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풍덩, 거대한 물보라가 허공에 튀었다.
약에 취해 헛소리만 내뱉는 남자에게선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권기석은 수조에 빠지는 그 순간까지도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고인 채 썩어가고 있던 패배감을 마침내 떨쳐냈다고 생각했는지 구김없는 이십 대 청년처럼 웃고 있었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선생님.”
하지만 거대한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관장하던 권기석의 본질은 노예였다.
윤주하를 처음 만났던 소년은 일평생 그녀의 망령에 형편없이 끌려다녔고, 그의 인생은 한 여자가 후벼 파낸 자리를 메우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권채우는 그런 남자가 우스웠지만 승리를 확신하던 얼굴에는 어금니가 갈리도록 턱에 힘을 주었다.
결국 누군가를 지키고 통제하고 싶어 권력을 잡은 권기석의 행보는 권채우와 꼭 닮아 있었다.
역겹게도, 형제는 다르지 않았다.
권채우는 금세 피로 물드는 수조를 감흥 없이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앞으로 권기석은 십대 지옥을 모두 경험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권채우는 불이 꺼진 복도를 다급히 걸으며 피가 엉긴 손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눌렀다.
참고 또 참았던 매캐한 숨이 식도를 태우며 재처럼 터져 나왔다. 권기석이 겪었던 끔찍한 굴레가 이번엔 저를 겨누고 있다. 그의 발걸음에서 전에 없던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채우야, 배야. 배였어.
그때, 다급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사냥개들이 한꺼번에 연락 두절된 게 이상해서 여객선을 조사해 보니까 제수씨랑 그 꼬맹이만 빼고 승객들이 전부 위조된 신분이야. 아무래도 네가 사냥개를 딸려 보낼 줄 알고 전원 블랙아웃 시킬 작정이었던 것 같다.
씨발, 권채우는 안일했던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분위기는 감히 말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싸늘해졌지만 살의가 깃든 눈시울은 통증을 견디듯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칩은 추적해 봤어?”
―……마지막 위치가 그냥 좆같은 바다야.
권이준의 목소리에 진득한 한숨이 잔뜩 섞여 나왔다. 권 가(家)의 사냥개들은 예외 없이 몸에 칩을 심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위치가 육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항구 근처도 아닌,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뜨니 권이준으로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권채우의 눈빛이 더욱 서슬 퍼렇게 가라앉았다.
―다 뒤져보고 있기는 한데, 갑자기 증발한 것도 아니고, 없어. 도착한 흔적 자체가 없어.
“여객 터미널 말고 연안항 쪽 찾아봐, 선박 위주로.”
―뭐?
“중간에 바꿔치기했을 거야. 새로 페인트칠을 했든, 이연 씨만 다른 배로 빼돌렸든.”
강하게 주먹을 쥔 그의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리고 배표.”
―뭐?
“승객 전원이 공평하게 만진 물건.”
―……!
“아마 상대 쪽에서도 시민으로 위장한 사냥개를 전부 분별해낼 순 없었겠지. 그러니 가짜 승객을 집어넣어 깔끔하게 전원 블랙아웃 시키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한 것 같고. 환풍기에 마취 가스를 섞었거나 접촉을 통해 피부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커.”
그에 타닥타닥 키보드를 빠르게 쳐대는 권이준의 손이 바빠졌다.
권채우는 아래로 내리고 있던 복면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는 칼끝처럼 곤두서 있었고, 안 그래도 옅은 빛깔의 홍채가 오늘따라 더욱 짐승처럼 번뜩였다.
때마침 멀리서부터 프로펠러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그의 새까만 머리가 세찬 바람에 밀려 정신없이 흔들렸다.
‘네가 살아 온 방식이 결국 그 여자를 해치게 될 거야. 네가, 사냥개가, 권 가(家)가 그 여자를 죽이게 될 거야. 너는 또다시 모든 걸 잃을 거다.’
소이연이 없다면, 그녀를 이대로 놓친다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도,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도 전부 부질없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정도를 모르고 커지던 심장이 일순 까무러치듯 조여들었다.
