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자 하나로 묶은 머리채가 목덜미에 부딪쳤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그녀의 발밑에 고였지만 이연은 그것들을 뭉개듯 밟으며 지나갔다.
권채우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왈칵 열고 들어갈 때까지 이연은 제 감정에만 몰두된 상태였다.
암막 커튼을 젖히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
건조한 침묵 속, 공기청정기가 위이잉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무기질적인 소음이 묘하게도 이곳의 생기를 전부 빨아들였다.
이연은 활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안을 괜스레 두리번거리며 더욱 깊숙이 발을 들였다.
마침 침대맡에 등을 기대고 있던 권채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은근히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는 다짜고짜 이연이 나타난 게 퍽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슬쩍 드러난 작은 화면에는 CCTV 영상이 띄워져 있었고, 권채우는 퍽 소리가 날 만큼 급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이연 씨.”
“왜…―”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침대 끝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목에 감겨있던 가시박이 더욱 살갗을 파고드는 듯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사람 심란하게 이 난리예요…….”
이연의 감정을 헤아려 주었던 그의 이해는 오히려 허락도 없이 선을 넘어온 것처럼 불쾌했다.
괜스레 눈물이 나고 동요해버린 것이 꼭 싸움에서 진 병사 같아 더욱 야멸찬 화가 돋았다.
“나는 매순간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에요.”
격앙된 얼굴이 새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그런 건 상관없이 계속해서 권채우 씨랑 줄다리기를 해요. 나는 이런 거 한 번도 바란 적 없어요. 권채우 씨가 다치고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도, 고마우면서 미안한 뒤죽박죽인 감정도 나는 버거워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어요……!”
그날, 호텔 방에서. 절박하게 뻗어오던 그의 팔에 번번이 붙잡혔다. 멍이라도 남길 요량이었는지 살점을 짓눌러오던 악력은 이연이 비로소 혼자가 된 한밤중에야 더욱 위력을 발휘하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과거를 다시 펼쳐서 쓰고 싶었어요?”
“…….”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덮고 싶어요.”
“이연 씨.”
권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 숨까지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에 곧장 이불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을 꿰뚫는 통증에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그쪽이 계속 방해하고 있잖아요……!”
권채우가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섰다.
권 가(家)에 온 첫날부터 그와 얽히면서 온갖 사건에 휘말렸다. 그러는 사이, 이 가시박처럼 그의 존재가 자꾸만 이연의 발목을 휘감았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악력에 이연은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나는 갈 거예요.”
이연은 붉어진 눈으로도 사뭇 냉정하게 말했다.
“여길 나갈 거예요.”
“네, 알아요.”
알고 있다는 듯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드러진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움직였다. 이연은 얼핏 순종적이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더욱 불이 붙은 듯 불편한 감정을 터트렸다.
“권채우 씨가 무슨 수를 쓰든, 당신이 무슨 노력을 하든, 나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내가 왜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이연은 제 머리를 한 움큼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관성적으로 상대를 밀어내고, 밀어내는, 지독한 방어의 일환이었다.
권채우의 진심에 반응하듯 균열이 이는 껍데기를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다.
“안 할게요.”
그때 권채우가 나지막하게 끼어들었다.
“이연 씨한테 그때로 돌아가자고 안 할게요.”
그는 어둠에 침잠하듯 읊조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단단했다.
“나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여름은 이미 끝났다는 거 알아요.”
“…….”
“다신 오지 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알아요.”
권채우가 써머의 증상에 시달리면서 깨달은 건, 모든 게 자기만족이고 허상이었다는 뼈아픈 진실뿐이었다.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돌아가거나, 나를 다시 받아달라는 게 아니라―”
그는 한 발짝 다가오는 대신, 도리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
이연은 찔리듯 심장이 움찔거렸다.
“이연 씨, 내 직업 알아요?”
그가 고개를 어슷하게 기울이며 평연하게 물어왔으나, 이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진짜 생일은요?”
“…….”
“내가 뭘 전공했는지는 짐작이 가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그의 지적대로 자신은 몰랐으니까. 별안간 활활 타오르던 감정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도 어릴 때 외국에서 졸업했어요.”
그건 이연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권채우가 아닌, 처음 접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 같았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관심도 두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이연은 꾹 다물 수밖에 없는 이 입이 괜스레 궁색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는 한 명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연락 오는 사람은 몇 있어요.”
“…….”
“전부 외국 사람이고요.”
“…….”
“그리고 나 독일어 잘해요.”
