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完)
긴 겨울이 지났다.
십여 년만의 한파주의보로 강추위가 몰아치고 잦은 폭설이 내렸지만 이연은 생애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때때로 나무들이 동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면, 그녀 대신 권채우가 뒷산에 올라 배롱나무와 감나무를 지푸라기로 감싸주었다.
이연은 시간이 날 때마다 가로수에 입힐 손뜨개 옷을 만들어 지자체에 보냈고, 집안은 점점 아기자기한 아기 용품들로 채워졌다.
우리, 이 겨울을 잘 이겨내고 꼭 잎을 피워내자. 그녀는 겨우내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바야흐로 이연은 먼 과거의 어느 날처럼 나무에 기대앉아 나긋한 멜로디를 듣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서 피어난 ‘사랑의 인사’는 초봄의 날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거진 숲속 한 가운데에는 반짝이는 유리 등잔과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 그리고 곳곳을 장식한 어여쁜 꽃들이 비밀스레 자리했다.
출산을 앞둔 이연을 위해 권채우가 정성껏 준비한 베이비 샤워였다.
이윽고 연주를 마친 그는 면 헝겊으로 지판과 바디, 그리고 브릿지를 섬세하게 닦아냈고, 이연은 그런 권채우의 까만 머리칼, 반듯한 뒷덜미,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 그리고 무릎을 굽히면서 드러난 허벅지까지 쭉 훑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를 비춰오는 햇살에 손차양을 만들다 문득 물었다.
“채우 씨, 나랑 사는 거 심심하지 않아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권채우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내가 채우 씨를 베짱이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단 말이에요.”
“미안하지만 나는 배부른 겨울을 보냈어요.”
“그치만 원래는 좀 더……”
“좀 더?”
“바쁘게 움직였잖아요. 권 가(家)에서요…….”
이연이 바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곳에서의 권채우는 피 냄새를 항시 묻히고 다녔었다. 낮에는 축 늘어져 있거나 잔뜩 날이 서 있었고, 밤에는 새까만 복면을 쓰고 불그스름한 눈동자만 내놓았다.
그랬던 사람이 화이도로 내려온 후부터 마당을 가꾸고, 집안을 쓸고 닦고, 이연의 수발을 드는 소소한 하루하루만 보내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 섰다던 남자가 지금은 가난한 고학생처럼 땅바닥에서 연주를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연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가 과거에 누렸던 부와 명예를 그리워하게 될까 봐.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 떠난다고 할까 봐.
하지만 이연은 모른다.
이 베짱이가 권 가(家)의 다음 후계자가 되어 더 깊숙이 숨어들었다는 사실은.
검찰이 수국 제약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동안, 권채우는 집안의 비밀 계좌를 하나 열어 어린이 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여전히 도박, 사채, 경매 등의 불법 사업은 유지되었지만 사람을 골수까지 이용해 먹던 후원 제도를 끊고, 사냥개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리고 권 가(家)의 가옥을 싹 밀어버렸다.
권기석을 가둬두고 있는 지하만 빼놓고.
형태를 잃은 권 가(家)는 차츰 소문으로만 존재하게 되겠지. 그렇게 낙향한 후계자는 현재 화이도의 숨은 유지가 되어 알게 모르게 이 섬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그들의 아이가 다닐지도 모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대한 전수조사와 화이도 내 범죄자 분포도, 교통사고 다발 지역에 관한 제재 등 그의 손이 안 뻗치는 곳이 없었다.
그것이 현재 이연이 베짱이로 알고 있는 권채우의 뒷모습이었지만 그녀가 여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라는 건 이런 의미였으므로.
“이연 씨, 나는 지금이 만족스러워요.”
“그래도요, 환경이 너무 바뀌면 우울증이 올지도 모른대요.”
이연의 순진한 걱정에 권채우는 간질거리는 명치를 참아냈다.
“비슷한 게 오긴 했죠.”
“네?!”
“근데 내가 우울한 건 아니고, 내 아랫도리가.”
걱정으로 흐려졌던 이연의 눈빛이 일순 냉하게 식기 시작했다.
“울고 싶어 하는데 흘리지도 못해요.”
“야……, 아니, 채우 씨…….”
그는 첼로의 목을 붙잡고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가운 입김을 닮은 소리였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 때문에, 중반부에는 세균 감염 때문에, 지금은 조산기 때문에. 하더라도 짧게 끝내고 과격하게 삽입하지 말라는데, 사람이 안 돌고 배겨요?”
그가 불만을 마구 쏟아냈지만 이연으로선 다소 억울했다. 애무로 온몸을 달궈놓고도 삽입 직전, 겁이 난다는 듯 제 성기만 우악스레 쥐던 게 권채우였으니까. 분을 삭이는 얼굴로 기계적이며 빠르게 사출을 유도한 남자는 이를 악문 채 나중에 두고 보자 했고, 그럴 때마다 이연은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아예 안 할 수는 있어도 한번 시작했는데 짧게는 못 해요.”