이연이 사라진다면 어차피 권채우에겐 아침이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기나긴 암흑 속에 갇혀 있겠지. 개도, 식물도, 사람도 아닌 그저 쓸모없는 무언가로.
그녀에게 붙어살길 원했던 남자는 어쩌면 권기석보다도 더 초라하고 추한 몰골로 죽어갈 것이다.
권채우는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혼자 남을 자신을 생각하자 순식간에 온몸의 수분이 다 마르는 것 같았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온기가 팔뚝 언저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지독한 악몽을 꾸는 양 현실감이 없었다.
이렇게 허탈하게 빼앗길 바엔 차라리 그녀의 외면과 무시를 받으며 사는 게 나았을 거다.
그는 다시금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그녀에게 매달리고 애원했던 감정 또한 자신의 이기심이며 강요였음을 깨달았다.
사려 깊은 척 기다리겠다고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던 순간마저도 사실은 터무니없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이렇듯 그녀를 잃고 난 후에야 권채우는 제대로 마음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어떤 형태로든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달라고.
그는 오직 그것만을 바랐다.
이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감히 남편이라는 말로 그녀와 동등하게 서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한 여자의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권채우는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지하야. 이연 씨는 지하 어딘가에 있어.”
후회로 얼룩진 그의 눈빛이 정면을 올곧게 향했다.
‘―네가, 사냥개가, 권 가(家)가 그 여자를……’
그때,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그가 본능적으로 거슬리는 단어를 움켜쥐었다.
“형, 내가 숙청했던 사냥개 중에 아직 살아있는 놈들 있나 찾아봐.”
* * *
“―그 새끼들은 하나같이 고문 기술자라고!”
비료와 고문. 이연은 황조윤이 했던 말을 되뇌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을 정리해 보자면, 써머의 원료가 되는 희귀 식물을 개화시키기 위해…….
독방을 빙빙 돌던 이연이 충격에 빠져 멈칫한 순간, 느닷없이 철컥, 철컥 거칠게 문을 따고 두 명의 장정이 들어왔다. 이연은 하나같이 거구인 남자들을 보며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일들이 머릿속을 한바탕 휘저어놓았다.
그들은 군인처럼 새까만 유니폼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채 다짜고짜 이연의 양팔을 붙들었다.
“누, 누구세요, 뭐 하는 거예요!”
이연이 소리를 지르자 곧장 옆방에서 황조윤이 반응을 보였다. 이연아, 이연아……! 그는 절절히 안타깝게 외치면서도 올 게 왔다는 듯 어딘지 흥분한 기색이었다.
방으로 쳐들어온 남자들은 이연의 양팔을 한쪽씩 강하게 붙들고 마치 용의자를 데려가듯 끌고 나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환한 조명에 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로는 여전히 황조윤의 찢어질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연아, 겁먹지 마……! 금방 끝날 거야. 피만, 그냥 피만 주면 돼!”
―라고 말하던 선배는 벽에 머리를 찧어대며 잔기침 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이연은 그의 몰골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상당히 망가진 듯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또 사방이 가로막힌 독방에 갇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바짝 서고 감각이 예리하게 열렸다.
복도 양옆에는 회색빛의 철문이 붙박이장처럼 일렬로 쭉 이어져 있었다. 이연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쾅, 쾅, 쾅―! 하고 철문이 부딪히며 부르르 흔들렸다.
가래 끓는 소리가 나거나 울거나 “아아아악!” 하고 고함을 내지르는 사람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내 조그맣게 뚫린 창문으로 몇몇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는 지친 동공은 퍼석했고, 유리창은 지저분한 손때와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희게 질려 어깨를 떨었다.
“규백아…….”
“…….”
“규백아……!”
목구멍이 꽉 막힌 듯 터져 나오지 않았다.
“지금 어, 어디로,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경비원들은 카드키를 찍고 다른 구역으로 들어갈 뿐,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부 새하얀 곳으로 하얀색 방호복에 마스크, 신발 커버, 페이스 실드로 완전 무장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이연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눈만 깜빡거렸지만 그들의 부츠가 새빨갛게 젖어있는 것을 보고 다시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수국 제약은 그냥 피가 필요한 게 아니라, 대량으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이 필요한 거야.”
