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드륵, 드르륵. 캐리어에 딸린 바퀴가 굴러갔다.
권 가(家)에 도착한 첫날, 권채우가 막무가내로 던졌던 캐리어는 현재 그의 손에 얌전히 끌려가고 있었고, 남은 한 손으로는 이연과 깍지를 꼈다.
이연은 그가 괜히 미적거리며 걸음을 늦추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해 주었다.
그러나 태연해 보이는 그를 힐끔거릴 때마다 이연은 부루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두고 가기 불안하단 말이에요.”
“이래 봬도 내가 이 집 도련님인데,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죠.”
“그……, 하……!”
이연은 또다시 목소리가 커지려는 것을 애써 꾹꾹 눌렀다.
지난밤, 이연은 권기석과 권채우를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고 싶어 화이도로 함께 가자 설득했지만, 흐릿한 미소만 되돌아왔다.
그런 주제에 잠시도 몸을 떼기 싫어해서 조금이라도 틈이 벌어질라치면 권채우는 질색을 하고 쩔쩔맸다. 그 탓에 두툼한 바지춤이 계속해서 치대왔다.
“하아…….”
긴 입씨름 끝에 두 사람은 결론을 냈지만, 권채우만 이곳에 두고 가려니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 따라갈게요.”
그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달게 웃었다.
“이연 씨랑 우리 아기를 권 가(家) 사람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나긋하게 깔리는 목소리와 달리 꽉 잡힌 손깍지는 얼얼할 지경이었다.
“나 믿죠?”
“……다치지 말아요.”
이연이 그의 한쪽 뺨을 감쌌다. 그는 편안히 눈을 감고 온기가 서린 손바닥에 살결을 비벼왔다. 그게 꼭 복종하는 동물 같아 이연은 내심 움찔했으나 그가 얼마나 험악해질 수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곧 화이도에서 만나요, 이연 씨.”
권채우는 속내를 감추고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연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에겐 끝마치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그녀를 따라나선다면 도리어 이연이 다치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 앞에 다시 서는 건, 권채우가 권 가(家)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이어야 한다.
그는 되도록 빨리, 그리고 확실히 이 문제를 끝낼 생각이었다. 물밑에서 작업하는 온건한 방식만으로는 이연과 다시 만날 날을 단축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오늘 밤, 권 가(家)는 봉쇄되고 후계자는 바뀔 것이다. 그의 동공에 스산한 이채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배편은 알아요?”
이연이 꼬투리를 잡자 권채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한쪽 팔로 깊이 끌어안았다.
“발바닥이 다 갈려 나간다 해도 나는 이연 씨 안 놓쳐요. 죽어라 쫓아갈 거니까.”
“그래도 권채소는 안 돼요.”
이연이 안겨 있던 상체를 뒤로 빼며 검지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서 따뜻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게 정 싫으면 나만 따돌리지 말아요.”
이연이 대답을 피하듯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데 마침 저 멀리서 규백이 우다다 달려왔다.
“……엇, 규백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호화로운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규백이는 한 달 새 몰라보게 살이 올랐다. 온갖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멀찍이 떨어져 안전하게 귀공자 놀이를 한 덕에 아이는 누가 봐도 귀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연에게 밤마다 백과사전을 읽어주었던 일정을 제외하고도 규백이의 스케줄은 상당히 빽빽했다.
도대체 장범희와는 무슨 악연을 쌓은 건지 규백이가 죽어라 그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자, 백기를 든 남자는 온갖 선생님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규백이는 예기치 않게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되었고, 살뜰한 보살핌과 좋은 음식은 덤이었다. 그 증거로 아무리 보습제를 발라도 버즘이 가시지 않았던 얼굴이 지금은 깐 달걀처럼 매끈해져 있었다.
“규백아, 근데 이게 다 뭐야? 네 짐이야?”
이연은 줄줄이 따라오는 캐리어를 가리켰다.
“명품 옷입니다.”
“……어?”
“과학 전집 백 권 세트, 만년필 세트, 관찰 도구 세트, 금두꺼비 한 쌍, 신발, 노트북도 들어있습니다.”
말문이 막혀 이연이 멈칫해 있는 사이, 규백이는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습니다. 삼촌이랑 할아버지랑 사는 것보다 여기가 더 좋습니다.”
“아…….”
이연이 난감한 듯 눈꼬리를 내리자 옆에 있던 권채우가 아이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여기가 좋은 게 아니라 드디어 네가 돈맛을 본 거지.”
“……그거, 맛있습니다.”
“다 컸네.”
“돈맛이 최고로 좋았습니다. 곤충들도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연은 어린이의 눈에 고이기 시작한 야망을 읽으며 다급히 권채우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러나 내실 있는 근육으로 인해 그녀의 손가락만 휘고 아플 따름이었다.
“화이도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살게 해 줄게.”
“헛소립니다. 수놈은 백수라 불가능합니다.”
곧장 따라붙은 규백이의 지적에 권채우가 눈썹을 추켜올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꼬맹아, 이 집에서 너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누구야? 계산 잘 해야지. 너 똑똑하잖아.”
규백이의 깨끗한 눈동자가 데루룩 굴렀다.
“대신 조건이 있어.”
