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원 화이돔에서 벌어진 가스 폭발 사고로, 화양시장이 현장을 찾아 소방서장으로부터 화재 상황과 대책을 보고 받았습니다. 고 시장은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라며 연소 저지선을 중심으로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아 달라 당부했습니다.』
『폭발 사고를 계기로 지하 8층에 달하는 불법 지하 실험실이 공개되어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화이돔에 대해 경찰이 강제수사에 돌입했습니다.』
『제약 상장기업 브랜드평판 1위를 기록한 수국 제약이 마약성 환각제를―』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채널을 어디로 돌리든 화이돔에 대한 소식은 빠지지 않았다. 수국제약, 써머, 화이돔, 감금, 고문, 등의 검색어는 이미 온갖 포털사이트를 장악한 상태였고, 다양한 매체에서 끔찍한 불법 실험에 대한 내용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불법 실험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이 오늘 오전 두 시간 반에 걸쳐 수국 제약을 압수 수색했습니다. 연구실 CCTV와 연구 기록 등 환각제 ‘써머’에 대한 관련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대상이 된 건 수국 제약의 연구 윤리팀과 D 대학교 조경천 교수의 연구실 두 곳입니다. 이미경 기자가 보도합니다.』
이연은 듣기만 해도 겹겹이 쌓이는 피로에 TV를 껐다. 문득 한숨을 내쉬는 입으로 촉촉한 방울토마토가 쏙 들어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실수인 듯 그녀의 잇몸을 건드리고 갔다.
“……권채우 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아요?”
이연은 심란하다는 얼굴로 까맣게 꺼진 TV를 턱짓했다. 사람을 고문한 피로 만들었다는 환각제에 세상은 난리가 났는데 권채우는 꼭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이연이 안정을 위해 당분간 입원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부터 그는 이쪽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게요, 왜 사인을 거부하는지 모르겠네.”
“…….”
“이걸 똑 떼갈 수도 없고, 아― 해요.”
그가 이연의 엄지를 주물주물 매만지며 이번엔 샤인머스켓을 집었다.
“……지금 사인이 중요하냐구요.”
권채우의 화두는 단연 혼인신고였다.
“형이 실종됐다고 온 사방이 시끄러운데……!”
이연이 창백해진 낯으로 소리를 빽 지르자 권채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그걸 걱정하는 거예요? 권기석을?”
“아니―”
“그 새끼 사체가 발견될까 봐? 아니면, 밥도 못 먹고 도주 중일까 봐?”
그가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을 요구하듯 이연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대답 잘해. 아―”
그가 방울토마토 한 알을 들고 이연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렸고, 그 모습에 사나웠던 남자의 눈매가 스르르 풀어졌다. 이연은 턱을 바삐 움직여 터지는 과즙을 꼴깍 삼킨 후에야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권채우 씨한테 피해 갈까 봐 그렇죠!”
“그럴 일 없어요.”
수국 제약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받을 것이고, 권 가(家)와 정부의 유착 비리는 권기석의 이름 아래 줄줄이 딸려 나올 예정이었다.
모든 죄를 떠안고 가야 할 건 권기석이지, 권 가(家)가 아니다. ‘아직’은 아닌 것이다.
권 가(家)가 무너지는 순간은 권채우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까지는 최대한 이용해 먹을 속셈이었다. 권채우는 느긋한 미소 뒤에 잔혹한 구상을 철저히 감추었다.
“지금 나한테 피해를 주는 건 이연 씨잖아요.”
“네?”
“식물인간은 겁도 없이 덥석 받았으면서, 애 아빠는 안 받는다?”
“이제는 겁이 생긴 거죠.”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과일을 재촉하듯 입을 벌렸다. 권채우는 탐탁지 않은 듯 혀를 차면서도 가장 반질반질한 방울토마토를 고르고 골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혹시 애는 딴 놈이랑 키울 생각이었나?”
“……켁, 콜록, 콜록!”
격하게 터진 기침에 권채우의 눈매가 스윽 가늘어졌다.
“이것 봐라.”
“콜록,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런데 왜 목덜미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과민 반응을 하지?”
권채우가 그녀의 귀부터 쇄골까지 손가락을 죽 내리그으며 서늘히 읊조렸다.
