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3/158)

#142

“……그건, 그건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눈을 뜨자마자 이불에 폭 감싸인 이연의 붉어진 귀가 보였다.

권채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들이켰다.

여기는…….

아침 햇살이 얇은 시폰 커튼을 투과해 들어오고 있었다. 현재 그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올려 둔 트레이를 침대맡 협탁에 내려두고 그녀의 잔머리를 살살 쓸어 주는 중이었다.

그가 손수 씻겨서 입혀 놓은 잠옷, 그 속에 가려진 울혈,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권채우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굳어 있는 사이, 이연은 왜인지 겁에 질린 채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딴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그냥……, 궁금했거든요. 다른 남자들은 권채우 씨랑 어떻게 다른지. 다른 남자들 앞에서도, 내가 권채우 씨한테 가끔 그러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지. 나는 확인해야만 했어요.”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에 권채우는 지금이 첫날밤을 치르고 난 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몰래 다른 남자들과 줄줄이 맞선을 보고, 혼인 신고를 안 했다는 거짓말에 화가 나서 결국 참지 못해 뱉어 낸 정욕이었다.

“왜냐면, 나는 권채우 씨가 진짜, 진짜…….”

“…….”

“사람이라 생각하면 무섭고, 그런데 개라고 여기면 좀 괜찮고, 잘 때는 식물 같아서 눈길이 가고…….”

권채우는 치밀어 오르는 애정에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밤새 그에게 시달리고도 최선을 다해 제 마음을 풀어놓는 그녀가 예뻐도 너무 예뻐서.

그가 잃어버린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귀찮아 본 건 처음이에요. 권채우 씨 때문에 하루하루가 정신없어서 정말 성가셔요.”

꾸밈없던 그녀의 고백이 사실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 당시의 그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무섭다고 여긴 남자를 자신의 세계로 들여놓기까지 그녀의 각오가 어떠했는지, 이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었다.

그러니 이연이 속살거린 사랑이 기만이라고 쉽게 손가락질할 수 있었으며, 그녀의 진심은 처음부터 쏙 빼놓은 채 거짓말의 행위에 대해서만 득달같이 비난해 댔다.

권채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녀가 매 순간 뛰어넘어야 했을 두려움 따위는 전혀 고려해 주지 않았다.

권채우는 이연을 번쩍 안아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의 입은 이미 재생된 녹화분처럼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랑 날 비교해 본 소감은 어땠어요? 그 결과가 듣고 싶은데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자 작은 새처럼 안타까운 숨소리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그때 창밖에서 권채우 씨를 봤거든요.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었어요. 권채우 씨 데리고요.”

담백한 그 말이 다시 한 번 남자의 심장을 쳤다. 악에 받쳤던 복수심을 버리고 그가 되찾고자 했던 건 고작 이런 시간들이었다.

작고 허름한 집, 그보다 더 작은 침실, 그보다 더 작은 침대. 그곳에서 주고받는 단 둘만의 다정한 말소리.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이 황당한 고백을 듣기 위해, 고작 이것을 위해 권채우는 가진 것 전부를 버릴 수 있었다.

이날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아직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던 이 시간대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현기증이 치밀며 시야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각의 벽이 무너지고, 아침 햇살이 허물어졌다.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듯 모든 장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

간신히 붙잡은 이해의 실마리마저 모래성처럼 사라지기 전에, 권채우는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똑같은 실수는 다시 안 해요! 거기에 이연 씨가 있다면, 조금만 기다려 줘요.”

다급하게 말을 내뱉는 순간, 권채우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있는 곳까지 무작정 이 어지러운 터널을 뚫고 지나가겠다고.

손가락 사이에 감아 두었던 첼로 줄이 살갗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등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에요.”

의식하지도 못한 새 말이 먼저 나갔다. 피부를 옥죄는 팽팽한 줄은 사실 손가락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던 이 배신감과 분노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나. 가슴께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위태로웠다.

권채우는 놀라 굳어 버린 이연의 얼굴을 보며 낭패감에 혀를 짓씹었다. 신령목 수술 이후, 화이도에서의 기억은 전부 잊어버리고 깨어났던 그때였다. 이내 그의 입술은 어김없이 정해진 수순 대로 움직였다.

“지금부터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할 거예요.”

“……채우 씨?”

“이연 씨, 좆 빨아 봤어요?”

“네?”

권채우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제 입을 멈추고만 싶었다. 떠본다는 명목하에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괴롭히려는 심산이었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범희가 건네주었던 그동안의 녹음 파일을 듣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상하게 화가 났다. 어떻게 거짓말로 가짜 아내 행세를 하면서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어? 이유도 모른 채 속 어딘가가 거하게 비틀렸다.

그러나 권채우의 몸은 시시각각 그녀에게 반응했고, 아무리 벽을 세우고 모질게 굴어 봤자 결국 휘청거리는 건 자신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를 인정하는 게 몹시도 어려웠다.

저만 또다시 거짓말에 진심이 되었을까 봐. 시시때때로 억울하고 묘한 거부감이 식도를 역류했다.

“내가 이연 씨 목구멍에 이걸 넣으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텐데.”

“…….”

“할 거면 제대로 벌리고 시작해야죠.”

어느새 남자는 이연을 침대로 밀치고 성기를 꺼내고 있었다.

씨발,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 뭐든 네 생각, 네 기준대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그녀부터 좀 살펴봐. 무서워하고 있잖아. 네 좆대로 밀어붙이지 말라고, 개새끼야.

