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삐그덕―.
낡은 나무 바닥을 밟자 결이 뒤틀리며 균열이 일었다.
권채우가 어릴 적 지냈다는 말 때문일까.
이연은 아담한 안채에 도착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렸다.
이곳은 권 가(家)의 다른 저택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편에 속했으나 언덕길에서부터 이어져 온 철쭉 덕분에 운치가 있었다.
직원들이 고글을 내려쓰고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이연은 네모난 디딤돌을 밟으며 대청 앞까지 홀린 듯 다가갔다.
어릴 적 대학을 졸업했고 독일어를 잘한다는 권채우의 새로운 면면들이 요 근래 속에서 수런거렸다. 미지의 상대를 궁금해하는 것은 관심의 다른 형태라 억지로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며칠 새 비눗방울처럼 톡톡 올라오는 것이다. 하여 그녀는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안채에 발을 들였다.
삐그덕, 삐그덕.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싸늘함이 느껴지는 복도. 별안간 누군가의 실루엣이 걸렸다.
“……!”
이연은 눈에 익은 옆모습을 보며 숨을 멈추었고, 그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슈트를 완벽히 갖춰 입은 남자는 그녀를 알아보고도 그대로 등을 돌려 어느 미닫이문을 열었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 열려 있는 문을 보자 이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움직였다.
어차피 내일이면 거래했던 한 달이 다 채워진다. 그녀는 아침이 되는 즉시 이곳을 훌쩍 떠날 생각이었고, 권기석을 만난 김에 계약 종료를 미리 통보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연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문지방 너머로 고개만 쑥 내밀었다. 성인 남성이 쓰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작은 침대와 책상을 지나, 그녀의 시선이 중앙 어디쯤에 꽂혔다. 길게 늘어나 비뚤어져 버린 권기석의 그림자에.
“이 밑이, 윤주하가 갇혀 있던 지하입니다.”
“……네?”
이연은 느닷없는 이야기에 흠칫 굳었다. 어느덧 창밖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채우를 원망하고 미워하던 게 아니었습니까?”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권기석 때문에 그의 표정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상처 주고 싶었던 게 아닙니까?”
“…….”
“채우에게 거짓말을 친 건 소이연 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소이연 씨가 생각 없이 내뱉은 거짓말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같은 편? 이연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선명한 거부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권채우 씨를 상처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요.”
“그 두 개가 다른 겁니까?”
“…….”
문득 권채우의 입장에선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권기석은 별다른 위화감도 없이 어린 소년의 방에 벽지처럼 녹아들었다. 그가 이곳과 어울린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족적을 남기는 행동이 한두 번 방문해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연처럼 방을 둘러보는 대신, 바닥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푹 꺾인 그의 고개가 이상하게 섬뜩했다.
“해외에 나가 있던 채우를 성인이 되자마자 불러들인 게 접니다. 윤주하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쳤거든요.”
“……!”
이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안압이 솟구쳤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주하는 멀쩡히 살아있었습니다.”
그의 말끝에 묘한 웃음이 그을음처럼 묻어났다.
“당시 채우는 윤주하가 죽어서 잡힌 줄로만 알았을 겁니다. 그 여자가 사고를 당해서,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꼬리가 잡힌 거라고.”
“…….”
“그러다 지독한 슬럼프로 음악을 그만두고 권 가(家)의 일을 배워 나가면서 스스로 진실을 찾아가더군요. 나중에 감금 사실을 알고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광분했지만―”
순간 권기석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연은 불현듯 드는 나쁜 예감에 걸음을 물리고 싶었지만 몸이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과연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윤주하를 죽인 게 자기 자신이라는 걸.”
“……!”
미닫이문에 덜커덩, 하고 어깨가 부딪혔다. 지금…… 뭐라고. 이연은 숨을 멈추었다. 어느새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미끌미끌했다.
“저, 저는 잘 이해가…….”
권채우와 헤어지던 날, 이연은 그가 쏟아붓던 증오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그의 한을 읽어냈다.
고작 콘크리트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파괴적인 자책과 자괴감을, 이연은 헤아릴 수 있었다.
그 한 서린 마음으로 이연을 끊어내고 미워했다는 것까지 내심 이해하고 있었는데.
권기석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채우를 불러들이고, 내가 그 여자랑 마지막 내기를 했습니다. 이 집에서 첼로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밥을 주겠다고.”
권채우가 어머니의 가짜 죽음을 계기로 천재성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폭력에 빠져들어 갈 때였다. 당시, 몇 년이 지나도 콧대를 꺾지 않는 윤주하에 대한 증오로 권기석은 일부러 그런 내기 조건을 걸었다.
한번 빌어 보라고. 살고 싶다고 빌고, 배고프다고 애원해 보라고. 그런 생명력을 좀 보이라고.
