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다녀왔습니다!”
일주일간의 입원을 끝낸 이연이 대문을 활짝 젖히며 쾌청하게 외쳤다.
텃밭은 조금만 방치해도 바로 지저분해지기 마련인데 그동안 추자가 자주 손을 보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소담했다.
약 사십 일 만에 돌아온 집이 외롭거나 차게 느껴지지 않는 건 권채우와 잡고 있는 강한 손깍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나야 일주일째 똑같은 생각만 하죠.”
“……아직도요?”
이연이 맥없이 손에서 힘을 풀자 권채우가 바짝 쫓아오듯 붙잡았다.
혼인신고서는 결국 모(母)의 성을 따른다는 협의에만 체크를 하고 액자에 넣어두었다.
권채우는 협탁에 올려둔 그 액자를 볼 때마다 뒷골이 당긴다는 표정을 짓다가, 의기소침해졌다가, 어느 날은 칼을 꺼내 사과를 질리도록 깎았다.
임산부보다도 더한 감정 기복을 겪는 남자를 보며 이연은 새삼스레 자신이 쥐고 있는 칼자루를 인식했다.
앞으로도 권채우는 해소할 길 없는 이 갈증을 꾹꾹 참아내며 성질을 부렸다가, 살살 꼬드겼다가, 목소리를 깔고 협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떼를 부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한 번 더 참아주겠지. 낑낑대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자 달짝지근한 숨이 웃음처럼 넘어왔다.
“채우 씨가 자꾸 까먹는 것 같은데……”
“뭐가요?”
“내가 지금 누구 애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권채우는 그녀의 상냥한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더욱 얼굴을 굳혔다.
“날 품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네?”
“그래서 난 그런 말 들어봤자 안심 안 돼요.”
“…….”
“우리 아이는 더없이 소중하지만, 이연 씨가 없으면 죽는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는 냉정히 다른 사람 손에서도 클 수 있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면……”
이연이 놀란 듯 그를 쳐다만 보고 있자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나를 더 사랑해달란 얘기예요.”
평소와 같은 권채우의 실없는 투정일 뿐인데도 오늘따라 귀가 화끈거렸다. 사랑해달라는 말이 꼭 ‘사랑해’로 들려서. 이연은 끝 모르게 갈구하는 남자의 눈빛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커다란 두 손이 이연의 얼굴을 감싸고 눈을 맞춰왔다. 얼결에 제자리로 돌아간 고개가 단단히 고정되었다.
“난 납득을 한 것도 아니고, 물러선 것도 아니에요.”
“……그럼요?”
“역시 프러포즈가 문제였나 싶어서.”
“……네?”
권채우는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윗입술을 깨물며 슬쩍 벌어진 빈틈으로 혀를 넣어 치아를 훑었다. 연약한 속살을 야릇하게 건드리고 지나간 혀끝이 몹시도 느릿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애타게 입술이 벌어지고 살덩이가 겹쳐졌다.
권채우는 파르르 닫히는 이연의 눈꺼풀을 보며 더욱 강하게 살점을 빨아 당겼다. 어디를 핥아 올려도 부드럽고, 뜨겁고, 좁은 입 안이 불현듯 삽입의 욕구를 부추겼다. 권채우는 머리끝까지 치솟은 성감을 낮은 신음과 함께 흘려보내며 혀를 거칠게 쑤셔 넣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결혼을 꺼린다.
이 단순한 결론 하나가 권채우를 미치게 했다. 그녀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분명 마지막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걸 기다려 주고 싶다가도, 확 잡아채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채우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사냥개가 됐다가 백치가 되기를 반복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저만 붕 뜬 것 같은 초조함. 별안간 권채우가 고개를 휙 돌려 그녀의 통통한 뺨을 깨물었다. 타액과 치아 자국이 희고 말갰던 피부에 선명히 남았다.
이연이 앗, 짤막한 소리를 내며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뭐하는―”
그러나 말을 맺기도 전에 다시 우악스런 입술이 맞물렸다. 불꽃이 흉흉히 튀는 눈빛을 맞닥뜨리자 이연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물어 뜯기듯 입술이 삼켜지고 혀가 빨렸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면 뒷걸음을 친 만큼 권채우가 따라붙었다. 그는 멋대로 목구멍을 찌르고 혀뿌리를 뽑아내듯 잡아당겼다. 열기로 부풀어 오른 입술의 표피를 하나씩 탐닉하며 우둘투둘한 혀의 미뢰를 문지르고 쓸었다.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려왔다.
“흐으, 읏.”
권채우는 귀에 엉겨 붙는 신음을 들으며 이연의 날개 뼈와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가 숨을 가쁘게 헐떡이기 시작하자 떼어지지 않을 것 같던 몸을 힘겹게 떨어뜨렸다.
