 내가 변덕이 좀 심해서 한 번 변덕을 부리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거든.”
타마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샛노란 눈이 어쩐지 위압적이었다.
셀레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내민 찻잔을 받았다. 찻잔을 받는데 손끝으로 무언가 오돌토돌한 게 느껴졌다. 그녀는 곧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반지?’
타마스의 검지에 끼워져 있는 그건, 반지였다. 반지를 유심히 바라보던 셀레나는 반지에 그려 있는 양각이 굉장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지?’
반지를 빤히 바라보는 셀레나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이전에 라슬로의 다리에 박혀 있던 화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살! 그래, 그 화살촉에 새겨져 있던 양각과 같은 문양이야.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이 라슬로를……?’
셀레나는 떨리는 눈으로 타마스를 바라보았다. 시녀장이 했던 말도 그렇고, 화살촉에 새겨져 있던 양각과 그의 반지의 양각이 같다고 생각하니 새삼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마셔?”
“……마실게요.”
그녀는 찻잔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미리 만들어 둔 것인지 찻잔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건?’
잠시 멈칫거리던 셀레나는 이내 타마스의 눈치를 보며 차를 끝까지 마셨다.
“다 마셨어요.”
“한 잔 마시는데 굉장히 오래 걸리네.”
타마스가 빈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제가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요.”
“여하간 계집이란.”
비웃는 듯한 어조에 셀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데려온 건가요?”
“네가 형님의 이거니까.”
그가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셀레나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자 타마스가 다시 말했다.
“아, 반려라고. 반려, 음. 그렇지. 그런 의미지. 정말 기분 나쁘게도 말이야.”
눈에 선연히 보이는 혐오에 셀레나가 바짝 긴장했다.
‘……이 사람은 라슬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
“제가 그 사람의 반려인 것과 지금의 상황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나한테 들킬까 봐 아주 꽁꽁 숨겨 놓고, 궁의 일부에 결계까지 쳐 둘 정도로 아끼는 반려인데 관련이 없을 리가. 결국은 네가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내 손에 들어오게 됐지만 말이야.”
‘밖으로 나와서라고? 그 말은, 라슬로는 이 사람을 경계해서, 이렇게 될 줄 알고 나를 못 나가게 했다는 거야?’
왜 그간 라슬로가 자신을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았는지 알게 되자 셀레나는 그의 말을 어기고 정원으로 나온 게 후회됐다.
“아마 시녀장이 제대로 전달만 한다면 아마 눈이 뒤집혀서 정무도 다 젖히고 바로 달려올걸?”
타마스가 손가락을 들어 제 눈초리를 삐죽 올렸다. 그러다가 스스로의 행동이 웃긴지 쿡쿡, 낮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채 웃는 그를 보며 셀레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비록 라슬로가 자신을 예뻐해 주고 있긴 하지만 셀레나는 타마스의 말처럼 모든 걸 젖히고 달려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남자는 라슬로에게 왕의 인장을 들고 오라고 했어. 라슬로는 오지 않을 거야.’
셀레나는 자신이 ‘왕’이라는 직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오지 않을 거예요.”
“응?”
“당신은 라슬로에게 왕의 인장을 들고 오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즉, 당신은 왕위를 탐내고 있다는 거겠죠. 한낱 평민인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을 라슬로가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는 오지 않을 거예요.”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제가 왕위보다 소중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덤덤히 말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타마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곧 그가 폭소를 터트렸다.
“으하하! 이거 정말 웃기네! 반려가 스스로의 반려에 대해 확신이 없어! 형님이 들으면 참 슬퍼하겠네!”
“무슨…….”
“그렇잖아. 반려라는 건 심장을 맡긴 꼴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런데 그 심장을 맡은 여자가 자길 안 믿는다고 생각해 봐. 정말 슬프지 않겠어?”
“심장을, 맡긴 꼴이라고요?”
“그래. 각인의 상대가 생기기 전에는 보름달에만 힘이 약해지지만 각인의 상대가 생기고 나서는 상대를 죽을 만큼 사랑하고, 상대를 아껴 주게 되지. 말 그대로 자신의 하나뿐인 ‘반려’이니까.”
그 말을 하며 타마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셀레나를 납치해 온 이유도 저 이유 때문이었다.