“이연 씨, 내가 말했잖아요.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는 거, 나는 못 한다고. 닭도 물어 죽인 적 있고 지붕도 깨부술 줄 아는데, 내가 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돼요?”
그가 과일 접시를 협탁에 올려놓고 몸을 바짝 붙여왔다.
“나는 첩 될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실핏줄이 비치는 목선에 그의 코끝이 닿았다. 이연은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예민한 살결을 건드렸다.
“난 조강지처 아니면 안 해요. 씨발, 내 아랫것들은 다 죽여 버릴 거야.”
“애가 들어요……! 애가 듣는다고요!”
“애기도 들어야죠,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대체 어디가―”
“그리고 이연 씨도 알잖아요, 매장 및 뒤처리는 내 부업이었어요.”
이연이 벙쪄 있는 사이, 권채우는 그녀의 몸을 꽁꽁 옭아매고 목덜미를 집요하게 빨아들였다.
“내가 평생 자지 하나만 바치면서 살 첩 놈으로 보여요? 아니, 바칠 게 그거 말고도 얼마나 많은데. 명색이 나무의사란 사람이 내 싹수를 이렇게 짓밟아도 돼요?”
이연을 끌어안은 팔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위조된 혼인신고서에 이미 휘둘려 봤기 때문인지, 이연은 종이 한 장에 크나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동거 경험도 있고, 아이까지 가진 마당에 법적 관계라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보다 밀접한 사이가 어디 있다고.
혼인신고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상황이 좀 안정되면 하자는 말에 권채우는 눈썹을 왈칵 찌푸리면서도 한발 물러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수틀린 마음을 감당하기 힘들 때에는 이렇듯 성질을 내곤 했다.
“……머? 혼인신고?”
그때, 끼이익 문이 열리며 스산한 목소리가 번졌다. 열린 문 너머로 뒤늦게야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추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이쪽저쪽 눈동자를 굴리며 찰싹 붙어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치가 백 단인 추자는 울고불고 때려 부수며 헤어졌던 두 사람이 왜 이런 야릇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는지 금세 파악했다. 그들의 관계가 한 달 새 급변한 것이다.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
추자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썅갈노무 자슥이, 잘생기면 다가!”
“……추자 씨?”
“세상 다른 남자는 다 돼도, 저놈만큼은 안 된다!”
활화산 같은 목청에 이연은 눈만 깜빡거렸다. 권채우는 느닷없는 반대에 부딪혀 눈썹을 치켜세우다가도 얌전히 입꼬리를 내렸다. 그 태세 전환이 대단히 빠르고 은밀했다.
“권 서방, 아니, 권 가야, 네가 그리 떠나고 이연이가 어찌 지냈는지 아나.”
추자는 열불이 터진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밥도 몬 먹고, 잠도 몬 자고……! 눈깔은 동태처럼 다 죽어서……!”
순간, 추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속이, 마 속이 아니었다. 네 놈 자슥이 그때 이연이를 못 봐가 뻔뻔하게 낯짝부터 들이댈 수 있었던 기제. 딱 한 번이라도 저 가스나 상태를 봤다면 니는 접싯물에 코부터 박고 싶어졌을 기다!”
추자는 삿대질하던 손으로 권채우의 어깨며 팔을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연이 화들짝 놀라 두 사람을 말리려 했으나 권채우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꽉 잡아 왔다. 하필이면 추자가 퍽퍽 내리치는 부분이 총상을 당한 위치라 꽤나 아플 텐데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처연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쟤가, 쟤가…… 어떤 앤데, 을매나 가엾고 기특한 앤데! 내 새끼한테 상처 준 놈을, 내가 왜 받아줘야 하노?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부터 치르게 한 놈이 무에 당당하다고……! 내는 절대 허락 몬한다!”
추자가 씩씩거리며 권채우를 붙잡고 흔들었다.
“혼인신고는 무신……! 싸아가지 없구로……! 감히, 가암히이!”
티셔츠 목이 늘어나고 앞머리가 눈가를 가려도, 그는 추자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휘청거렸다.
그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가 크게 다치기까지 한 남자는 금세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추자가 한순간 멈칫했지만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이연을 쏘아보았다.
“내가 뭐라캤노. 이제 겨―우 한 계절이 간 거라고 했제?”
