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5/158)

#144

이연은 써머의 위력을 눈앞에서 생생히 목격하는 중이었다.

“산 바로 밑에 집이 그 누나네 집이야. 다른 데 말고 그 집부터 가. 만약 누나가 모른 척하면 그동안 나한테 들은 음악 값 전부 내라고 해……!”

“권채…―”

“나무 밑에 내가 좋아하는 씨디 묻어놨어. 내가 노래하는 나무야, 그게 증거야! 얼른 가,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

순간 어깨가 흠칫 튀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노래하는 나무?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권채우는 지금 누가 봐도 과거를 헤매는 중이었고, 이연은 흐릿해진 그의 동공을 보며 덩달아 넋이 나가고 말았다.

권채우는 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렸지만, 놀랍게도 그가 보고 있는 시야를 함께 공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정작 권채우는 표정도, 목소리도, 걸음도 자유로운데 그녀만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연 씨, 좆 빨아 봤어요?”

그가 툭 던지기만 해도 그게 어떤 순간이었는지 저절로 떠올랐다.

써머는 원하는 것, 보고 싶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해 준다고 했는데.

“……이게 아니에요.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

“내가 잘못했어요. 무섭게 굴어서 내가 미안해요.”

맨몸으로 다시 과거와 부딪치는 남자를 보며 이연은 하릴없이 애꿎은 치마만 움켜잡았다.

그는 어린 시절을 지나, 두 사람의 첫날밤을 거쳐, 이연으로선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날까지 전부 통과하고 있었다.

얼음 호수에 선 듯 언제 깨질지 몰라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날들. 권채우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왜 그런 곳에 가 있어? 대체 뭐가 보고 싶어서 거기에 가 있어? 써머는 좋은 것만 보여주는 거 아니었어? 하필이면 왜 가장 비참했던 그곳에 가서 당신은…….

‘난 써머를 먹지도 않았는데.’

권채우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과거로 인도했다. 이연이 사촌오빠에게 맞았을 때, 못대산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나비를 헤치고 그에게 안겨 언약을 했을 때, 그들이 완전히 깨져 버렸을 때.

권채우는 즐거운 날보다는 서로를 할퀴었던 순간에 더 오래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연은 남자의 서툰 진심을 들으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족족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바닥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일말의 소리도 없이 비처럼 내리기만 하는 눈물의 이유를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권채우는 지치지도 않고 이연을 달래고 사죄했다.

도중에 장범희와 의사가 들어와 환자인 권채우를 살펴보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환각 그 너머만 헤맬 따름이었다.

게다가 이연을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덩달아 과거의 조각에 찔리고, 메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불현듯 그가 깨어난 것이다.

“…….”

“…….”

작게 조여드는 동공을 마주한 순간, 이연은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계약은 고작 며칠밖에 안 남았어.’

곧 화이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그의 내밀한 고백을 들쑤셔 묻어두었던 과거를 다시 자극하는 게 무서웠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무탈하게 화이도로 돌아갈 수 있는데.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이 집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경고등처럼 윙윙 울렸다.

그리고 만약 권채우가 진짜 노래하는 나무였다면…….

아니야, 생각하지 마.

숨을 들이켠 그녀의 쇄골이 푹 들어갔다.

며칠만 버티면 된다. 자신만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이대로 조용히 권 가(家)를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정신이 좀 들어요?”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권채우는 수려한 눈매를 몇 번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아아―. 역시 여기가 더 좋아요.”

이연은 눈을 질끈 감고 멀미라도 하듯 진탕 뒤섞이는 속을 내리눌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끄집어내선 안 될 것 같았다.

“권채우 씨는 술 먹지 말아요, 말이 엄청 많아져요.”

“…….”

“그쪽 주사가 너무 요란해서 난 옷도 못 갈아입었어요.”

이것 좀 봐요, 하듯 그녀가 치마를 흔들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연은 어색한 미소로 맞닿아있는 그의 가슴팍을 밀었고, 그렇게 몇 시간째 그녀를 놓아주지 않던 팔이 스르륵 풀렸다.

“이연 씨.”

나직한 부름에 중심을 비껴간 이연의 초점이 파르르 떨렸다. 아까부터 심장이 가파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애써 감추고 있던 동요를 전부 들켜버릴까 봐, 차마 마주볼 수도 없었다.

“윽……!”

그때까지도 멍하니 이연만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뒤늦게야 밀려드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밖에 비서님 대기하고 있어요. 얼른 불러올게요……!”

이연은 그의 옷 너머로 삐져나온 붕대에 불안한 시선을 주었다. 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만 생각하면 현기증이 치밀고 속이 뒤집혔다. 또다시 숨이 가빠질 것 같자 이연은 재깍 등을 돌렸다.

“……되나.”

그때, 느닷없이 흰 치마가 붙들렸다.

“내가…―”

들썩이는 호흡에 묻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강퍅하게 드러난 손등의 뼈 때문인지 치마를 잡은 게 아니라, 숫제 우그러뜨리려는 것처럼 보여 절로 긴장이 되었다.

이내 권채우는 아픈 옆구리를 짚으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차라리 이대로 신부를 훔쳐 온 거라면 좋았을 거예요.”

