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이연 씨.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아랫배가 신경 쓰여 급하게 뛸 수는 없었지만 이연의 보폭은 점차 커져 갔다.
직원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진작 철수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일단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며 빗속을 뚫었다.
―이연 씨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
―찾았거든요, 오백 년을 메울 수 있는 방법.
“지금 어디에요?”
이연은 이미 그에게 향하고 있으면서도 먹먹함을 감춘 채 물었다.
―지금 이연 씨한테 가고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아뇨, 내가 가고 있으니까―”
그때, 그녀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정원 끝에서 우산을 쓴 권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은 절뚝이며, 한 손에는 처음 보는 첼로를 든 상태였다.
이연은 그가 사람의 멱을 쥐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이토록 자연스럽게 악기와 활을 손에 쥔 광경은 익숙지 않았다.
권기석이 연주나 첼로라는 말을 운운할 때부터 어떤 예감이 들었지만, 이연으로선 악기를 산산이 부수던 권채우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직접 본 그와 붉은 첼로의 조합은 어딘지 예사롭지 않았다.
“이연 씨, 이게 내가 찾아낸 답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권채우는 흠뻑 젖은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는 이연의 손에 우산을 단단히 쥐여주고, 손등을 힘껏 감쌌다가 멀찍이 떨어졌다.
이내 그는 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질척거리는 땅에는 엔드핀을 푹 꽂아 첼로를 고정했다.
설마, 설마…….
권채우는 그림처럼 완벽한 자세로 첼로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활을 잡은 그의 손이 별안간 부들들 떨리기 시작했다.
“…….”
“…….”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흔들림에 이연은 제가 다 긴장하듯 얼어붙었다.
빗속으로 대뜸 들어가 순식간에 젖어버린 남자에게선 미약한 두려움이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권채우는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푹 꺾인 고개와 무겁게 젖어드는 흰 와이셔츠가 왜인지 버거워 보였다.
권기석이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윤주하가 죽고 긴 슬럼프를 겪으며 음악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어쩌면 평생을 머물러 살던 곳에서 추방당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버림받아 애써 묻어둬야만 했던 음악을 다시 꺼내려는 남자.
이연은 이 순간, 저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느새 이연은 그가 첫 음을 틔우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권채우는 좀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마치 질긴 넝쿨이 그의 팔다리를 꽁꽁 휘감고 제지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연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권채우에게 다가가 가시박을 제거하듯 그의 손목을 털어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의 손길에 권채우가 어깨를 움칫했다.
“뒤돌아보지 말아요.”
권기석의 비틀린 악의를 접한 이후, 우물처럼 고여 든 마음이었다.
“권채우 씨가 그러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권기석이 어떻게든 오염시키려는 권채우의 손가락, 손등, 손목을 어림도 없다는 듯 훌훌 건드렸다.
권채우는 빛처럼 들이닥친 그녀를 속수무책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낙인처럼 얽혀 있던 가시넝쿨이 차츰 소멸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권채우가 불안정하게 숨을 들썩인 순간, 낮은 저음이 빗줄기를 갈랐다.
“……!”
그는 지문처럼 익숙한 지판을 위아래로 넘나들며 소리를 냈다.
얇은 줄을 하나씩 누르며 과격하게 뒤흔드는 길쭉한 손가락, 날카롭게 튀어나온 뼈마디. 수년간 묻혀있기만 했던 소리가 발아한 순간, 그의 손끝에서 극렬한 선율이 피어났다.
묵직하게 터져 나오는 첼로의 처음은 퍼붓듯 쏟아지는 빗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그는 턱을 악다물면서도 기다란 지판 위를 거침없이 노닐었고, 심연을 긁듯이 활을 썼다. 비통한 선율이 가슴을 짓눌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샤콘느.
그때부터 이연은 조종이라도 당하듯 권채우와 그의 홍채를 빼닮은 첼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모든 둑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폭우처럼 쏟아내는 음들이 그녀를 순식간에 잠식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뒤에서 제압하고 관절을 쉬이 꺾는 그런 잔인한 남자가 아니라, 사실은 저렇게나 연약한 줄로 세상에 다시없을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을까.
그는 레가토, 마르카토, 글리산도, 트레몰로, 등 지체 없이 주법을 바꿔가며 곡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건 흰자위까지 전부 새까만 아이가 벽을 긁는 소리였고, 발가벗은 소년의 등에 새겨진 기다란 흉터였고, 청년을 쫓아오는 썩은 손가락들이었고, 노인이 천장에 묶고 있는 밧줄이었다.
네 개의 줄, 네 번의 시간. 네 개의 소리.
그것이 권채우가 만들어낸 비통한 이야기였다. 기존의 샤콘느보다 더욱 처절하고 가파르게 느껴지는 곡. 권채우는 또 다른 의미로 괴물 같았다.