이연은 정신이 쏙 빠진 듯한 얼굴이었고, 권채우는 터질 것처럼 융기한 제 앞섶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개새끼라도 지 새끼 어려운 줄은 알아야지. 그는 암담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뜨겁게 불거져 욱신거리는 부위를 무시한 채 애써 화제를 돌렸다.
“……이연 씨, 이건 못 보던 건데, 뭐예요?”
그는 나무 앞에 조그맣게 솟은 둔덕을 가리켰다. 하지만 열기에 절여진 음성은 그 자체로 위태했다. 이연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 채우 씨 무덤이에요.”
“…….”
일변하는 남자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몸을 겹치고 누워 늘어지게 잠부터 잤다. 솔직히 셋, 아니 넷이 엉겨 붙어 자는 느낌인지라 이연은 픽픽 웃음을 터트렸다.
배 속의 아기, 그리고 권채우가 달고 있는…… 큰 놈 하나.
이연은 마주 안은 자세 때문에 배를 찔러오는 성기에 몸을 뒤척였다.
“채우 씨, 그거 너무…… 불편한데요.”
“왜요?”
“왜냐니, 배에 자꾸 닿아요…….”
“피하지 마요.”
이연이 몸을 물리려고 하자 권채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아당겼다. 사납게 올라간 눈매에 비해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왔다.
“우리 애 고향이 내 좆인데요.”
“…….”
“애기도 반가워하지 않을까요?”
하필이면 그때, 둥― 하고 배가 울렸다. 깜짝 놀란 이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허둥지둥 권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겹쳐진 손바닥 너머로 또다시 미약한 진동이 닿았다. 17주인 것치고는 빠른 태동이었다.
“채우 씨, 방금……!”
권채우는 딱딱하게 굳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과 얼떨떨함으로 얼어붙은 남자는 사고가 정지된 듯 눈도 깜빡이지 않다가, 또다시 태동이 밀려들고 나서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는 이연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기의 서툰 발길질처럼 꼭 그렇게 심장이 뛰었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고 피가 거칠게 돌았다. 간지럽다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그건 단연코 권채우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움직임이었다.
그는 배 여기저기에 입술을 갖다 붙이며 속으로 사과를 했다. 다시는, 말뿐이래도 다른 사람 손에서 클 수 있다고 하지 않을게. 이렇게 깜찍한 걸 누구 좋으라고 맡겨.
권채우는 범람하듯 몰려오는 평범한 감각에 허우적대며 다시 이연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음껏 먹고, 자고, 놀면서 걱정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이연의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면 권채우가 그녀를 번쩍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가가 뻐근할 정도로 잠을 잔 이연은 문득 휑하게 느껴지는 옆자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채우 씨?”
고요한 공기 중으로 목소리가 흩어졌다. 이연은 방 안을 둘러보며 그의 흔적을 찾았으나 집은 서늘한 정도로 조용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며칠간 한 몸처럼 지내다 보니 권채우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채우 씨, 권채우 씨……!”
목소리를 키워 그를 불러 보았지만 텅 빈 거실에 부딪쳐 돌아올 뿐이었다.
그녀는 방이며, 거실이며, 부엌이며, 불이란 불은 다 꺼진 집안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심지어는 아무것도 없는 2층에도 그는 없었다. 오로지 창문에 들러붙는 바람만이 스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마침 등 뒤로 뎅, 뎅, 뎅― 하고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어깨를 흠칫 떤 이연은 익숙한 기시감에 팔뚝을 쓸어내렸다.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잠시 보던 이연은 결국 플래시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곳엔 번들거리는 검은색 우비를 걸친 남자가 삽을 질질 끌며 마당을 지나고 있었다.
“……!”
순간 비명을 지를 뻔한 입술을 깨물고, 눈에 익은 피지컬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채, 채우 씨예요? 채우 씨 맞죠?”
덜덜 떨리는 부름에 권채우가 고개만 살짝 돌렸다. 무정할 정도로 높은 콧대, 그리고 살벌한 눈빛을 확인한 순간 그녀가 벌컥 문을 열었다.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이 야밤에 삽을 들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손끝이 흙투성이인 남자는 그녀를 맥없이 지나쳐 나무 밑으로 향했다.
권채우는 신경질적으로 제 무덤에 삽을 꽂고, 능숙하게 흙을 퍼내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얼마나 깊게, 파묻었으면, 뭐가, 나오지를 않아.”
“…….”
“찝찝해서 내가 여기 살 수 있겠어요?”
“그걸 대체 왜 파요?!”
거기 새싹도 났을 텐데……! 이연이 펄쩍 뛰자 권채우가 허리를 펴며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이대로 둘 생각이었어요?”
“어…….”
그녀가 재깍 대답하지 못하자 권채우는 한쪽 입꼬리를 서늘하게 올렸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이연은 묘하게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표정에 발끈하고 말았다.