“……!”
“당연히, 미쳐서 거칠어질 테고요.”
그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스트레칭 하듯 좌우로 고개를 꺾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해요, 이연 씨 발라먹을 생각만 하고 사니까.”
권채우는 가끔 만세를 하고 자는 이연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그녀의 볼이 헤질 정도로 버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면 한참을 칭얼거린 그녀가 결국 고개를 홱 돌리는데, 그때마다 베개에 눌린 잔머리가 또 환장하게 귀여워 고간이 당겼다.
시도 때도 없이, 아주 습관적으로 좆이 서는 변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뭐가 되든 좋았다. 불현듯 남자의 눈빛이 깊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이연이 타이밍 좋게 말을 돌렸다.
“아, 아주버님들도 초대할 걸 그랬나요?”
그러자 별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권채우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네?”
“……누굴, 누가, 초대해요?”
“어……, 채우 씨 나머지 형들을, 우리가요?”
그의 소슬한 기세에 목소리를 줄이자 권채우는 곧장 표정부터 폈다.
“그런 새, 아니 그런 사람들은 없는 셈 쳐요”
그렇지 않아도 형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예비 아빠가 된 막내의 삶에 다들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일절 연락을 받지 않자 어느 날은 막내의 핸드폰을 해킹한 권이준이 조카의 초음파 사진을 싹 다 털어갔다. 권채우는 그때만 생각하면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내 가족은 전부 여기에 있어요.”
그는 이연의 둥근 배에 이마와 코끝을 오래도록 갖다 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연은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열렸다.
“만약에 아이가 없었어도요―”
“……!”
뜻밖의 화제에 권채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채우 씨가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재생했을 거예요.”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매캐한 불길이 치솟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권채우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응, 나는 그랬을 거예요.”
이연은 한때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을 쓸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줘야 할 엄마가, 정작 이 아이를 뿌리 삼아 두 발로 선 것이다.
아이가 있기에 새로운 내가 되었다는 위험한 오류에 빠져 하마터면 모두를 포기할 뻔했다.
아이를 잃으면 다시 근본 없는 사람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건 그녀가 미처 보지 못했던 제 안의 구멍이었다. 하지만 권채우와 함께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당신을 위해서, 나는 꿋꿋이 살 거고, 살아남을 거예요. 그 어떤 것에도 기죽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거예요.”
“…….”
“얼마나 고된 하루를 보냈든 현관문을 열고 채우 씨 품으로 들어가면 나는……”
“…….”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척박했던 권채우는 그녀를 만나 최고로 너르고 풍요로운 땅이 되었고, 시든 고목 같았던 이연은 그를 만나 비로소 꽃을 피웠다.
“이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어요.”
“…….”
“너무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해요.”
이연은 눈썹을 내리고 권채우의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늦은 말은 아니었는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 바짝 굳어 있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날, 남자는 가슴 한켠에 묵혀두었던 울음을 뒤늦게야 터트렸다. 누군가의 겨울도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봄에는 무당벌레, 나비, 사슴벌레, 애벌레, 하늘소가……”
한편, 일찍이 숲에 도착한 규백이는 곤충 채집 세트를 온몸에 두르고 마구 돌아다녔다.
봄이 온 기념으로 목에는 채집통을 걸고, 한손에는 잠자리채를 든 채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규백이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아이는 나무에 기대어 앉은 이연과 첼로보다 더 낮은 음색으로 무너진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그 순간, 규백이는 아기에게 줄 선물을 마침내 정할 수 있었다. 그건 아홉 살 곤충박사가 직접 쓰게 될 첫 번째 동화책이었다.
“수놈, 나랑 분명 약속했습니다.”
권채우는 어느새 제 어깨에 기대 잠이 든 이연을 보듬으며 누군가의 짤따란 다리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주동미와 추자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다들 어여쁜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채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최근에 이사를 온 장범희를 정식으로 소개할 겸 이 자리에 불렀다. 권채우는 아직 제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태연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수놈이 원장 선생님이랑 결혼하게 도와주면―”
지난날, 권 가(家) 앞에서 남자가 아이에게 속닥거린 말이었다. 돈맛에 정신을 못 차리던 규백이에게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더 무겁고 좋은 금두꺼비도 주고, 또……
“주례 보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랬지. 근데 수놈이 아직 결혼을 못 했어.”
“아닙니다, 나는 요즘 매일 밤 연습합니다.”
“왜, 머지않은 것 같아?”
“코앞입니다.”