라슬로가 반려를 찾기 전이었다면 힘이 약해지는 보름달이 뜨는 날에 그를 죽이면 됐지만 반려를 찾은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각인의 상대를 찾은 일카이는 더 이상 보름달이 뜨는 날에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되레 힘이 더욱 증폭되었다.
‘대신, 반려가 죽으면 모든 힘을 잃게 되지만.’
사실 타마스는 셀레나를 발견했던 즉시, 바로 죽이는 게 자신에게 더 이로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재미없잖아?’
그간 라슬로에 의해 자신이 잃어 온 것이 얼마나 많은데 바로 죽인단 말인가. 타마스는 라슬로가 보는 앞에서 셀레나를 죽일 생각이었다.
‘형님이 우리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사실 그의 어미는 라슬로가 왕으로 즉위하면 보복을 당할까 봐 그 전에 미리 자진을 한 거였지만 당시에 어렸던 타마스의 기억에는 그 사실이 왜곡되어 있었다. 라슬로가 그의 어미를 죽였다고 말이다.
‘각인의 상대인 반려가 죽으면 충격이 크다고 하니까.’
일카이의 힘을 옅게 물려받은 타마스에게는 현실을 할 힘도, 각인도, 반려란 것도 없어 저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카이의 힘을 물려받은 자의 반려를 잃은 충격은 세상 그 어느 것과 비할 바가 안 된다고 들었다.
타마스는 라슬로가 좌절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좌절을 즐기다가 목을 베어 라슬로의 죽음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다음 왕은 내가 되는 거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타마스가 미래를 상상하며 웃고 있는데 돌연 쿵,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의자 팔걸이에 쓰러지다시피 누워 있는 셀레나가 보였다.
‘약효가 나타났군.’
약을 판매한 이가 말한 통상적인 시간보다 약효가 빨리 나타난 듯했지만, 체질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 연달아 떠오르자 그는 의심을 거둬 냈다.
‘여자도 기절시켰고, 그럼 이제 남은 건…….’
“타마스.”
마나의 파동과 함께 낮은 음성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돌연히 들려오는 그 음성에 놀랄 법도 했지만 타마스는 빙그레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의 예상대로 자신을 부른 건 라슬로였다.
“왔어? 그렇지 않아도 형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놈이…….”
입 틈새로 새어 나간 음성에는 분노가 한껏 스며 있었다. 실제로 라슬로는 분노한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타마스를 죽이고 싶었지만, 셀레나가 앉아 있는 의자 밑에 깔려 있는 타마스의 마나 때문에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라슬로가 제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셀레나를 내놔.”
“형님이 나한테 명령할 입장이 아닐 텐데. 알고 있잖아? 이 밑에 내 마나를 깔아 두었다는 걸.”
타마스가 셀레나의 발치를 툭툭 건드렸고, 그의 몸짓에 반응한 마나가 팟, 튀었다.
“지금 내게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이라. 뭐, 그렇게 볼 수 있겠네.”
“살려 두었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래, 마음대로 지껄여. 하지만 이건 기억해. 형님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이 여자의 안위는 보장 못 한다는 걸 말이야.”
뱀처럼 살며시 웃으며 그가 셀레나의 뺨에 손을 대려고 했다. 타마스의 손이 셀레나에게 닿기 직전, 라슬로가 짓씹듯이 말했다.
“왕의 인장이라면 가져왔다.”
“아, 가져왔어? 그러면 이리 줘.”
셀레나에게 닿으려던 손이 거두어졌다. 대신 타마스는 라슬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라슬로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에게 목걸이를 넘겼다.
인장을 받은 타마스는 손가락에 체인을 걸어 두고 인장을 검지에서 중지로, 중지에서 약지로 옮겨 다니며 손장난을 쳤다.
“평생 못 가질 것만 같았던 왕의 인장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들어올 줄 알았으면 진즉 형님에게 반려나 찾아 줄걸 그랬네. 그랬다면 더욱 빨리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왕의 인장을 넘겼으니 이제 셀레나를 내놔라.”
“난 왕의 인장을 주면 저 여자를 넘겨준다고 한 적 없는데?”
“뭐?”
“기억을 잘 다듬어 봐. 난 형님이 왕의 인장을 주면 저 여자를 준다고 한 적 없어. 난 그저 달라고 했을 뿐이고, 친절한 형님은 이 아우의 청을 들어주신 것뿐이지.”
“…….”