눈먼 짐승이 본능적으로 냄새를 좇듯 그의 머리도 종종 날카롭게 비틀렸다.
이연은 그의 음이 내뿜는 카리스마에 밀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연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남자였다. 흠뻑 젖은 와이셔츠는 이미 살결에 달라붙어 반투명했고, 때때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선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연은 불덩이를 삼킨 듯 온몸이 후끈거렸다.
완벽하게 길이 든 과르니에리는 차츰 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균열이 이는 소리까지도 권채우는 선율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금속성의 섬뜩한 음색도 재주껏 묶고 이으면서 절절한 호소로 이끌었다.
이연은 음악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지만 그가 정말로 남다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식물인간도, 난폭한 사냥개도 아닌, 이것이 그의 진짜 모습이라면…….
이윽고 극한의 능선을 넘을수록 그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높은 음역대까지 활이 튀어 오르고,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가 더 깊이 파이기를 반복했다.
권채우가 난도질하듯 현을 그을수록 이연은 한 꺼풀씩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밀한 속이 수차례 벗겨지고 또 벗겨졌다.
절정에 올랐던 비브라토가 여운을 남기며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소리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권채우는 쓰러지듯 첼로의 몸통을 끌어안고 오래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욱, 욱, 하고 울음을 참는 소리가 통증처럼 들렸다. 거칠게 기침을 하며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윽……. 흐, 끅…….”
“……!”
이연은 태어나 처음 접하는 남자의 눈물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연 씨가 있으면 망가진 소리도 음악이 돼요.”
그가 붉어진 눈가를 들어 올렸다. 혹독하고 애달팠던 선율보다도 한 번의 눈 맞춤에 더 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나는 이제 더는 보여줄 게 없는데.”
그가 다시 첼로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아.
이연으로선 그의 심정을 전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가 한번 버렸던 것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갔다 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바람결에 첼로를 실어 보내던 소년이, 사람을 파묻는 잔혹한 남자가 되기까지, 권채우는 아마 사장된 음악을 다시 찾기 위해 그 길을 전부 되돌고 헤집어야 했을 것이다.
권채우를 향한 연민과 애틋함, 그리고 새로운 설렘이 싹을 틔웠다. 이연은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는 권 가(家)의 어둠이 아니라 핀 포인트 조명 아래 찬란한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아랫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마침 그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녀를 곧게 쳐다보았다.
흥건한 눈망울을 다시 마주하자 이연은 가슴이 아려왔다.
“오백 년이 넘은 고(古) 악기가 외국 별장에 있어요.”
“…….”
“그 첼로를 가져와서 내가 화이도의 가문비나무가 될게요. 신령목이 있던 자리에 대신 서서 오래된 음악들을 연주할게요.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섬의 유산이 될 때까지.”
이연은 머리 한쪽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권채우는 기어이 자신만의 답을 찾아와 이연이 의기양양하게 내걸었던 마지막 성벽까지 부수어버렸다.
“그래도 내가 싫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비에 젖어 그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창백했다. 이연이 천천히 한 발짝씩 다가갔다.
“……정말로 권채우 씨가. 당신이……. 노래하는 나무였어요? 우리가, 어릴 적 만난 적이 있다고요…….”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사랑해요, 이연 씨.”
“……!”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묵직한 심장박동에 온몸이 정신없이 쿵쾅거렸다.
권채우는 사납게 치뜬 눈에 물기를 한가득 머금고 있으면서도 자못 강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츰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연은 별나게도 그가 흘리는 눈물과 뒤섞인 빗방울이 뚜렷이 구분되어 보였다. 그것을 깨닫는 즉시 그녀는 속수무책인 기분이 되어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나랑 같이 화이도로 가요.”
한 번도 찾아가 본 적 없던 어린 소년의 집으로 이연이 발을 들였다. 광기에 젖어 벽을 긁던 아이는 어둠을 몰아내는 햇빛에 넋을 놓았다.
손톱으로 할퀸 자국은 시멘트가 떨어져 괴상망측할 뿐이었는데. 별안간 빛을 받은 벽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손을 뻗었다.
“여기서 같이 나가요.”
권채우는 목 끝까지 차오른 설움에 대답을 놓치고 말았다. 이연은 조심스럽게 첼로를 치우고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그것이 무언의 허락임을 깨달은 권채우는 이연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가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연은 덩달아 붉어지는 눈시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란 듯이 행복해져요.”
“…….”
“……응, 그렇게 해요. 우리, 아무것도 겁내지 말아요.”
이연이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혼자 살아갈 각오보다 더 무서웠던 건, 또다시 같은 상처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 발짝 내딛는 일이었다.
이연은 무덤 앞에서 제 주변과 제 삶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무래도 권채우를 빠뜨리고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품고 가겠다.
샤콘느는 죽음과 부활의 노래.
그의 무덤에서는 새로운 싹이 피었고, 이연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으니, 그녀는 쏟아지는 남자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