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라이터가 잡혔다.
괜스레 움찔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유화로 그린 듯한 싱그러운 풍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연은 라이터를 꽉 움킨 채 한평생 의지하고 사랑해 온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지상으로 올라가면 온갖 초록빛으로 가득 찬 수목원이 있을 것이다. 비명과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이곳과는 전혀 딴판이겠지.
녹음이 우거진 숲으로 발아래의 끔찍함을 덮어놓은 화이돔. 이연은 불현듯 신물이 올라왔다.
처음으로, 나무가, 숲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이연아, 얼른……!”
조경천이 재촉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제는 나무보다 사람을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건지도 모른다. 이연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꾸물대다간 걸린다, 이 녀석아! 그땐 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그는 비닐에 싸인 방호복을 다급히 뜯어주었다.
극비로 분류된 화이돔의 지하 안에는 연구원들을 감시하는 렌즈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미 누군가는 지하 곳곳에 깔린 CCTV를 통해 사소한 이변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런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연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곳의 실체는 반드시 밝혀져야 해……!’
그녀는 연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수목원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이 점차 커져 화이돔을 집어삼킨다면,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연구원과 경비원들도 대피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이, 이연은 지하에 감금돼 있던 이들을 전부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수목원에 불을 지른 나무의사가 되면―.
“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아먹고 있는 거냐……!”
그동안 나무의사로서 중요하게 지켜 온 무언가가 어그러질 테다. 나무를 죽이던 횟집 아저씨에게 진상처럼 달려들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건, 그 누구보다 나무를 이해하고 아낀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과 자긍심 때문이었다.
그 사명감 하나가 이연을 여태껏 살게 했다. 더러운 핏줄이라는 제 뿌리를 씻고자 나무와 자연에게 온 마음을 들여 헌신했던 시간들이었다. 그거야말로 이연을 가장 강력하게 지탱해주던 삶의 이유였다.
하지만 나무를 불태우는 순간, 그 정신은 훼손될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사리물면서도 라이터를 놓지 않았다. 심장이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풍경화를 바라보던 이연의 시선이 보랏빛 꽃 한 송이에 꽂혔다.
“……교수님, 저기에 비단향꽃무가 있네요.”
“지금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저거 꽃말이 뭔 줄 아세요?”
그 순간, 권채우의 음성이 꽃말을 감싸고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믿어주세요’예요.”
이연은 숨을 멈추고, 조경천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전화, 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
“뭐?”
내내 흔들리던 눈동자가 별안간 다부지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 이연은 불보다도 더 뜨겁고 사나운 것을 알고 있었다.
권채우가 저를 쫓아오고 있다는 확신이 든 순간, 후들거렸던 팔다리가 점차 진정되고, 창백했던 안색에도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둠처럼 짙게 깔려 있던 불안이 놀랍게도 사라져갔다.
아가, 우리 같이 아빠를 믿자. 아니, 엄마가 채우 씨를 믿어볼게.
‘그치만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널 한 번 버리고 갔던 사람이야. 괜히 도박하지 마.’
동시에 의심이 속살거렸지만 이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언제까지고 지난 상처를 눈에 덧대고 상대를 바라볼 순 없었다.
권채우는 무서울 정도로 그녀를 뒤쫓았던 사람으로, 달리던 차까지 멈춰 세우지 않았나. 이연은 그녀가 직접 보고 느낀 것만을 따르기로 했다.
한편, 조경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 지하에서는 통신이 안 된다. 인터넷이랑 전화선이 전부 막혔어.”
“……네?”
“감시당하고 있거든.”
마침 컴퓨터의 내장 캠에 빨간색 불빛이 들어온 것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나 내부 고발이나 정보 유출이 될까 감시가 삼엄해. 그러니까 잡생각은 그만하고 얼른 이것부터 입어라. 이렇게 미적거리다간 들키는 건 시간문제야……! 전화든 뭐든 일단 여길 나가야 될 거 아니냐!”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이연에게 훌쩍 던졌다.
이연은 연구원처럼 옷을 갖춰 입고 조경천을 따라나섰다. 유리로 된 한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은 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반대쪽 방에선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 끄아아아악! 그만, 그만, 제, 제발……!”
이연은 미간에 힘을 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은 꽃은 자연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검은 꽃이 써머의 주원료로 사용되고 있는 희귀식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람의 피로 꽃이 피어난다니. 다시 생각해도 참 기괴하고 끔찍한 식물이었다.