“그러니 왕의 인장 말고 다른 걸 제시해 봐.”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도를 넘는군.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와, 형님.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형님의 달이 내 손안에 있는데 형님이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내게 빌어야 할 판 아닌가?”
타마스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사실 이건 내가 가지고 오라고 가르쳐 줬던 거잖아. 내가 가르쳐 준 거 말고, 형님이 생각해서 다른 걸 내놔 봐. 혹시 알아? 감동한 내가 여자는 살려 줄지?”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에 라슬로는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제 이복동생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타마스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셀레나를 놔줄 거지?”
“글쎄. 그건 우리 위대하신 형님께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것까지 다 가르쳐 주면 내가 너무 친절하잖아.”
기실 그는 이미 그의 이복동생이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왕위, 그리고 그의 목숨.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슬로는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셀레나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셀레나와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죽고 나면 셀레나는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카이의 피를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자신과 달리 평범한 인간인 그녀는 자신보다는 각인의 영향을 덜 받을 테니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여생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자신에게 그러하듯 웃어 주고, 안기고…….
‘내 반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반려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와 일생을 이어 간다니,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내 목숨 외에 다른 걸 말해라. 네가 원한다면 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살겠다.”
“왜 형님의 목숨은 안 내놓겠다는 건데? 아, 설마 이 여자가 다른 놈이랑 살까 봐? 형님이 없는 곳에서 여자가 사는 게 싫은 거야?”
“…….”
“와, 진짜였어. 미치겠네.”
타마스가 폭소했다. 미친 듯이 웃어 대는 타마스와 달리 그를 보는 라슬로의 얼굴은 한껏 굳어 있었다.
언제 타마스가 돌변할지 몰라 그는 타마스를 경계하면서도 계속 셀레나를 살폈다.
그때, 돌연 타마스가 라슬로의 옆구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황금빛이 나더니 짧은 단검이 생겼다. 이윽고 푹, 살을 꿰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옆구리가 뚫렸다.
라슬로가 신음을 흘리며 곁눈질하자 타마스가 마나로 만든 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른 게 보였다.
“한눈팔면 안 되지, 형님.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렇게 넋 놓고 있어?”
그가 그 말을 하며 더욱 힘주어 검을 쑤셔 박았다. 찔린 부위를 중심으로 근육이 잔뜩 경직되었다. 겨우 고통을 억누르는데 타마스가 검을 확 빼냈다.
“크윽!”
바닥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찔린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치료하려고 하면 치료할 수 있었지만 라슬로는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나를 운용해서 타마스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더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셀레나를 위해 고통을 참는 걸 택했다.
라슬로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타마스가 셀레나를 해치려고 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록 아까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 셀레나가 다른 남자와 살아가는 게 싫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목숨을 위협받는 모습을 보니 역시 자신이 죽어서라도 셀레나를 지킬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셀레나만 무사하다면 족하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셀레나를 바라보는데 기절한 줄 알았던 그녀가 손을 움직여 컵을 붙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몸을 움직인 것도 놀라웠지만 컵을 붙잡는 의도를 알 수 없어 의문을 가졌던 그는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컵을 붙잡은 셀레네가 팔을 들어 타마스의 뒤통수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된 라슬로의 눈이 커졌다.
한편,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타마스는 앞으로 그가 얻을 성취에 취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원통해하지는 마, 형님. 저 여자 역시 곧 보내 줄 테니까.”
타마스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하며 뒤돌아섰다. 다음 순간,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자신의 얼굴이 가격 당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얼굴을 덮친 것이 그의 눈을 후벼 팠다.
“악!”
타마스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제 눈을 후비는 걸 붙잡았다. 정신이 없어 사물을 분간할 여력은 없었지만 매끄러운 표면이 마치 도자기 같았다.
그는 끝없이 제 눈을 후비는 그걸 억지로 떼어 내고서는 재빨리 뒤로 빠졌다. 물러난 자리 위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셀레나는 덜덜 떨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찻잔의 손잡이에는 붉은 피가 범벅이었다. 찻잔을 가득 적신 피는 찻잔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손까지 적시고 있었다.
“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그녀가 찻잔을 떨어뜨렸다. 밑에 깔린 양탄자 덕분인지 찻잔은 깨지지 않고 뭉툭한 소리를 내며 양탄자 위에 박혔다.
‘내, 내가 찌른 거야? 정말로?’