규백이의 의미심장한 말에 그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권채우는 흘러내리는 담요를 다시 이연에게 꼼꼼히 덮어주며 눈짓했다.
“그럼 리허설이라도 해 봐.”
“박사의 주례사입니다.”
규백이 두 손을 맞잡고 발꿈치를 들썩였다.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이제는 잠결에서도 술술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의 작은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였다.
“마카로니 펭귄, 회색늑대, 솔방울도마뱀, 긴팔원숭이, 검은 대머리 독수리…―”
“잠깐, 잠깐.”
권채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끊었다.
“대체 그게 뭐야?”
“신랑은 끼어들지 않습니다.”
“…….”
말문이 막힌 건지, 호칭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권채우가 입을 딱 다물었다.
“마카로니 펭귄, 회색늑대, 솔방울도마뱀, 긴팔원숭이, 검은 대머리 독수리, 올빼미 원숭이, 고니, 흰머리 독수리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리의 암컷만 사랑하는 동물입니다.”
권채우의 어깨 위로 풋, 작은 웃음이 터졌다. 이연은 꼼질거리고 싶은 몸을 애써 참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깼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남자는 정수리에 곧장 입술을 붙여왔다.
“앞으로 수놈은 마카로니 펭귄처럼 육아를 담당합니다. 회색늑대처럼 짝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 걸고 달려듭니다. 솔방울도마뱀처럼 암컷을 먼저 보내고 뒤에서만 걷습니다. 긴팔원숭이처럼 새끼들을 함께 키우고 서로 빗질해 줍니다. 검은 대머리 독수리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일 년 내내 붙어있습니다. 고니처럼 짝이 자리를 비우면 먹이를 적게 먹습니다. 올빼미 원숭이처럼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습니다. 흰머리 독수리처럼 최소 이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합니다.”
두 손을 꼭 맞잡은 폼은 퍽 그럴듯했으나 백과사전을 읽는 듯한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이연은 최선을 다해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권채우는 피식 벌어지는 입술을 어쩌지 못했다.
“사실 축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그치만 원장 선생님과 수놈을 보고 있으면 내가 몰랐던 단어들이 막 떠오릅니다. 사전에는 없는 것들이 여기에는 잔뜩 있습니다.”
언제나 무표정이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였다. 무감정했던 얼굴이 휘어지면서 양 볼에 있는지도 몰랐던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책과 곤충이 아니라 사람을 오롯이 마주하는 시선이 찰나나마 반짝거렸다.
“…….”
“…….”
이연은 권채우의 팔뚝을 힘껏 끌어안았고, 그는 퍽 다정한 눈으로 규백이를 응시했다.
태어날 아기에게는 제가 갖지 못했던 순수하고 바른 형이 생길 것이다. 아들은 아빠가 선택한 삶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을 것이며 어쩌면 누구보다 형을 아끼는 아이로 자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중한 형제를 위해 국내 최대의 곤충 생태관을 짓게 되는 남우의 형 바라기는 아주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
“소이연 원장님―! 저 왔슴다!”
“이연아, 내 왔다!”
“도련……”
“……너, 너 이 새끼?!”
초대객들이 하나둘 숲으로 모여들었다.
시끌벅적한 대소동이 벌어지기 몇 초 전.
권채우는 첼로 뒤에 숨겨놓은 나무 상자를 그녀가 얼른 발견해 주기를 바랐다.
그 안에는 소녀가 나무 기둥에 몰래 붙여두고 갔던 노란색 포스트잇이 조약돌처럼 쌓여 있었다. 안녕, 고마워, 힘이 됐어,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라고 속삭였던 소중한 순간들이.
“평생 이연 씨의 꽃으로 살고 싶어요.”
식물로 시작했던 남자는 또다시 식물이 되어 그녀에게 사뿐히 떨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속지 않는다.
거짓말도 필요 없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이 무서운 식물인간을 다룰 수 있는 나무의사는 세상에 저 하나뿐이었으니까. 이연이 자신 있게 귓속말을 했다.
“남편 말고요?”
“……!”
그와 동시에 으르렁거리던 주동미가 장범희를 바닥에 기어이 자빠뜨렸다.
초봄, 축제의 시작이었다.
그날 밤, 이연은 꿈속에서 동화책을 펼쳐들었다. 맨 앞장에는 아기 나무― 라고 썼다가 찍찍 선을 긋고 다시 쓴 흔적이 보였다.
아기 남우에게.
그건 뿌리 깊은 나무와 노래하는 나무가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음악과 나무, 그리고 곤충이 어우러진 화이도에서는 모두가 사랑하며 웃을 수 있다는 편지였다.
그러니까 어서 와.
저자는 이규백, 그리고 제목은…….
또다시 잊을 수 없는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