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꼭 할 말이 있는데.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피곤에 지쳐 자다 깨고, 또 자다 깨면서 어느덧 시곗바늘은 자정을 넘겨 새벽을 지나고 있었다. 몇 번이고 가물가물한 눈으로 권채우를 찾았지만 그는 좀처럼 나타나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선잠이 든 사이, 조심스레 배를 만지고, 잔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눈썹을 결 따라 골라주며 손등에 길게 입 맞춰오던 온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연은 다시 꿈속을 헤매듯 생각했다.
어쩌면 그 꿈은 이연의 미래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권채우가 제때 오지 못했더라면…….
그런 뒤숭숭한 곱씹음에 정신이 반쯤 돌아올 무렵, 묘하게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가 홱,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호자 침대에 앉아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권채우는 이연의 손등에 얼굴을 파묻고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침통함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자 미동도 않던 그가 재깍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요?”
그는 무거웠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지우고 여상히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의사 말로는 안정을 많이 취해야 된대요. 불안하니까 며칠만 더 입원해 있을래요? 그편이 더 안심될 거 같아요.”
“어디 갔었어요?”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병실 안, 두 사람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요.”
“……거짓말.”
이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작은 읊조림이라도 그가 못 들었을 리 없는데. 권채우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거짓말을 시인하는 모양새라 이연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나, 채우 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었어요.”
그 순간 권채우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 주제에 이연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만큼은 매섭기 그지없어서, 대관절 자책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이를 갈고 있던 건지 도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화이돔에서요…….”
그녀가 운을 띄우자 권채우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화하기에 앞서, 그가 보이는 비딱한 태도에 이연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윽고 자조와 닮은 웃음소리가 텅 빈 병실 안에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상태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실내 온도가 점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기요, 권채우 씨.”
“내가, 정말 성질 죽이고 살아보려 했는데.”
“……네?”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양손으로 허벅지를 누르고 널찍한 어깨를 꿈틀거리며 웃고 있는 남자는 퍽 낯설었다. 언뜻 예의 있게 묵례하는 자세였으나 각이 진 오금, 손목, 어깨, 어느 것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게 없었다.
권채우의 거죽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를 항시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던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녀가 얇은 이불을 구겨 잡았다.
“이연 씨가 그랬죠. 못 살 것 같다고.”
그가 웃음을 싹 걷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철렁한 걸 넘어서 무서웠어요. 이 여자는 나를 주워줄 생각이 없어. 그러면 나만 주인 잃은 개새끼가 되겠구나. 그걸 깨달은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권채우는 다 타고 남은 재처럼 그녀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아기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를 악물고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쾅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과 공기 중에 섞인 매캐한 냄새가 동시에 밀려닥쳤다.
밤하늘임에도 시커먼 연기는 선명하게 구분되었고, 새빨간 불길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권채우는 그 광경을 날카롭게 손가락질하며 이연을 노려보았다.
“저기에 불을 지른 건 네가 됐겠지.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직도 넌 저기에 갇혀 있었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만약 아기가 잘못됐으면, 네가 날 쳐다봐 주기나 했겠어? 어쩌면 내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정만으로도 울컥 치솟은 감정에 턱 근육이 불거졌다.
“넌 가버렸겠지. 내가, 몇 번이고 버려도 좋으니 가장 마지막에만 주워달라고 했는데도.”
지그시 이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차츰 냉랭한 빛이 어렸다.
“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어.”
이연은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에도 상처받은 게 분명한 그의 눈빛이 사무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이글거리는 화이돔의 불길이 그의 옆얼굴에 스며들었다.
“그건 애정의 차이야?”
그가 싸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밤바람에 맞아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위태로워 보였다.
“아기는 하염없이 예쁘지만, 나는 미워서?”
권채우는 기어이 이런 말을 내뱉은 자신이 치욕스럽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눈동자에 옅은 수치심이 떠올랐다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쏟아지는 원망을 듣고 있던 이연은 그제야 권채우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불안할 때마다 더욱 억지를 부리는 경향이 있었고, 오늘 하루는 두 사람 모두에게 충격적이고 힘든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공포에 질려 마구 내뱉은 말이 권채우를 찔렀고,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 두려움은 괴물처럼 자라났을 것이다.
이연은 잠깐이라도 불에 홀렸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녀의 눈빛, 손짓, 사소한 숨소리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한 남자에게 ‘못 살겠다’는 말은 청천벽력이었을 테다.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옳았다.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그녀는 뿌옇게 부푸는 눈시울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사인해요.”
그때, 권채우가 싸늘한 얼굴로 다가와 웬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사인? 무슨 사인?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스치듯 본 종이에 이연은 말문이 막혔다.