그때, 누군가 블라인드를 벌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연은 매섭게 생긴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러나 잠깐의 찰나, 침대처럼 높은 의자에 손발이 묶여있는 사람을 목격하고 말았다. 섬뜩한 광경에 목 아래로 거칠게 맥박이 뛰었다.
나가는 문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이윽고 조경천이 출입증을 삑 갖다 대며 이연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순순히 한쪽 발을 내디디며 그에게 소곤거렸다.
“……교수님, 제발 부탁드려요. 남자애만, 그 애만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이름이 규백이에요, 이규백. 나이는 여덟 살이구요, 똘똘해서 사정 설명하면 잘 알아들을 거예요. 다시 돌아올게요. 저도 수국 제약, 아니, 권 가(家)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이렇게는 안 끝내요.”
“뭐?”
조경천의 입이 벌어지려는데 그녀가 꿰뚫어 보듯 말했다.
“권기석은 죗값을 치를 거예요.”
“너……!”
“제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 집구석에서 있다 왔거든요.”
“……이연아, 너 대체 무슨 말을―”
“교수님도 이제는 권기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뒷배로 두셔야 할 거예요.”
짐짓 무덤덤한 말투였으나 형형한 눈빛은 꼭 협박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제 부탁 들어주시면요, 적어도 나쁜 일은 안 생길 거예요.”
조경천은 퍽 걱정스럽다는 듯 이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터무니없는 그녀의 말에 숫제 정신 상태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제가 그 집 며느리가 될 뻔해서 잘 알아요.”
조경천은 헐레벌떡 멀어져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이연은 비상계단을 오르며 천장 모서리에 달린 CCTV를 힐끔거렸다.
층계참을 지날 때마다 검은색 렌즈가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괜한 착각에 시달렸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 등 뒤를 덮칠 것 같은 불안감이 목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이연이 있던 곳은 무려 지하 8층이었고, 그래서 더욱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
그때 마침 아래쪽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걸음을 멈추고 예민해진 귀를 한껏 세우고 있는데, 낭패스럽게도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빠르게 따라붙고 있었다.
‘……젠장, 아직은 안 돼!’
이연은 곧장 지상 1층으로 나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길을 헤치며 출입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땅 위로 올라왔다는 기쁨도 잠시, 이대로 다시 끌려갈 순 없다는 필사의 각오 때문인지 심장이 터질 듯 요동을 쳤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지만 오히려 불길할 뿐이었다. 위험했던 순간마다 숲이 그녀를 숨겨주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후으, 하아……!”
어느새 이연의 입술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그녀는 연약한 가슴팍을 들썩이며 뒤를 힐끗거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으윽……!”
그러나 얼른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별안간 들이닥친 강한 복통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으으…….”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 아랫배가 경련하듯 오그라들었다.
“으…….”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한 발짝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축축한 무언가가 속옷에 묻어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안 돼…….”
채우 씨, 권채우 씨, 아가야, 제발……!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배를 움켜잡았다. 연한 색의 바지에 핏빛이 비쳤다. 이연은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그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경천이 건네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통화 가능 지역이라는 안내가 떴다.
이연은 곧장 생각나는 번호 열 한자리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마침내 연결되기 시작한 신호음을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데, 쫓아오던 장정들이 그녀를 덮치듯 제압했다.
“읏……! 이거 놔, 놓으라고! 내가, 내가 이렇게, 이럴, 이럴 수는……!”
두 팔이 등 뒤로 꺾이고 핸드폰은 저 멀리 풀숲으로 떨어졌다.
“입에 뭐 좀 물려.”
누군가의 지시에 이연은 더욱 몸부림을 쳤다.
“여기, 여기 말고요. 제발 병원으로, 나 좀 제발 병원으로……!”
하지만 이연의 호소는 단 한 명에게도 닿지 않았다.
“주사 챙겨왔어?”
“네.”
“얼른 맞춰.”
그들은 이연의 외침은 철저히 배제한 채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들, 혹시 권 가(家) 사람이야? 당신들이 개집에서 자랐다는 그 사람들이냐고!”
“……!”
이연의 악다구니에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윽, 흐윽, 정말로 여기 불 지를 거야. 싹 다 불 지르고……!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으읍……!”
멈칫했던 남자들이 이연의 입에 천을 쑤셔 넣고 강제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필사적으로 흔들었다.
이연은 절망에 빠지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
그렇게 낯선 면면들을 훑는데 별안간 커다래진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장, 장, 이름이 뭐였지? 분명 권 가(家)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남자였다.
이연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자 그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콰장창창창―!
돔 형태의 유리가 일시에 폭파되었다.
“――!”
강력한 기파에 귀가 먹먹한 와중에도, 권채우의 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