“…….”
그러나 규백이가 금색 소매 단추나 만지작거리며 꿈쩍도 안 하자 그가 툭 던졌다.
“화이도 절반이 내 땅이야.”
“나는 해냅니다.”
자본주의 끝을 경험한 아이는 조건은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거렸다. 권채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의 귀에 뭐라고 속닥거렸다. 사납게 올라간 그의 눈초리가 웬일로 반쯤 접혔고, 규백이는 비장하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기, 권채우 씨, 제발 애한테 요상한 거 가르치지 말아요……!”
권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세단 트렁크를 열고 두 사람분의 짐을 싣기 시작했다.
“가는 길은 걱정 말아요. 차 내부도 샅샅이 검사했고, 엔진이랑 히터까지 전부 뜯어봤어요.”
“그렇게까지요?”
권채우는 트렁크를 힘차게 닫으며 휘둥그레진 이연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차도 얼마든지 무기가 될 수 있거든요.”
그는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어제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했는데―”
권채우는 쏟아지는 가을볕에 눈이 부신지 어여삐 눈매를 휘며 말했다.
“임신 축하해요.”
이연은 일순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가도, 다시 이연이 있는 곳으로 거슬러오는 직선적인 눈빛.
권채우는 볕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푸르고 시원했던지 그녀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가족이니 핏줄이니 전부 지긋지긋했는데.”
그의 말에 이연이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저리가 날 것 같은 그 마음이야말로 이연이 가장 크게 공감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연은 유난한 배척을 당했고, 권채우는 특별취급을 받았다. 상반됐으나 어딘지 비슷한 두 사람은 누군가에게 마음 붙이고 사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고마워요. 나에게 이런 기다림을 알려줘서.”
“…….”
“이연 씨가 주는 건 죄다 기뻤는데, 하물며 직접 낳는 건……”
그가 감당하기 버겁다는 듯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앞으로 내 애간장이 다 녹는 일만 남겠죠.”
권채우는 태어날 아이에게 권 가(家)의 악행과 업보가 묻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가장 파괴적인 방식일지라도 기필코 이번 대에서 악의 굴레를 끊어내야만 했다.
새하얀 생명에게 권 씨를 물려주지 않는 것만이 이미 수많은 피를 손에 묻힌 제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깨끗한 애정이었다.
“……이연 씨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치만 첫 딸은 높은 확률로 아빠 닮는다고 하던데요.”
그때 규백이 열린 문으로 먼저 쏙 들어가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용맹한 남자애입니다. 새끼 호랑이입니다. 용맹한 남자앱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권채우는 산통이 다 깨졌다는 얼굴로 규백이를 쏘아보았고, 이연은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권채우의 손등을 토닥여주며 차에 올라탔다.
“진짜로 금방 와야 해요.”
“네.”
그러나 권채우는 차마 차 문을 닫지도 못하고 가장자리만 꽉 붙잡고 있다가 대뜸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을 진득하게 훔쳐 갔다.
짧은 찰나에 입술이 몇 번이나 포개지고 빨려 들어갔다. 그녀가 젖은 숨결을 막 토해내는 순간, 뿌득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닫혔다.
그 즉시 차는 매끄럽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하아…….”
이연은 화끈거리는 입술을 감쳐물고 뒷 유리를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멀어지는 차를 하염없이 좇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이연은 그동안 자신의 손길이 닿았던 가로수들을 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렇게 두 시간을 달려 항구에 도착을 했다.
이연은 틈틈이 걸려오는 추자와 권채우의 전화를 받으며 갑판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짭짤한 바닷바람과 끼루룩 끼룩, 하고 울며 따라오는 갈매기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웠던 섬이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연은 종알거리는 규백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방긋 웃어 보였다.
돌이켜보면 긴 여행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규백아.”
그것이 이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눈을 떴을 땐 사방이 가로막힌 어두컴컴한 독방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른 채 몸을 일으켰다. 찬 바닥에서 올라온 한기가 등에 달라붙었는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게, 어떻, 어떻게 된……일이지?
분명 화이도가 코앞이었는데.
조금씩 정신이 든 이연은 바닥과 벽을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색빛의 시멘트 벽, 먼지가 수북한 차가운 바닥, 두꺼운 철문. 기껏해야 사람 셋이나 간신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이연은 황망한 기분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반사적으로 바지춤과 겉옷을 되짚어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더욱 아연실색한 것은―
“―연아! 이연아, 내 말 들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쾅쾅쾅―! 철문이 시끄럽게 두들겨졌다. 이연은 미식거리는 속을 꾹 참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귀에 익은…….
“으윽…….”
기억이 날듯 말듯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이연아, 들리니? 들려? 들리면 대답 좀 해 봐!”
그 순간, 가물가물한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전구처럼 확 켜졌다.
“……선배? 황조윤 선배예요?”
이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화이도에서 사라진 황조윤의 것이었다.
그는 바로 옆방에 있는지 악쓰는 소리가 제법 가까이서 들려왔다. 도대체 며칠이 지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연은 치미는 현기증을 참으며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대체,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너 몰라?”
잠시 뜸을 들인 황조윤은 이내 격해진 숨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며 반응했다.
“시발, 여기 화이돔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