“……혼인신고서요?”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빈칸 채우고 사인해요.”
“……혹시 협박하는 거예요?”
언젠가 권기석에게 이런 식으로 사인을 강매 당해 식물인간을 받아왔다. 물론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지만 괜스레 몸이 흠칫거렸다.
미묘한 불편함이 얼굴 위로 드러나려는 찰나, 권채우가 침대맡에 앉아 그녀의 잔머리를 살살 달래듯 넘겨 주었다. 하지만 낮게 가라앉은 눈빛은 왜인지 섬뜩했다.
“이연 씨, 나는 당신의 종처럼 살 거예요.”
“……!”
“그 대신, 먼저 확실하게 내 주인이 되어 줘야겠어요.”
“내, 내가 왜―”
“까딱 잘못했다간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것 같으니까.”
권채우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아당겨 보란 듯 제 목에 갖다 붙였다.
“이연아, 사양 말고 쥐어.”
“……!”
펄떡펄떡 뛰는 맥박이 손끝에 스쳤다.
“착하게 살고 싶었다는 건 진짜야. 그런데 보다시피 그게 잘 안 됐어.”
권채우는 이런 식으로 권기석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연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던 짧은 순간,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취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가둬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햇살마저도 그녀에게 자극이 된다면 온 사방을 막아 놓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권기석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는 몸부림치듯 진창을 헤매고 다녔다. 어떻게든 자신만의 답을 찾고자 들고 온 게 바로 이 서류였다.
가두긴 가두되, 울타리는 보이지 않아야 했으므로.
이 여자를 가지려면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기다려 주고, 지켜봐 주고, 휘둘려 주고, 마음이 풀리면 오라며 건실한 척 숙여 주는 일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의 손바닥에 흉처럼 남았던 라이터 자국. 그 자국 하나에 나름대로 착하게 굴려던 생각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차라리 더 악독해지겠다고. 이연이 좌절 따위는 아예 하지도 못하게. 그 어떤 위협도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화이도를 그녀만을 위한 안전지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모든 것을 겸허히 버리는 게 아니라, 더 악랄하게 속을 감추는 법을 남자는 하루 사이에 본능적으로 익혔다.
이연이 또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권채우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이 될 생각이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너랑 실로 꿰서 한 몸으로 지냈어.”
“……설마 이게 프러포즈라고는 하지 말아요.”
“그래도 내가 너 편하라고 목부터 내어 주겠다잖아. 나는 오늘처럼 뒤통수 맞기 싫고, 실로 못 꿰는 거라면 사인으로라도 묶어둘 거야.”
그가 으르렁거리듯 눈을 부라리자 이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쳤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
“채우 씨,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잖아요. 내가 이런 걸 한두 번 겪어봐요?”
그 말에 권채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바깥에서는 사이렌이 울리고, 붉은 조명이 이따금씩 병실을 스쳐 갔다.
권채우는 가시가 돋친 채 그녀를 노려봤지만, 목을 쥐는 대신 형편없이 헤진 입술을 매만져주는 손길에 한쪽 눈매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남자의 속을 참으로 간단히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자 원망과 빈정거림이 아니라, 오늘 하루, 입 안이 썩어가도록 내내 물고만 있던 말이 울컥울컥 토해졌다.
“……씨발, 이연아, 내가 널 죽도록 사랑해. 그래서 너무 외롭고 불안해.”
밤하늘이 묘하게 붉었다. 세상이 온통 그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그래도 두고 봐, 내가 당신의 미련이 될 거야.”
이를 사리물고 말하는 그 한 마디에 꿈속에서 묻혀온 시커먼 재들이 훌훌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백번을 죽는대도 네 남편으로 살다 죽을 거야.”
그가 충혈된 눈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깍짓손에 숨이 막히다가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안락감에 온몸이 깊게 잠기는 것 같았다. 이연은 오랫동안 부유하던 다리를 이곳 이 자리에서 비로소 멈추고 싶어졌다. 그녀의 속눈썹이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내가 채우 씨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요…….”
그가 긴장하듯 목울대를 거칠게 넘겼다.
“날 구해줘서 고맙다구요.”
“……!”
마지막까지, 불길에서도 날 혼자 두지 않아서. 그건 꿈과 현실이 뒤섞인 말이었다.
“채우 씨 덕분에 내가 살았어요.”
설령 이연이 세상 어딘가에서 가차 없이 추방당한다 해도, 권채우는 볼품없고 더러워진 그녀를 기꺼이 품어줄 남자였다.
그 마음에 확신이 든 순간, 이연은 모두가 함께 살 집을 새로 짓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