권채우에게 모성을 느꼈던 것처럼, 이번엔 내 애를 위해 그런 정성을 보여 달라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 앞에서 그런 간절함을 좀 보여 달라고.
그러나 윤주하는 기다렸다는 듯 곡기를 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도무지 한 번을 굽혀주지 않는 여자였다. 종래에는 그녀의 입을 직접 벌리고 밥숟가락을 처넣었다. 음식이 잡히는 대로 손아귀에 밥알을 양껏 뭉갠 채 그녀의 어금니 사이에 직접 끼워 넣어주기까지 했다.
아울러 그녀의 턱을 두 손으로 힘껏 닫으며 싸늘히 지시했다. 씹어, 씹어서 삼켜.
권기석은 그들의 아이를 위해 삶을 선택하는 여자를 봐야지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윤주하는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권기석을 철저히 거부했다. 강제로 관계를 맺고 감금을 한 그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밤새 영양제를 맞추고 있으면 주삿바늘로 제 목을 찌르기나 하는 여자였다. 그렇게나 지독하고 무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억을 잃은 채 소이연과 부부가 된 동생을 보며 권기석은 자연스럽게 바라게 되었다.
채우가 소이연의 거짓말을 알게 된 후, ‘가짜’와 ‘거짓말’이라는 트라우마에 짓눌려 그녀에게 잔혹하게 굴기를.
사람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기왕이면 자신과 똑같은 멍에를 짊어지기를.
그렇게라도 채우와 제가 조금이라도 닮은 점이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윤주하가 가슴 깊이 품었던 존재를 조금은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채우는 매번 권기석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고, 그것은 또 다른 패배감을 불러일으켰다.
“……윤주하 씨를, 좋아한 거 아니었어요?”
이연은 끔찍한 무언가를 보듯 새파래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좋아한다, 라…….”
그는 별 희한한 소릴 다 듣겠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권 가(家)의 장남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가 넥타이를 목 끝까지 조이며 말했다.
“감히 권 가의 아이를 유괴하고, 권 가의 또 다른 아이를 죽인 죄를, 나는 받아냈습니다. 그 내기는 내가 이긴 겁니다.”
마른번개가 치면서 주위가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역광에 가려져 있던 그의 턱선이 불끈 튀어나왔다.
이연은 말과 표정이 일치되지 않는 남자에게서 왠지 모를 껄끄러움을 느꼈다.
평생에 걸쳐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꽁꽁 닫아두었던 빗장이 부질없이 열리는 것 같았다. 혹여나 자신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급하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윤주하는 굶어 죽었습니다. 채우가, 연주를 하지 않았기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나쁜 건 당신이다, 나쁜 건 당연히 행위자인 권기석이었다. 그렇게 이연이 눈에 불을 켠 순간―
“나는 채우가 가장 행복할 때 이 내기 조건을 직접 말해 줄 겁니다.”
“……!”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악의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이연은 제 마음의 빛깔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네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범인은, 가장 먼저 윤주하를 놓아버린 네 자신이라고.”
이연은 악질적이며 잔인한 그의 왜곡에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두말할 것 없이 나쁜 사람은 권기석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권채우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말이기도 해서.
이연은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안 그래도 자책에 짓눌려 있던 남자에게 더한 무게를 짊어지게 할 순 없었다.
이연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이별과 증오를 납득하고 소화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남기고 간 상한 반찬들을 먹으며 어떻게든 그를 이해해봤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권채우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의 존재가 이연에게 유달리 특별했기 때문에 또 다시 압도당하는 일이 무서운 것뿐이었다.
그런데 권기석과 같은 편으로 싸잡히다니. 순간 콧속으로 습한 비 냄새가 확 들이닥쳤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걸 말해 주는 건데요?”
그에 권기석이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일이면 계약이 끝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얼굴 보는 건 마지막이 될 테니까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짧게 묵례를 한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연을 지나치며 난제를 남겼다.
“채우가, 소이연 씨 곁에서 행복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건 권기석이 내민 지독한 딜레마였다.
윤주하에게 내기를 걸었다더니. 그에겐 이 모든 게 유흥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권기석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이연은 나무의사였고, 자기 자신을 대할 때보다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한 생명을 위해 더 큰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던 이연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토록 걸었어도 결번으로 뜨던 번호였는데.
야속했던 그 이름이 액정에 찍힌 순간.
비를 맞아 단단해진 흙더미가 이연의 속을 빠듯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채우 씨, 더 이상 이딴 곳에 있지 말아요.
식물에게는 저마다 맞는 토양이 있고, 이연은 될 수 있는 한 권채우를 옮겨 심고 싶었다.
막혀있던 숨이 마침내 새로운 기도를 확보한 듯 힘차게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