타마스에게 차를 건네받았을 때, 셀레나는 차의 향을 맡자마자 마시면 일시적으로 몸을 마비시키고 심하면 기절까지 하게 만드는 효능을 가진 핀치 약초로 만든 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의 정체를 알아낸 셀레나는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차를 조금씩 바닥 아래로 흘려보냈다.
비록 옷이 젖고 눅눅해질 테지만 기절한 채로 있는 것보단 기절한 척을 하며 방안을 생각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라슬로가 왔고, 타마스가 원하는 게 라슬로의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불어 타마스가 라슬로를 찌르기까지 하자 셀레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그를 구해야 해. 이렇게 바보처럼 당하기만 할 수 없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셀레나는 찻잔을 집어 들어 그대로 타마스를 덮쳤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비명과 손끝에서 느껴지는 물컹함에 셀레나는 자신이 타마스의 눈을 찔렀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타마스를 해칠 생각이기는 했다.
‘그래도 눈을 찌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노여움을 가득 품은 금안이 서슬 퍼렇게 그녀를 응시했다. 타마스의 손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셀레나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망할 계집년이!”
그가 마나를 운용하려는 듯 다른 손을 뻗었고, 셀레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알 수 없는 큰 폭발음이 울렸다. 그러나 큰 폭발음과 달리 셀레나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왜 안 아프지?’
조심스레 눈을 뜨자, 제 앞으로 뻗어진 라슬로의 손과 그의 손끝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보호막이 보였다. 금색을 띠는 반투명한 보호막 너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타마스가 보였다.
그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라슬로가 만든 보호막은 타마스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괜찮나?”
셀레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라슬로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다행이다.”
나지막한 음성. 그 음성에 어쩐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 수 없었다.
그들을 노려보던 타마스가 비속어를 읊조리며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기 때문이다.
타마스의 발치에서 금빛무리가 일었다. 이전에 라슬로가 펼쳤던 이동 마법을 기억하고 있는 셀레나가 라슬로의 팔을 붙잡았다.
“라슬로. 저 사람, 도망을…….”
“괜찮아.”
“하지만 저 사람이 왕의 인장을!”
“괜찮다. 어차피 못 갈 테니까.”
‘못 갈 거라고? 그게 무슨…….’
라슬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는데 주변에 일었던 금빛 무리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순식간에.
“어?”
‘왜 빛이 사그라졌지?’
“뭐, 뭐야! 이거 왜 안 돼!”
당황한 건 셀레나뿐만이 아니었다. 타마스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마나를 운용했다. 빛무리가 재차 일었다가 다시금 가라앉는다.
“제기랄! 이동하라고! 왜 발현이 안 되는데!”
타마스가 계속해서 마나를 운용했지만 마법진은 만들어지다가 이내 흩어지길 반복했다. 수차례 마나를 운용해도 마법이 발현되지 않자, 타마스의 눈이 셀레나와 라슬로에게로 향했다.
“형님이 한 거지.”
“…….”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한 건 없다. 네 욕심이 널 그렇게 만들었을 뿐.”
“웃기지 마! 내 욕심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니! 형님이 분명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잖아!”
“내 말은 사실이다, 타마스.”
“거짓말! 갑자기, 갑자기 마나가 운용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반사적으로 외치던 타마스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번뜩, 지나갔다. 타마스의 시선이 제 손에 들려 있는 왕의 인장으로 향했다. 왕의 인장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혹시, 이거 때문이야?”
“…….”
“맞구나! 다 이거 때문이었어. 내게 가짜를 줬어, 가짜를…….”
“…….”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저년도, 형님도, 그냥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안 죽인 내가 병신이었지. 반려? 각인? 지랄하지 말라고 해. 가짜 왕의 인장을 주면서 날 농락해?”
그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라슬로를 노려보았다.
“죽일 거야.”
“타마스.”
“다 죽일 거야! 형님도, 저년도 죽여 버릴 거라고! 다 죽어 버려!”
타마스가 왕의 인장을 내던지며 마나를 운용했다. 인장이 허공으로 붕 떠오름과 동시에 타마스의 마나가 솟구쳤다. 여태껏 봐 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빛이 터졌다.
‘위험해!’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라슬로를 끌어안았다. 이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셀레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라슬로를 감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양팔 가득 라슬로를 끌어안았을 때,
“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아아악! 뜨거워! 뜨거워어어억!”