이연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꺼풀만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미 이연 씨가 묻은 사람을 내가 다시 들이밀어 볼 수도 있겠지만. 이연 씨는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은 걸 모르고 있어요. 식물인간이었던 남편 말고, 진짜 권채우에 대해서.”
그가 고개를 세우고 이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이라도 잘못 댔다간 화르륵 집어삼켜질 것처럼 선명한 불길이 그의 홍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 시작하려고요.”
“……!”
“죽은 사람은 죽은 채로 둬요. 어차피 예나 지금이나 내 경쟁자는 항상 이연 씨 전남편이었어요.”
이연은 기가 막혀 입을 반쯤 벌렸다.
“앞으로 이연 씨 기억에서 그딴 쓰레기 하나 못 밀어내면 좆 떼야죠.”
언젠가 화이도의 식탁에서 혼자 오해하고 열을 내면서 그런 말을 했던 권채우와 겹쳐 보였다.
몸은 곳곳이 뚫려 엉망이 된 주제에 꼭 그때처럼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는 그래도 한 뼘 더 깊어져 있었다.
결국 이연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조소와도 같은 한숨을 터트렸다. 왜인지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대체 과거에 아직도 사로잡혀있는 건 어느 쪽일까?
권채우를 묻었던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였지, 이렇게 완고함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새 출발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상대를 인정하는 건 또 어려워서.
그녀가 겪어보지 못했던 권 가(家)의 도련님과 부딪칠 때마다 벽을 치고 꼬장꼬장하게 외면했다.
그거야말로 다 비워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 같은데…….
묘한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이 누군지 뻔히 아는데……!”
그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연은 끝까지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내가 뭐, 그동안 눈 감고 지낸 줄 알아요? 여기서 보고 듣고 겪은 게 몇 갠데요……! 익명으로 올려도 아무도 안 믿을 희한한 일들은 다 경험해봤는데, 권 가(家) 아들이랑 상식적으로 뭘 해요?”
“아―. 이연 씨는 착한 거 좋아했죠?”
그때,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권채우가 성큼 다가왔다. 느슨한 옷차림 때문인지 곧게 뻗은 빗장뼈와 쇄골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 전보다 훨씬 야위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건가?
“나는 이연 씨가 원하는 건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어요.”
“하…….”
“원하는 조건 있어요? 혹시 빈털터리가 취향이면 그것도 맞춰줄 수 있고요. 쓸 만해 보이면 주워서 일회용으로라도 써 봐요. 이연 씨 입맛은 내가 어떻게든 맞춰 볼게요.”
“…….”
“길게 하는 게 좋아요, 짧게 하는 게 좋아요?”
“네? 뭐, 뭘―”
“글쎄요, 집안일이요.”
권채우는 매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연은 반사적으로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퍽 익숙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렇게 혀를 함부로 놀려서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 건 권채우가 옛날부터 잘하던 짓 중 하나였다.
그에 이연은 빼앗긴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기로 했다.
“신령목은.”
역시나 그 말을 꺼내자마자 권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신령목은 나이가 500살이었어요. 무려 오백 년이 넘은 유산이었다고요.”
“…….”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궁지에 몰린 이연이 내걸 수 있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아직 삼십 해도 못 살아 본 권채우 씨가 그걸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 *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낸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이연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권채우는 이연이 들이민 과제에 말문이 막힌 듯 굳어 있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도 그는 목발을 짚고 와 여전히 도시락을 들이밀었고, 그녀의 의도대로 신령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결코 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일부러 낸 문제였으니까.
이연은 드디어 멀미가 멈춘 듯한 편안함을 느끼며 캐리어에 옷을 접어 넣었다.
때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핸드폰 액정을 밀었다.
“여보세요?”
―원장님, 저희가 오늘은 창고 쪽 정원도 가시박 제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창고 쪽이요?”
―아, 그게 그러니까……, 진짜 창고는 아니지만요. 지금은 안 쓰는 건물이라고 들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출입 금지 구역이었거든요. 그래서 직계 가족분들 말고는 딱히 직원들은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방금 전에 금지가 풀렸어요.
이연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놈의 계약서가 진짜 끝까지 사람을 부려 먹을 작정인 듯했다.
―그래서 다른 정원도 정리하는 김에 그쪽도 들리려고 하거든요. 도구는 제가 알아서 챙겨갈 테니까 오늘은 사무실 말고 그쪽으로 바로 와주세요! 위치는 별채 뒤로 두 블럭 떨어진 곳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귀찮음을 능숙하게 감추는 순간, 이어지는 말에 이연의 손이 멈칫했다.
―아……! 막내 도련님이 어릴 때 잠시 쓰시던 방이라고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