“어차피 거기 파 봤자 딱 조각 한 개밖에 안 나오거든요? 지가 쓰던 건 흔적도 안 남기고 싹 긁어갔으면서 이제 와 무슨……! 삽질해 봤자 쓸 만한 건 하나도 안 나와요. 그리고 제발 그 옷 좀 벗어요……! 앞으로 권채우 씨는 밤에 검은색 우비는 물론이고 삽, 칼, 도끼, 이런 건 죄다 사용 금지예요!”
그 말에 권채우가 우비 후드를 휙 젖히더니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파묻을 만한 게 더 있으면 좋았겠어요?”
“네?”
그때, 기어이 땅속에서 제 분신을 끄집어낸 남자가 달빛 아래 목공예품을 비춰보았다.
“아―. 역시 안 썩었네.”
저벅저벅 걸어온 남자는 이연의 손바닥에 차갑고 축축한 그것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래도 이 야밤에 누구 하나 묻는 것보단 파는 게 낫잖아요.”
“그걸 지금 뚫린 입이라고……!”
“그런데요, 이연 씨. 밤에 도구를 못 쓰면 그냥 몸만 쓰라는 얘기예요?”
“…….”
“싸지 말고 또 울까?”
이연은 신소리만 해대는 남자가 얄미워 그의 발등을 콱 밟고 도망쳤다. 그러자 좋아 죽겠다는 듯 눈매를 한껏 휜 권채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 이게 뭐야……!”
앞마당의 나무에 반지며, 목걸이며, 팔찌며, 시계며, 브로치 등 번쩍거리는 온갖 빛깔의 예물이 새끼줄처럼 걸려있었다.
* * *
‘―내가 화이도의 가문비나무가 될게요. 신령목이 있던 자리에 대신 서서 오래된 음악들을 연주할게요.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섬의 유산이 될 때까지.’
붉게 노을이 지는 시간, 권채우는 약속대로 신령목이 사라진 자리에서 매일같이 연주를 했다.
예사롭지 않은 연주 실력은 고작 며칠 만에 소문이 났고,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권채우를 보기 위해 일부러 육지에서 화이도로 넘어오는 관객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는 권 가(家)의 자금을 동원하여 화이도를 아시아의 루체른(*명문 음악제가 열리는 스위스 도시)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문 공연장을 설립하고, 주기적인 페스티벌과 국제 콩쿠르, 음악 아카데미, 동요제까지 유치하면서 이곳을 ‘음악 도시’로 브랜드화하는 사업이었다.
그때 이연은 처음으로 권채우가 독일어를 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럴 때면 낯설고 신기한 기분이 되어 남자의 주변을 서성이며 엿들었다.
그러면 권채우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전화를 이어가다, 급하게 통화를 끊고는 달려들기 일쑤였다. 목을 긁으며 거칠게 내뱉는 소리는 그를 빼다 박은 듯 잘 어울렸다.
“애기 이름은 예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이연은 눈에 띌 만큼 둥글게 나온 배를 안고 권채우와 갈대밭을 걷고 있었다.
“뭔데요?”
“남우.”
“나무요?”
“아니요, 남우!”
“잠깐, 그건 이연 씨 첫사랑 이름 아니에요?”
권채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이연을 홱 쏘아보았다.
“아직도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오해든 아니든, 난 그때 느꼈던 질투만 떠오르는데요. 괜히 기분만 나빠요.”
“그치만 사람들이 남우가 좋대요.”
“대체 무슨 사람들이요?”
“내가 임신한 걸 일찍부터 알았던 사람들이죠.”
권채우는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입가를 가리고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자 속수무책으로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무를 품었어요, 채우 씨.”
“그래요, 나는 당신을 넣고 다니고요.”
그는 살이 올라붙은 탐스러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제 코트를 펼쳐 이연을 쏙 집어넣었다.
이내 두 사람은 끝도 없이 펼쳐진 갈대밭을 둘러보았다. 이연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권채우가 또 고개를 내려 밭은 입맞춤을 하려고 하자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정말 여기가 채우 씨 땅이라고요?”
“네.”
“이런 게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네.”
아득함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니 문득 정수리 위로 묵직한 턱이 얹어졌다.
나직한 목소리, 차분하게 움직이는 목젖,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름다운 화이도.”
화이돔의 실체가 밝혀지며 무너진 슬로건이었지만, 사실 이연은 그 말을 좋아했다.
“전부 당신에게 줄게요.”
“……!”
“앞으로는 섬 전체가 당신을 위해 노래할 거예요. 이연 씨가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바람결에 내가 보일 때까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요. 권채우가 그녀를 깊이 껴안으며 약속했다.
소년 소녀의 서툴렀던 위로가 커다란 낙원을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