현실을 직시해 오는 권채우의 눈빛이 순간 차양처럼 이연을 뒤덮었다. 이연은 권채우의 손길을 뿌리치고 허둥지둥 문 쪽으로 걸어갔다. 왜인지 진정이 되질 않아 이마에 뜨뜻한 열이 올랐다.

* * *

큰 사고를 겪은 저택 아래에는 여전히 짙은 우울감이 깔려 있었지만, 어느새 사용인들의 빈자리는 새로운 인력들로 완벽히 채워졌다. 그러자 권 가(家)에도 나름의 안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권채우는 회복을 위해 얌전히 별채에 갇혀 치료를 받았고, 이연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오늘 아침에는 권채우가 다리 한쪽을 절뚝이며 도시락을 싸 들고 찾아왔다. 몸도 다친 사람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기가 막혀 애꿎은 화만 솟구쳤다.

이연은 자칫 잘못하다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까 봐 입을 조개처럼 다물기 일쑤였고, 이내 도시락을 낚아채듯 받아들고 쌩하니 그를 지나쳤다. 코너를 돌 때까지 끈질긴 시선이 달라붙었다.

“이건 생태교란종이에요.”

이연은 인상을 쓰며 콧잔등을 벅벅 긁었다.

인공 호수 주변으로 녹색 빛깔이 가득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언뜻 푸르른 녹음은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것의 진짜 정체는 다른 식물들을 뒤덮어 죽이는 ‘가시박’이었다.

이연은 정원관리팀 직원들과 함께 이 골칫덩이 덩굴을 제거하기 위해 전부 예초기를 들고 모인 참이었다.

“한번 가시가 박히면 육안으로는 잘 안 보여요. 그런데 지금 가시박이 다 붙어가지고 나무들이 앓고 있네요. 통증도 계속 있을 거고요. 이대로 놔두면 이놈들이 주위 나무나 풀을 전부 전멸시킬 거예요. 가시박이 빠르게 타고 올라가면서 광합성을 막기 때문에 나무를 고사시키거든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어요. 무섭게 굴어서 내가 미안해요.’

별안간 훅 치고 들어오는 음성에 이연은 얼굴을 굳히고 멈칫했다.

“……대대적으로 박멸해야 합니다.”

그녀는 괜스레 목청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목장갑을 꼈다.

그렇지 않으면 번식능력이 빠르고 질긴 가시박은 해마다 제거작업을 해도 계속해서 피해를 준다. 이연은 억지로 생각을 돌렸다.

그녀는 뒤따라온 직원들에게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안전하게 복장을 마무리 지은 뒤, 바닥에 내려놓았던 예초기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이연도 망설임 없이 가시박을 잘라나갔다.

그러나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목소리는 구슬처럼 줄줄이 꿰어져 그녀를 정신 사납게 만들었다.

‘그 거짓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놨어요.’

이연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털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덩굴손을 죽 잡아당겼지만 질긴 가시박은 잘 끊어지지도 않았다.

“이거 되게 질기니까 다들 손 조심하세요!”

가시박은 고작 3시간 만에 나무를 한 바퀴 감쌀 정도로 자라는 속도가 빨랐다. 고작 몇 달만 지나도 온 정원을 뒤덮을 만큼 빠르게 번식하기 때문에 그보다 신속하게 없애야 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 손에 피 대신 물을 묻히면서 당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남을 해치는 대신 동물들을 구조하면서,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이연 씨가 알려 줬잖아요. 그런 평범한 감각들이 얼마나 신기했는데요.’

이연은 끙끙대며 용수철 모양으로 나무에 붙어 있는 덩굴을 가위로 뚝 잘라냈다.

‘이연 씨가 원하는 만큼 계속 걸어가요. 도중에 나를 수백, 수천 번 버려도 좋아요. 나를 가장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고 제일 먼저 떨궈요. 그 대신……, 가장 마지막에만 나를 주워 줘요. 그때가 언제든 상관 안 할게요.’

권채우의 목소리는 어떻게든 가슴 한켠으로 밀어 넣고 눈앞의 작업에만 열중하려 했다. 그녀는 예초기를 움킨 손아귀에 힘을 더욱 주었다.

‘다시 화이도로 돌아가고 싶어요. 삶이 끝날 때, 이연 씨 곁에 묻히고 싶어서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건 그녀 전문이 아니었나? 한번 해 봤으니 두 번째는 더 능숙하게 잘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이연은 어느 순간부터 숨을 씩씩거리며 작업을 해 나갔다. 그녀의 입매가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당장 며칠 후면 한 달 계약이 끝난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머지않았는데 왜……!

“아……!”

그때 이연의 장갑에 가시박이 엉키는 바람에 두꺼운 천을 뚫고 가시가 푹 박혔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데 뭐가 그렇게 아프고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별것도 아닌 이깟 상처에……! 그런데도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아……. 진짜…….”

“원장님 괜찮으세요?”

“아니요.”

“네?”

괜찮지 않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뒤늦게, 느닷없이 나타나 모든 것을 교란시킨 권채우의 진심 때문에.

이연은 쓰고 있던 안전모와 장갑, 예초기를 하나씩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호흡을 사리물고 별채로 몸을 틀었다.

“어? 원장님, 어디 가세요? 원장님……!”

이연으로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권채우로부터 도망치게 해 주겠다는 권기석의 제안과 그녀의 한쪽 손목을 휘감아버린 이 억세고도 따가운 생태교란종 사이에서.

이제는 담판을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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