생각지도 못한 비명에 셀라나가 뒤돌아보자 황금색 불덩어리가 보였다. 타마스를 삼킨 불꽃은 황금빛을 튀기며 홧홧 타올랐다.
그가 몸부림을 치며 주위에 부딪혔지만 불은 옮겨가지 않고 오직 그에게만 달라붙어 있었다.
“뜨거워! 살려 줘! 살려 줘!”
여기저기 부딪치며 비틀거리던 타마스가 기어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으나 불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끝까지 태우겠다는 듯 더욱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아…….”
불에 타는 타마스를 보며 셀레나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고통스러워하는 타마스의 모습이, 불에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보지 마라.”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을 덮었다. 셀레나는 차마 그 손을 걷어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야가 차단되었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셀레나는 자신의 귀를 막고 싶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라슬로의 옷깃을 힘껏 잡는 것뿐이었다. 얼마 안 가 비명이 뚝, 끊겼다.
대신에 무언가 타는 것처럼 타닥타닥, 불씨 튀어 오르는 소리만 들려왔고, 그 소리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온전히 멎고 나서야 라슬로가 ‘다 끝났다.’라고 말하며 손을 치웠다.
확 트인 시야로 방 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방 안은 처음 셀레나가 납치되었을 때 봤던 것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방금 전까지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타마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가 던졌던 왕의 인장이 놓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라슬로가 왕의 인장을 줍는 모습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열린 문 너머로 블리크를 비롯한 여럿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폐하의 마법 운용이 워낙 빨라 추적이 늦었습니다. 폐하의 흔적을 찾던 중, 이곳에서 큰 마나의 파동이 느껴져 혹시나 하고 찾아왔는데 여기 계셨군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딱히 없다.”
“아니에요. 아까 옆구리를 찔렸어요. 피도 떨어졌고…….”
“옆구리를 찔리셨단 말입니까?”
“큰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으로 치료를 했으니까.”
라슬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까는 자신이 마나 운용을 해서 상처를 치료한다면 타마스가 더욱 흥분할까 봐 섣불리 마나를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타마스가 사라지자마자 그는 마나를 운용해서 상처를 치료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셀레나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치료를 다 했다고? 언제?’
의아해하는 셀레나와 달리 블리크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치료 마법을 쓰실 수 있으셨죠. 지난번처럼 마나 고갈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마법을 써서 치료하신 거군요.”
“그래.”
라슬로가 가벼이 수긍하자 블리크의 시선이 셀레나에게로 향했다.
“셀레나 님께서는 다친 곳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는 없어요. 다만…….”
셀레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타마스의 피로 얼룩진 손이 떨리고 있었다. 라슬로가 셀레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순간 셀레나가 몸을 흠칫 떨었으나 곧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셀레나는 자신이 안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날 안정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잡아 준 걸까?’
어느덧 손의 떨림도 멈추었다. 손에 전해져 오는 온기가 가슴속까지 확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셀레나가 라슬로에게 붙잡힌 손을 바라보는 동안, 라슬로는 블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셀레나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블리크의 시선 역시 셀레나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실 봐도 상관없는 사항이긴 했으나 그는 셀레나의 치부가 될 만한 그 어떠한 것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바닥에 타마스의 피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자신의 피라고 우기면 되었다. 그의 피가 흘린 자국 역시 있으니 우기는 건 더 쉬울 것이다.
셀레나의 손을 감싸 쥐고 매서운 눈으로 블리크를 보자, 그 경고를 알아들은 블리크가 재빨리 말을 둘러댔다.
“어쨌든 두 분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타마스 전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죽었다. 나를 죽이려고 자신의 한계를 넘는 마법을 썼는지 돌연 마나 폭주로 일으키더니 죽어 버리더군.”
“마나 폭주 말입니까? 좀 전에 큰 마나 파동이 느껴져서 설마 했는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줄이야…….”
“사건 해명은 됐고 이만 돌아가고 싶군. 이 뒤는 네게 맡기겠다, 블리크. 증거들이 남아 있으니 타마스의 파벌 역시 처리하기 수월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그래. 널 믿겠다.”
“영광입니다.”
블리크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라슬로가 마법을 운용했다. 금빛 무리가 일어남과 동시에 라슬로와 셀레나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방에 남은 블리크는 뒤처리를 하기 위해 기사들에게 증거들을 수집할 것을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