“큼, 추자 씨, 크흠…….”
“고작 첫 번째 남자가 간 거라고 했나, 안 캤나.”
이연은 추자의 마음을 백번이고 이해하는 한편, 첩 운운하며 고약하게 굴던 권채우가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남자를 들먹이는 건 절대 좋지 못했다.
“그런데 미쳤다고 홀라당 넘어가서, 혼인신고오―? 그냥 연애만 하고 살아뿌러라, 연애만! 식도 안 올린 것들이 무신 법으로 먼저 묶이겠다고 이 지랄들이고! 꿍꿍이 있는 놈들이나 그렇게 속살거리는 기다!”
추자가 이번엔 이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자 별안간 권채우가 막아 세웠다.
“장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누가 네 장모가!”
“아무리 급해도 제가 순서는 지켰어야 했는데.”
권채우는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아울러 반성하는 듯 나직한 목소리에는 추자가 살짝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따……, 뉘집 개놈인지 참말로 곱네. 하지만 곧장 눈을 부라리며 흔들릴 뻔한 마음을 다잡았다.
“흙이 아니라 내 눈에 못이 들어가도 안 되는 건 안―!”
“장모님 먼저 시집보내드리겠습니다.”
“―되는, 머?”
독기가 빽빽했던 발성이 한순간 허탈하게 풀어졌다. 권채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왕년의 브룩 실즈라고 들었습니다. 셋쩨 형이 투자 회사, 제작사, 그리고 엔터 회사를 돌리고 있는데, 제가 꽂아드릴 수 있습니다. 상장 당시 시가총액만 4조원을 돌파했던 국내 굴지의 엔터 기업입니다.”
“…….”
“장모님, 물가에만 피어있기엔 도화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꿍꿍이 있는 놈의 속살거림에 당하지 말라더니. 추자의 두 뺨은 이미 술에 거하게 마신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연은 끝났다는 듯 이불만 툭툭 털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 길이 내키지 않으시면, 자산 백 억 이상, 신경 쓸 자녀 없는 깔끔한 노신사들로 추려보겠습니다.”
“……너무 많이 추리지는 말고.”
“네.”
“……알제? 넉넉하게.”
권채우가 씩 웃으며 마실 것 좀 사 오겠다고 나가는 동안에도 추자는 도망쳤다 제 발로 되돌아온 사위를 꿈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이연이 이마를 짚으며 추자 씨, 하고 부르려는데 침이라도 질질 흘릴 것 같던 그녀가 먼저 표정을 싹 거두었다.
“이만하면 됐나.”
“네?”
이연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되묻자 추자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 정도 쇼는 해줘야 네가 앞으로도 권 서방을 꽉 쥐고 살제.”
“……!”
“남자들은 처갓집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는 기다.”
“네에?”
“방금 전에도 봐라, 결혼 몬 할까 무서워서 가진 거 싹싹 내놓는 거.”
“…….”
“그리고 내 직감으로는, 점마는 저게 끝이 아이다. 싹수가 노랗다 못해 번쩍번쩍 황금이다 안 카나!”
콧구멍을 벌렁거리던 추자는 이내 이연의 얼굴을 까칠까칠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혼인신고는 급하게 할 거 읍따, 알제? 살아보고 해도 하나도 안 늦는다.”
애틋한 손길과는 다르게 추자의 입꼬리는 그놈 참 고소하다는 듯 한껏 올라가 있었다.
이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낯부끄러움을 내비쳤다.
“저…… 한심하진 않구요?”
“니가? 와?”
“요란하게 헤어져 놓고, 이렇게 다시 지지고 볶는 게……”
이연이 면목 없다는 듯 목소리를 줄이자 추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낚아챘다.
“그기 사랑이제!”
추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제 뺨에 손바닥을 갖다 붙였다. 이내 과거 어딘가를 유영하듯 슬쩍 기울어진 얼굴이 퍽 아련하고 황홀했다.
“이연아, 역시 남편 얼굴은 뜯어 먹을수록 맛있는 기다.”
섬 밖으로 도망친 놈 쌔빠지게 잘 잡아왔다, 잘 잡아왔어, 하며 추자는 오래도록 무릎을 쳤다.
여전히 누가 누구에게 당했는지 알 수 없는 장모 사위 간의 기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