그러나 권채우는 손가락 세 개를 그녀의 입 안으로 푹 쑤셔 넣고 공간을 벌려 갈 따름이었다. 이연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아무런 감정 없이 축축한 안쪽을 휘젓고 있는데 별안간 그가 우뚝 멈추었다.

꽉 쥐고 있는 주먹, 불긋해진 눈가, 버거워 보이는 호흡, 겁에 질려 떨리는 어깨. 그 반응 하나하나가 문득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정해져 있던 행동을 비틀었다.

“……이게 아니에요.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켁, 큽……!”

“내가 잘못했어요. 무섭게 굴어서 내가 미안해요.”

권채우는 침대 아래에 주저앉아 이연의 무릎에 이마를 문질러 댔다. 이상하게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연 씨, 사실은 이때부터 불안했죠?”

권채우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을 믿고 기다려 봤으면 어땠을까.

그녀를 떠보고 조롱하는 대신, 당신에게 빠져드는 속도가, 발이 닿지 않는 당신의 깊이가 무서웠노라고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 봤으면 어땠을까.

이연의 얼굴을 쓰다듬던 권채우는 다시금 시야가 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이연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저 사람, 내 남편 아니야. 나 결혼한 거 아니야. 오빠 착각이야.”

사촌 오빠에게 맞은 뺨이 붉게 부풀어 올랐을 때, 권채우는 그동안 그렇게나 악착같이 긁어모았던 이성이 단번에 마비되는 듯했다.

내가 왜 네 남편이 아니야? 불쑥 울화처럼 치미는 이 감정은 대체 누구의 것인지.

그러나 백치 새끼의 것이라기엔 뒤이어 따라붙는 의심은 누가 뭐래도 저만의 기억이었다. 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울었던 것도 혹시 저 새끼 때문이었어? 가족 같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이연 씨, 나는 대체 누구예요?”

“나, 나는 채우 씨가 창피할까 봐 그랬어요.”

“…….”

“이런 골 아픈 소란에 휘말리지 않게, 기분 나쁜 일은 안 당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좀 둘러봐요. 다들 어떤 눈빛인지. 그러니까 지금은 내 남편이 아닌 걸로 해요. 그래 줄 수 있잖아요.”

당시의 권채우는 그저 속만 뒤틀린 애송이여서, 그를 거슬리게 했던 상황에만 집중했었다.

“왜 하필 나한테 그딴 꼴을 보였어요.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게 사람을 기어이 나서게 해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남편 아니야, 결혼한 거 아니야, 착각이야. 씨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다 설명했잖아요. 나는 권채우 씨가 그런 상황에 엮이는 게 싫었다고.”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에도 그는 비웃음만 흘렸다.

“대, 대체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 욕먹이는 짓을 해요.”

평생을 두려워했던 사촌오빠에게 맞서면서까지 권채우를 세간의 시선에서 지켜 주려던 그녀였는데. 아둔했던 그는 이연이 내보인 진심들을 전부 다 놓치거나 흘려들었다.

그녀의 태생이 어떤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이 그녀를 얼마나 잔인하게 생채기 냈으며, 스스로를 끔찍하고 더러운 것이라 여기게끔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권채우는 그녀가 다시 한 번 가족이라는 자리에 꽃을 엮고 그를 앉혀 놓은 각오를 가볍게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사자인 저만큼은 알아 줬어야 했는데. 그 안쓰럽고 고마운 용기를 미리 알아보고 안아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는 못할망정, 빈정거리고 질책하기만 했다.

그녀가 안전했던 제 영역을 부수고, 또다시 같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권채우를 받아들일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은 했나?

아니었다. 그저 제 분노에만 눈이 멀어서, 그녀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이제 와 절절히 느껴지는 죄스러움에 권채우는 손바닥이 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 나네.”

“……!”

그러나 악의에 절여진 목소리는 어김없이 튀어 나갔다.

“혼자 보기 아깝게 언제 이렇게 진심이 됐어요.”

“……네?”

이연의 얼굴이 굳는 순간, 그는 수류를 가르듯 이를 악물고 태세를 전환했다.

“고마워서요.”

그래, 사실은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날 지키려고 애써 줘서 고마워요.”

“……!”

“하지만 나도, 똑같이 이연 씨를 보호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연의 찢어진 입술에서 배어나온 핏물을 혀로 가볍게 훔쳐 갔다.

“이연 씨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당신은 이렇게나 맞았는데,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는 게 참을 수 없었어요. 오늘 뿐만이 아니에요. 그동안 내가 없는 곳에서 이렇게 당했을 이연 씨가 생각나고, 그보다 더 어렸을 이연 씨가 생각나서. 그걸 능숙히 삼키기엔 내가 너무 모자란 놈이라 윽박이나 질러 댔어요.”

동시에, 권채우는 이곳이 철저히 가짜임을 알았다.

이연이 안심이라는 듯 웃어 주었으니까.

재회한 이후 그녀가 제 앞에서 웃는 일이 있었던가? 엄청난 허무가 그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어도 계속해서 갈증이 났다. 쉽게 찢어지는 모조품을 보듯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아 얼굴만 굳히고 있자니, 불현듯 강렬한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아무리 그리운 과거든, 달콤한 꿈이든, 고쳐 쓸 수 있는 환상이든 다 필요 없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진실로 숨 막히게 끌어안아 주고 싶은 이는, 그를 외면하고 받아 주지 않는 현재의 소이연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안배된 것 같은 이 시공간보다, 그녀의 상처와 외면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

그곳이야말로 믿기지 않는 진정한 환상, 그 자체였으므로.

얼어붙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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