그녀는 미쳐 날뛰던 황조윤의 말을 떠올렸다.
“……아드레날린이요?”
“그래, 아드레날린이 섞인 피!”
“그게 무슨―”
“특히나 공포, 분노,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간에게 대량으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
“그것이 섞인 피만이 희귀 식물을 개화시킬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꽃을 대량으로 재배하기 위해 이런 도축장이 필요했던 거고……! 이제 좀 감이 잡혀? 써머는 괴물이야! 게다가 그 새끼들은 하나같이 고문 기술자라고!”
남자들은 이연을 붙들고 코너를 돌고 또 돌아 점점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순간 피 냄새가 콧속으로 들이닥치자 이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대방의 팔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설령 얻어맞는 일이 있더라도 저 불길한 곳으로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마침 깨물린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곧장 손을 치켜올렸다. 뒷덜미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잡히고, 잔뜩 약 오른 숨이 내려앉았다.
어깨를 움츠린 이연은 이 와중에도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발바닥이 갈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죽어라 쫓아오겠다고 약속했던 남자.
그녀의 충직한 남편을.
이연은 무력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눈을 번뜩였다.
“잠깐 멈춰보게나.”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세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사람은 내가 데려가겠네.”
“예?”
경비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S-17 케이스 때문에 급하게 사람이 하나 필요하거든.”
“…….”
“그 눈은 뭔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겐가? 이곳 총책임자한테 지금 불복하겠다는 겐가?”
“……죄송합니다.”
나직한 호통에 바위처럼 단단했던 발소리가 뚜벅뚜벅 멀어져갔다.
이연은 두 손을 맞잡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치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이돔 프로젝트에 최종 낙점됐다는 D 병원의 조경천 원장이었다.
“그러게 내가 경고를 했잖나……!”
조경천은 책상 위에 서류를 던지며 언성을 높였다. 이연은 그가 대뜸 벗어주었던 흰 가운을 빌려 입고 무사히 실험 구역을 벗어난 참이었다.
비교적 안전한 사무실로 오는 내내 긴장으로 몸이 빳빳하게 굳었던 탓인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이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은근슬쩍 배를 어루만졌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교수님,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게―”
“이거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다.”
조경천은 그녀의 말을 뚝 자르고 옷장을 열어 새로운 가운과 방호복을 내어주었다.
“교수님……! 이건 엄연한 불법 실험이고 써머는 마약입니다. 그걸 만드는 재료부터 방식까지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게 없어요! 사람을 고문해서 얻은 아드레날린으로 약을 만든다는 건 윤리에 어긋납…―!”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물어보면 D 병원 나무의사라고 해.”
“교수님!”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이대로 그냥 입 다물고 나가.”
“밖에다 알려야 합니다, 지하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당장 신고라도 해야 해요.”
“…….”
“교수님!”
그가 조금도 반응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연아, 그 지독한 식물을 발견한 것도 나고, 책임자도 나다.”
조경천은 ‘네가 그때 길을 잃고 늪에 빠져준 덕분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런 끔찍한 일까지 이연이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처럼 권 가(家)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최소한의 목숨도 보장받지 못했다.
희귀 식물을 발견하고, 개화시키고, 대량 재배를 하고, 또 써머를 완성하기까지 실종되고 죽은 연구원들만 한 트럭이다.
이런 일에 동참시키기에 소이연은 그가 키운 제자들 중, 가장 때 묻지 않은 아이였다.
비료 냄새나 풀풀 풍기면서 아픈 나무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잡소리 말고, 빨리 여기서 나가기나 해라.”
“……안 돼요.”
“이 자식아……! 너 진짜 여기서 험한 꼴 당하고 싶어서 그래?”
그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이연의 어깨를 힘껏 내리눌렀다.
“저랑 같이 끌려온 남자애 하나가 있어요.”
이연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그 애는 이제 고작 여덟 살인데, 어떻게 저 혼자만 도망쳐요……!”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살길이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덩이 속으로 구태여 들어갔던 윤주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가운 주머니에 떨리는 손을 감추듯 집어넣었던 그녀가 멈칫했다.
손 안에 착 들어오는 차가운 금속.
“…….”
라이터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